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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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망인이 연주하는 피아노 연주곡 “사랑해요 그대”피아니스트 이혜란 그녀는 5년 전 타계한 故 김강식 남해안발전연구소 이사장의 미망인이다. 그녀는 정치하는 남편 김강식을 따라 20년 전 여수에 왔지만 남편은 4번 낙선 끝에 병을 얻어 유명을 달리했다. 20년 을 제2의 고향처럼 산 여수를 떠날 수 없어 남편이 그리도 좋아 했다는 장군도가 보이는 곳에‘해안tong 갤러리’를 만들고 사람들이 떠난 원도심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하고 있다. 1, 2층으로 이뤄진 갤러리는 지역 예술가는 물론 국내의 유수한 작가들의 작품전을 열고 있다.오는 12월 18일이 남편과 사별한지 5년째가 되는 올해 그녀는 남년 김강식 과의 사랑을 피아노 연주와 시, 사진, 기타로 잔잔히 전하고자 4일 오후 7시 30분 예울마루서 이혜란의 토크콘서트 “사랑해요 그대”를 연다. 그녀는 남편과 사별한 후 매 주기 마다 작은 공연을 열었다고 한다. 2010년 남편과 사별하면서 매 주기마다 작은 공연과 출판 기념회를 가졌습니다.1주기 때도 피아노 연주회를 가졌습니다. 2주기 때는 토크 콘서트를 열고, 3주기 때는 에세이 집‘그리움을 넘어’를 발간해 진남문예회관에서 출판기념회를 가졌습니다.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그 슬픔을 혼자서 삭이지 않고 써내려 간 글들을 한데 모았습니다.그렇게 하면서 치유가 되었던 것들을 다 담았습니다. 작년에는 이곳 해안tong을 열면서 여수의 진정한 사랑 이란 게 뭘까 또 그것이 가능한지를 생각 했죠 확 트인 바다를 매일 보면서 말입니다. 그 분이( 故 김강식 씨) 장군도를 바라보는 것을 그렇게 좋아했습니다. 저는 처음엔 왜 그런지를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올해로 해안tong을 연지 2년째를 맞고 있는데 이곳에서 새로운 희망을 찾고 있습니다.다양한 장르의 예술 세계를 통해 소통하면서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누구나 아픔과 고통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승화 할 수 있을까를 그것은 각자가 다 있는 것이라는 것을 나에게만 고통이나 아픔이 있다는 것이 아니다 는 것을 서로가 알아가고 그 치유를 문화와 예술로 통해서 극복 해 간다는 것 그리고 무엇 보다 가장 큰 것은 혼자서는 안 된다는 것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죠. 그래서 이번 음악회 또한 같이 아픔을 극복해 가는 과정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이번 연주회 또한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하는 것입니다. 4일(금요일) 예울마루에서 열리게 되는 이번 공연은 1, 2부로 이뤄졌습니다. 1부는 조금은 어두워요 아픔과 절망, 절규 등 잃어버린 것들이죠. 2부는 치유의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울음을 노래로, 절규를 사랑으로 이뤄졌습니다.공연이 끝나고 나올 때는 웃을 수 있어요. 해피엔딩으로 꾸려진 거죠(웃음) 이번에 함께하는 분들을 보자면 시인 최지하 씨의 경우 여성 작가인데 언젠가 저와 함께 밤을 새면서 지난 5년 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눴는데 그 긴 세월의 이야기들을 한 편의 시로 너무나 아름답게 담아냈어요. 너무 놀랐어요. 시가 가장 어려운 예술의 장르잖아요 압축 시켜야 하기 때문에이번 공연은 토크 콘서트지만 말 하지 않고 말 하는 것 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사진을 담은 성남훈 작가 또한 잃어버린 것들, 소외된 자들 ..이 시대의 유민들을 담담히 담아 내가는 작가잖아요 그 안에서 공통점을 찾는 것입니다. 또 피아노와 기타가 함께 어울려 지지요.그리고 박노해 시인의 ‘별은 너에게로’ 와 ‘사랑은 불이어라’를 노래로 함께 합니다.즉 말하고 싶은 것을 시와 노래, 사진, 피아노로 말하는 종합 예술 콘서트라 할 수 있습니다. 서울이 고향인 그녀는 바다를 보면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싶은 게 꿈이었다. 해안tong을 열게 된 것 또한 바다를 보면서 피아노를 치고 싶었어요.저는 서울이 고향인데도 바다가 그렇게 좋은 거예요. 이곳 여수로 온 것은 저가 독일 유학 후1995년도에 여수에 내려 왔습니다.결혼은 1985년도에 결혼을 했고 정치에 뜻을 둔 남편과 함께 여수에 내려 온 거죠.그러면서 네 번의 선거를 치르는 과정에서도 저는 계속 예술인의 삶으로 살고 있었습니다.사실은 남편이 저에게 그 조건으로 저와 여수로 가자고 했지요. “멋 진 홀을 지어 줄께” 라고요 이 해안tong을 저에게 준 것 같아요. 왜냐면 이 해안tong을 저 혼자 운영 하는 게 아니라는 느낌이 드는 이유는 늘 보면 도움을 주는 손길들이 다 남편의 지인들이었죠. 늘 “고마워, 감사해, 사랑해” 라고 말해 주던 남편 김강식 여수 바다를 사랑하게 된 피아니스트 이혜란 남편은 병상에 있을 때에도 항상 “고마워, 감사해, 사랑해”늘 대화의 마지막은 그렇게 끝 났다고 한다. 평상시에 늘 그렇게 자상 했어요. 큰 딸이 아빠에게 받았던 편지들을 간직한 게 있는 것을 보면 저보다 잘 해 줬던 것 같아요. 그리고 저도 많이 미안했죠. 저가 서울 출신이다 보니 여수의 정서를 잘 몰랐거든요.정치에 뜻을 둔 남편의 배우자로서 역할을 다 못 해줬지요. 남편 또한 저에게 저가 하고 싶은 음악을 다 하 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늘 학교를 다니며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연주회에 나가는데 에 더 몰두 할 수 있도록 배려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여기 해안tong에 있는 피아노가 남편이 사준 스타인웨이에요 피아니스트들이 가지고 싶어 하는 피아노의 명기라고 불리는 거죠 수제품이고 한정 제작되는 거지요 . 그래서 저 꿈이 스타인웨이 피아노를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연주하는 게 꿈이이었요 그래서 남편 때문에 꿈을 이뤘지요 매일 아침 7시에 이곳에 나와 바다를 바라보며 스타인웨이를 연주하다 보면 매일 행복을 느낍니다.남편을 떠나보내고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고 싶었지만 의외로 너무 놀랍게 반전을 주게 됐고 그게 여수를 사랑하게 됐습니다.저는 여수 바다가 너무 좋습니다. 바다를 바라보면 모든 게 용서가 되고 위안이 되는 것 같아요.이 번 공연도 지난 5년의 세월의 아픔을 이겨냈고 이젠 할 수 있는 것을 기쁘게 노래로 할 수 있다는 것을 당당하게 말 하려 하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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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잃은 당신에게 전하는 마술 같은 위로가 펼쳐진다.꿈을 꾸며 살아가기엔 너무 힘든 세상! 여기 꿈을 잃은 당신에게 전하는 마술 같은 위로가 펼쳐진다 -마술사 이재철을 만나다 꿈을 잊고 살아야 하는 사회. 순응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다는 현실과 누구나 한번쯤은 품었던 꿈이 서로 대치하지 않고 양립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마술로 전하고 있는 마술사 이재철(27)의 담담 하고 솔직한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었다. 이재철 마술사는 현재 여수 파도소리 소극장에서 지난 13일 시작으로 오는 29일 까지 매주 금-일요일 오후 7시 공연을 갖고 있다. 그의 공연은 다른 마술 공연과는 달리 잔잔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다. 더욱이 그 메시지는 이제 갓 스물 일곱이 된 청년 이재철 그의 삶 자체를 말하고 있다. 그를 만난 것은 지난 20일 오후 그의 공연 소식을 접하고 공연장소를 찾았을 때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 열심이었다. 그날 관람객은 그를 만나러 온 기자 한명이었다. 여러분은 어렸을 적 꿈을 기억하고 있습니까? 또는 환상이라 것을 한번 가져 본적이 있나요 공연이 시작 됐을 때 그가 관객에게 던진 질문이다. 그는 경기도 수원에서도 아주 제법 멀리 떨어진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너무도 가난했고 부모님 도 또래 아이들의 부모님 보다 훨씬 더 연세가 많아 혹여 부모님 중 한 분이라도 학교에 찾아오는 것을 그렇게 싫어했다고 한다. 그리고 가난한 집 아이라는 소릴 듣기 싫어 친구들과도 어울리기를 꺼려 해 늘 혼자였다. 그의 유일한 벗 들은 부모님이 어쩌다 사다주는 장난감을 어루만지며 늘 그것들을 모으며 노는 것이 유일한 놀이였다고 한다. 그는 로봇, 자동차, 인형이 그의 친구였고 유일한 대화 상대였던 샘이다. 하지만 이젠 점점 그 것 마저도 가지고 놀기엔 너무 유치해 지던 때 어느날 아버지가 오랜 지병이 있던 아버지가 훌 쩍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 암 판정을 받았지만 가난한 탓에 병원 한번 제대로 못 간 아버지.. 그는 세상과 영원히 단절하고 늘 어두운 방구석에서 있으며 꿈은 없다고 생각하며 살아갔다. 우연히 본 동전 마술이 바깥세상으로 이끌어 내 저는 그렇게 주변과 그렇게 단절하며 좀처럼 소통하는 걸 꺼려했습니다. 아직도 어둠 밖에 존재 하지 않는 저에게 어느 날 웃음이 찾아 왔습니다. 우연하게 본 동전 마술이 저에게 웃음 이라는 빛을 줬고 거기에 매혹되면서 아 나도 해 보고 싶다 는 맘이 생기자 환상의 세계가 열리더군요. 그리고 그 환상의 세계는 저에게 꿈 이라는 꽃을 피우게 했습니다. 마술은 저에게 그렇게 ‘웃음’, ‘환상’, ‘꿈’ 이라는 세계를 열어 준 것입니다. 그렇게 마술을 접한 저는 마술을 통해 상처받은 사람의 마음을 치유하고, 작지만 커져버린 오해를 풀 수 있는 매개가 된다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가 가지고 있는 작은 재능이 저처럼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아가고 있는 이들. 꿈을 접고 살아가 이들 에게 닫혀 있는 공간을 열 수 있게 만 해 준다면 그 역할의 단 1%만이라도 공헌할 수 있다면..... 내 마술의 의미는 200%는 달성된다고 봅니다. 어머니에게 전 해주지 못한 소중 한 꿈 그리고 바램 그런 그도 단 한사람에게 전해 주지 못 한 꿈이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바로 그의 어머니다. 이재철 마술사가 마술을 통해 꿈을 키워 가던 어느 날 그는 어머니로부터 이 말을 듣게 된다.“ 눈을 만들 줄 아니” 아버지마저 돌아가신 가난한 집안에서 가족들을 건사하며 살아가다 지 치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그의 어머니는 늘 돌아오는 겨울의 눈은 웃음 보다는 또 다른 시련의 계절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의 어머니가 이제라도 비록 마술일지언정 눈을 보며 잠시라도 웃어 보고 행복의 시간을 보내보고자 했던 것이다.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때 그가 만들어낼 눈을 보지 못했다. 이재철 마술사가 군 복무시절 전역이 얼마 남지 않은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접한다.‘모친 작고’이제 곧 뛰어가 어머니 품에 안기며 당당한 청년으로 성장한 그의 모습을 보여 줄 날이 멀지 않았건만 그에겐 또 다른 시련이 다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를 잃은 그 때처럼 세상과 단절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자신의 그 아픔을 다시 마술로 다진 것. 그는 이날 단 한사람의 관객을 두고 열정을 다해 때로는 웃음을 띠고, 때론 눈시울 짓고 시종일관 공연을 진행 했다. 그리고 공연 말미에 하늘에 있을 어머니에게 막내아들 재철이가 전하는 편지와 함께 어머니에게 선보이지 못 한 눈을 만들어 냈다. 그는 사람들에게 담담히 전한다 여러분 지금 이 시간 누군가를 위해 간절함을 전해보고 싶지 않습니까? 자신 가슴속에 꿍꿍 감쳐 놓고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진 않습니까? 살아가는 게 힘들고, 고단해서, 성적 때문에, 바쁜 일상 때문에 점점 잊어버리고 있는 웃음, 꿈, 환상, 그리고 용기 이제 이것들을 하나, 하나 다시금 끄집어내시길 바래봅니다. [이재철 마술사가 걸어온 길] 경력 8년차 현직 프로 마술사 동아인재대학교 마술학과 졸업 I.B.M국제마술회원 등록 2014 재능기부 문화보부 위촉장 수여 2014 재능기부 국회의원 표창장 수여 2014 목포MBC 마당아티스트선발대회 수상 여수 해양경찰 함상 새해맞이 지정 마술사 어린이집, 유치원 ‘마술사 조이’ 활동 여수한고 여수화양고, 광양제철고, 여수중학교, 충덕중학교, 여수삼일중학교, 구봉중학교, 한려초등학교 등 강의 진행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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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 화양면, 제17회 여수시민체육대회 종합 1위 이유 있었네여수 복싱 대부 박규관 화양면 체육회 상임부회장 여수시 화양면(도기룡) 선수단이 제17회 여수시민체육대회에서 종합 1위를 차지했다. 화양면체육회에 따르면 지난 15일 개최된 시민체육대회에 임원 50명과 선수단 140명이 13개 종목에 출전해 종합 1위의 성적을 거뒀다고 밝혔다. 화양면 선수단은 윷놀이 등 3개 종목에서 1위를, 테니스, 게이트볼 등 3개 종목이 2위, 육상이 3위를 차지하는 등 각종 경기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여기에는 화양면 선수단을 종합 우승으로 이끄는데 남모르게 물심양면으로 뛴 박규관 화양면 체육회 상임부회장의 남다른 애향심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화양면 체육회 상임 부회장을 맡고 있는 박규관씨의 노력이 컸다. 그를 만나 이번 시민체육대회 종합 우승의 소회를 들어 봤다. 이번 시민체육대회 종합 우승은 남다른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동안 각기 다른 영역에 있었던 엘리트체육회와 생활체육회가 통합 된 이후 처음 가진 시민체육대회에서 선수 층 이 상대적으로 얕은 면단위 주민들이 종합 우승을 차지하는 쾌거를 이뤄낸 것은 이곳 출향 인사들을 더 들뜨게 했습니다.마을 이장단, 새마을지도자 협의회, 어촌계장협의회, 주민자치위원화, 화양면 연합 청년회, 화양중, 고 총문회 등 마을 주민들과 출향인들 모두가 하나가 된 거죠더구나 특히 모두를 놀라게 한 것은 화양면이 생긴 이래 400여 년의 역사동안 이렇게 큰 대회에서 종합우승을 차지 한 것은 처음 있는 일입니다.더구나 우리 화양면에는 게이트볼 연습장이 없어서 다른 동네를 찾아다니며 눈치 연습을 해야 하는 어려움마저 있었지만 이를 극복 하고 첫 대회에서 2위를 차치 한 것은 정말 대한 했죠.또 바쁜 일상에도 불구하고 고향의 명예를 높이고자 타지에서 대회에 참석해 선수로 뛰어준 젊은 후배들도 있었습니다.이번 시민체육대회는 과거 대회와는 상당 차별성을 둔 획기적인 경기도 있어 우승의 밑거름이 되기도 했습니다. 올해 첫 통합시민체육대회를 열게 되면서 과거 대회처럼 과열된 양상도 많이 줄어진 것도종합우승을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습니다. 과거 대회처럼 젊은 층 들이 많은 도시지역들이 그들의 젊은 패기로 이길 수 있었던 것에 비해 올 해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윷놀이도 포함 됐고 62세 이상 이면 참가 할 수 있는 게이트 볼 같은 도 있어서 고령의 노약자들도 그냥 구경하러 온 것이 당당한 선수로 참여 할 수 있어 말 그대로 30만 시민들이 대화합 할 수 있는 즐거운 날이 될 수 있도록 한 것은 여수시 관계자들의 사려 깊은 생각 이었습니다. 저희들도 그로 인해 고령층이 많은 면단위임에도 불구하고 모두가 나가서 즐길 수 있는 경기 였기에 가능했습니다. 박규관 상임부회장은 또 우리지역의 복싱계의 대부로도 알려진 체육인이기도 하다.그래서 이번 대회를 이끄는데 남다른 공력이 컸다. 저는 여수 복싱계의 전설로 남아 있는 故 방호남 선생의 제자로 전국체전에서 라이트 프라이급 우승을 한 선수이면서 최근 까지도 후진을 양성하고 있습니다.선생님의 제자 중 그 유명한 우리나라 최초로 권투 세계챔피언인 김기수 선배 또 다른 세계챔피언 유제두 선배 모두가 선생님의 문하생 이었죠지금은 저가 그분들의 유지를 받들어 지역 복싱 후배들을 이끌려고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여수시 복싱 명예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또 전남 복싱협회 심판위원장과 대한복싱협회심판위원을 맡고 있습니다.모든 운동이 그렇듯 실력과 함께, 성실과 노력이 동반해야 되는 거죠 게다가 단체전은 서로에 대한 믿음감 까지 있어야죠.열심히 선수단들을 이끌고 격려하며 대회를 준비했고 그에 대한 결실이 종합우승이 된 거죠무엇 보다 저희 화양면은 바로 그런 믿음감과 자신감, 노력, 성실의 결심이 지금의 종합 우승을 차지 한 것 같습니다. 한편 도기룡 화양면장은 “이번 시민체육대회 종합우승은 그동안 화양면민들이 보여준 단합된 힘이 결과로 나타난 것으로서, 내년 여수시민체육대회 역시 면민들의 단결과 화합 속에 최선을 다해 준비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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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은 단순하게 헌책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 공간헌책은 우리의 인생과 같습니다. 여수의 문화와 책의 변천사를 알리는 최선을 다 할 것입니다. 학창시절 부족한 용돈을 만들기 위한 방편으로 한번쯤은 들러보았을 서점이 헌책방 일 것이다.비록 부모님을 살짝 속이기는 했지만 헌 책방은 때론 친구들과의 만남의 장소였고 향학열을 높이는 열정과 꿈을 키웠던 장소기도 했다.그러나 인테넷 등을 통한 온라인 서점들이 등장 하면서 신간을 취급하는 서점들도 점차 문을 닫거나 규모가 축소되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이 현실을 외면하고 여수에서 유일하게 남아 있는 헌책방 형설서점형설서점을 단순한 헌 책방의 개념을 넘어서 여수와 관련된 고서적, 고문서를 한곳에 모아 여수의 산 역사를 보여주고 작은 문화원으로 만들고자 하는 책방지기 조화익 대표를 만났다. 물론 본 기자도 자주 찾던 서점이라 그 추억에 보기도 했다. 서점에 대한 이야기를 잠깐 해 주신다면 동문로는 여수역에서 중앙동 이순신광장까지 도로를 말합니다. 이 도로에박람회 전 여수역이 이사 가기 전까지는 사람들이 많이 걸어 다녔습니다. 게다가 인근에 여수고, 여수여고, 여수여중, 종고중, 공고 등 학교의 거리라고 볼 수 있지요. 여수 박람회 여수역’이 ‘엑스포역’으로 바뀌어 덕충동 굴 앞으로 옮겼습니다.역으로 드나들던 사람들이 걸어다니지 않고 무조건 차를 타고 다니면서 동문로를 걸어다니는 사람이 확 줄었지요. 또, 시내버스 환승을 하면서 중앙동까지 와서도 걷지 않고, 1년에 천만 명이온다는 관광객도 자연스럽게 종화동 바닷가로 다니면서 그만큼 오고가면서헌책방을 들르던 사람들이 줄어들었습니다. “생계 한계까지 닥쳤습니다.” 현재 소장 하고 있는 책 들을 소개 해주 신다면 1층부터 3츨 까지의 공간이 있습니다. 대략 20만권이 넘지요 하지만 실제로 판매를 하는 책은 1 층에 마련 된 책만 팔고 있습니다.2층과 3층의 책은 판매보다는 소장을 하는 책입니다. 책이 1권만 있으면 판매를 하지 않고, 2권 이상이 있을 때만 판매를 하지요. 우선 한번 2층에 같이 올라 가보지요실제 기자가 보기에도 2층에는 분야별로 책이 즐비했다.옛날 만화책을 비롯해 창비 월간지, LP판은 물론이고,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화첩, 미술도록도 많이 보였다.여수시내 가정에서 책을 정리하면서 나온 책은 물론이고, 최근 전국에서 사들인 책값이 무려 2천만원이 넘게 투자 했습니다.손님들 중 에는 어린 자년들의 손을 잡고 찾아와 이 책은 아빠, 엄마가 어렸을 때 읽었던 동화책인데 여기서 보네하며 반가워하기도 합니다.또 암흑하고 엄혹했던 시절 젊은 지성들의 열띤 토론의 대상이 되기도 했던 사회과학 서적을 들여다보며 그 시절을 회상 하는 분들도 있지요.이 LP 판도 슬슬 장르별로 정리를 해야 되는 데 시간이 좀처럼 허락 되지 않군요. 지난달 이곳에서 조금은 독특한 모임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일종의 짜장면 데이 라고 해야 하나요 여수에서 팟 케스트를 운영하고 있는 한창진 전 여수 넷통 대표가 주선을 했지요.저와의 방송을 진행 한 후 저희서점을 한 번 살려 보자는 취지에서 한 선생이 발 벗고 나서 시민들에게 이를 알렸지요.처음엔 이렇게 좁은 서점에서 짜장데이 일까 했지만 전문 DJ 가 LP 판을 틀어 주며 음악에 대한 소개도 해주고 분위기가 좋았습니다.책도 좀 팔려서 한 시름 놓을 수 있었습니다.이제 이것을 정식 모임처럼 하면 어떻겠냐는 의견을 오간 걸로 알고 있습니다. 매월 두째 주 월요일 저녁 6시 헌책방 나들이 라는 이름으로 짜장면도 먹고 책도 보고, 사고 차 한잔 마시고 뭐 이런 모임으로 진행 될 것 같습니다. 끝으로 바람 같은 게 있다면 저는 저희 서점이 단순하게 헌책을 사고 파는 곳이 아니라 지역의 문화 공간으로 여기고 있습니다.여수의 문화오 책의 변천사를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그리고 저가 소장한 책들을 포함해서 민속자료까지 보태서 문화공간을 만들고 싶어 합니다. 변두리 폐교와 공공시설을 지자체가 공간으로 제공해 주면 관광 여수의 새로운 문화 콘텐츠로 자리 잡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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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협동 조합 국민 TV 전남 동부 여수 지회 최정숙 위원장흔히 협동조합의 정의를 내릴 때 경제적으로 어렵고 사회적으로 소외되어 있는 사람들이 뜻을 같이하고 힘을 한데 모아 스스로 자신들의 처지를 개선하고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만든 경제조직을 일컫는다. 따라서 그만큼 조직이 자발적이고, 운영이 민주적이며, 사업 활동이 자조적이고, 경영이 자율적이라는 점에서 정부기업과 구별되며, 또 경제활동의 목적이 조합의 이윤 추구에 있지 않고 조합원에게 봉사하는 데 있다는 점에서 주식회사와도 구별된다. 바로 이 특징을 살려서 미디어에 적용 해 참 언론의 길을 열고자 미디어 협동조합을 결성해 탄생한 것이 국민 TV다. 현재 전국에 약 3만 여명의 조합원이 있으며 우리 지역 여수에서도 120여명의 조합원들이 활동 하고 있다. 미디어 협동조합 국민 TV 전남 동부 여수지회 최정숙 위원장을 만났다. 국민TV는 좋은 미디어 컨텐츠로 역사와 사회에 기여하고자 합니다.진실을 담아내는 참 언론의 길을 가겠습니다.또한 조합원 간에 상생과 번영을 위한 장이 될 것입니다.좋은 뉴스가 필요하다는 공감대를 이룬 ‘동지’인 만큼 구성원 간의 사업과 기획을 부조하도록 가교 역할을 하게 될 것입니다. 생활 공동체를 형성하는 새로운 장을 만들어 가는 게 국민TV입니다.미디어협동조합 국민 TV 전남 동부 여수지회 최정숙 운영위원장의 말이다. 국민TV를 설명해 주신다면 미디어 협동조합입니다. 협동조합은 주인이 없잖아요 조합원 모두가 주인이죠. 깨끗한 언론을 만들어가자는 취지로 정치권력, 자본의 권력에 굴하지 않고 거짓과 불의에 눈 감지 않는 공정한 방송, 상업적 목적에 의해 인기에 영합하지 않는 양질의 콘텐츠, 약자와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지 않겠다는 뜻을 가진 사람들이 협동조합을 만든 게 바로 국민TV입니다. 일종의 공동체지요. 지금 우리 사회의 언론 특히 방송의 경우 정치와 권력의 시녀로 변질 돼 있잖아요. 이 모순을 극복해 언론의 본연의 역할을 다해 국민들에게 진실의 소리를 전하며 참 된 언론의 가치를 국민들과 함께 공유코자 설립된 게 바로 국민 TV죠우리 국민 TV 조합의 경우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이 한 구좌 당 5만원을 출자해서 운영 되고 있습니다.때문에 약간의 내부적인 갈등도 없지는 않으나 어느 조직이나 단체와 마찬가지로 커가는 데 있어서 발생 할 수밖에 없는 하나의 성장통 이라 볼 수 있습니다.여수의 조합원들은 지역사회의 유명인사나, 시민운동단체의 활동가나 회원들이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직장인, 주부 들이 국민TV가 지닌 순수성을 알게 되어 조합원에 가입 한 거죠또 하나 덧붙이자면 한 때 장안의 화제가 됐던 팟케스트 나는 꼼수다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한명, 한명이 모여 들어 언론의 기능을 첨가해 국민들에게 진실의 소리를 담아 보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거죠 이 조합원들이 국민TV가 지닌 순수성과 기능을 십분 발휘해 지역사회에 함께 녹아 들어가자는 의미를 가지고 지역사회에 우리의 모습을 알려 내고자 국민 TV지회가 시민단체들에게 다가 갈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언론협동조합이 가지고 있는 의미와 장점 있다면 어떤 것이 있는지앞서 말씀 드렸듯 협동조합은 그 특성이 조합원 모두가 주인이고 동등 합니다. 저희의 경우는 미디어 협동조합이잖아요. 회사 생존과 번영을 위해 정치권력과 결탁할 필요가 없고, 자본권력에 기대 언론사로서의 자존감과 양심을 포기하지 않아도 되고, 사주의 이익을 위해 언론의 힘을 그릇되게 사용하지 않아도 됩니다.게다가 조합원들이 여려 영역에서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는 만큼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구성된 공동체 성원들이 좀 더 생산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거죠. 서로 교류를 통해 얻어지는 수익사업을 통해 얻어진 이익금을 조합운영에 쓰여 지고 있습니다. 여수 지회가 결성된 계기와 어떻게 운영이 되고 있는지현재 저희가 창립 된지 2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현재는 운영위원장을 주축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여수 같은 경우는 조합원들이 대다수 직장인이고 따로 사무실이 두지 않아 지역 시민단체 사무실을 빌려서 모임을 갖고 있습니다. 조직은 총무팀, 대외협력팀, 수익사업팀, 조직활동팀으로 분업화 해 팀을 꾸려 여러 조합원들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대외협력팀 같은 경우 전남 동부권에서는 여수가 제일 먼저 만들어 졌기 때문에 순천, 광양, 고흥, 구례, 보성 지역 까지 같이 통합에서 운영하고 있습니다. 여수의 조합원들이 첫 정모를 하게 된 해가 2013년 11월 15일 이었습니다. 온라인에서만 접했던 사람들을 처음 대면하게 된 거죠.그 만남의 계기가 2년째를 맞게 됐고 지금의 조직 체계를 만들어 졌습니다.저희의 존재를 알려지게 된 것이 세월호 참사를 알려내는 과정에서 저희가 지역 시민사회 단체에 다이빙벨 상영을 제안 한 게 최초였고 상영 당일 객석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찾게 됐던 게 가장 결정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말 선택을 잘 한 것이죠. 조합원이 되는 방법과 역할 그리고 조합원이 누릴 수 있는 혜택이 있다면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다 조합원이 될 수 있습니다. 앞으로 태어날 뱃속 아이도 조합원이 될 수 있습니다.(웃음) 조합원으로서 자격이라는 것도 없습니다. 조합원이 곧 주인인데 어떤 자격을 부여 받을 수 있으며, 강요도 받지 않습니다. 혜택 같은 것 또한 우리가 같은 동등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거죠.5만원의 구좌를 만들고 이후 조합비로 월 11,000원을 납부 하면 조합원이 될 수 있습니다.그리고 조합원들이 한 데 모일 수 있다는 거죠. 한 예로 멀리 월호도에 사는 조합원이 한 번 모일 때 마다 배타고 와서 하루 묵고 돌아가는데도 늘 즐거워합니다. 조합원들이 서로 모이는 자리가 그렇게 편하다고 합니다. 조합원들이 서로 어울릴 수 있다는 거 그게 혜택이라고 할까요. 지역사회에서 언론으로서의 어떤 역할들을 하고 있는지요세월호 참사 진상을 알리는데 있어서 다이빙벨 상영과 세월호 참사 1주기 추모행사 참여와 더불어 김광수 경제연구소장의 연구 파일을 저자의 허락 하에 받아서 이를 놓고 분기별로 공부하는 인문학릴레이를 하고 있습니다. 또 일부 조합원들은 개별적으로 환경운동연합이나, 시민협 회원으로 활동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여수시민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다가 갈 것인지 계획이 있다면우리와 같이 언론을 개혁해야 한다는 것에 공감하고 있는 분들을 꾸준히 찾고자 합니다.특히 나는 꼼수다와 같은 팟케스트 같은 게 워낙 활성화 됐고 국민TV의 경우 이 팟케스트의 특성을 살려 인터넷 방송으로 볼 수 있게끔 만들어 졌습니다. 지금의 여러 가지 한계로 인해 힘든 처지에 있지만 많은 시민들이 참 언론이 매체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기 위해 조끼를 맞춰 입고 거리 캠페인을 하고 그리고 등산이나, 자전거 트레킹을 할 때 조끼를 입고 국민 TV를 알려 내는데 주력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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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악사 작곡가 김한주 씨사람들의 사이에 잠들어 있는 무관심을 깨워지는 날 까지 저의 노래는 그치지 않을 것 입니다.거리의 악사 작곡가 김한주(47)씨의 말이다. 낮에는 택배기사, 밤에는 대리운전 그리고 길거리 음악회 가수 겸 작곡가.. 조금은 독특한 이력을 지닌 이가 여수에 있다.그 주인공은 작곡가 김한주씨다. 그가 최근까지 작곡한 노래만 어느덧 21곡 협회에 정식으로 등록이 되지는 않았지만 지역의 시민사회,노동, 문학 단체에서는 그를 작곡가라 부르거나 거리의 악사, 여수의 민중가수로 부르고 있을 정도로 유명세? 를 안고 있다.김 씨를 지난 15일 만났다. 처음 악기와 노래를 접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고1때로 기억합니다. 한영고를 다녔지요. 그 시절 여수 영락교회 학생회에서 성가대를 했지요. 그때 처음 기타를 배웠고 교회학생회장을 하기도 했습니다.한참 공부해야 할 고3시절 다소 엉뚱하다고 할 수 있겠는데 교회 내에 남학생들로만 이뤄지는 중창단을 만들면서 노래와 좀 더 가까워졌습니다. 졸업한지 30여년이 되고 있지만 아직 이 중창단이 계속 이어져 오고 있다는 소릴 들으니 감회가 새롭더군요(웃음)그리고 대학시절 기독교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거기에서도 음악을 했지요. 그 시절 대학가는 시대의 아픔을 함께 하기 위해 늘 거리에서 독재정권에 저항 하는 크고 작은 집회가 연일 있었습니다. 그 현장에서 통기타 하나 들고 노래로 그들과 함께 했지요. 그 과정에서 대학 내에서 열린 민중가요제에 나가 금상을 받았습니다.그리고 군입대를 위해 휴학을 하고 여수로 내려 왔을 때 당시 여수 민주화청년연합 (민청련 )시절 에서도 활동을 했습니다.그리고 대학을 졸업하고 여수 민예총 산하에 있던 노래패‘ 일하는 사람들’에서 1995년부터 1997년까지 활동을 했습니다.그리고 30대에는 YMCA에서 만든 노래패 ‘민들레’에서 활동도 했습니다. 그 이후에는 특별히 활동한 공간은 없었습니까.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다 보니 활동할 시간이 없었습니다.먹고살기에 치중하다 보니 악기도, 노래도 어떻게 보면 사치로 느껴졌습니다.게다가 조그만 사업을 하나 하려고 했는데 뜻대로 되질 않았습니다. 사업을 실패 한거죠그 시절이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때 날린 돈을 다시 벌기위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었습니다. 그렇게 보낸 시절이 10년이 넘었습니다. 다시 음악을 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신다면 역시나 교회 였지요. 아까 말 했듯 사업 실패 후 정신없이 바쁘게 살다가 손해 본 돈이 어느 정도 다시 모아지면서 성공회 여수교회를 나가게 됐습니다. 그 때 막 서품을 받고 여수교회로 주명철 어거스틴 신부님이 기타를 들고 왔습니다. 정말 반갑더군요. 그 기타를 보니 아 ! 다시 노래를 하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습니다.그래서 노래를 부르게 됐지요 거리로 나가서 노래 공연을 갖게 된 계기가 있다면 국정원대선 개입이 온 사회를 들끓게 했잖아요. 그 때 여수서도 매일 촛불집회를 가져왔습니다. 촛불문화제가 열리는 날이면 기타를 들고 나와 시민들과 함께 했습니다.그리고 요일은 자주 바뀌기는 했지만 성공회 여수 교회에서 지금까지 진행하고 있는 거리 음악회를 둘 수 있겠습니다. 매주 마다 진행 했는데요. 처음에는 이순신광장, 교동5거리, 시청 앞, 여수 부영아파트 3차 앞 거리, 여서동 수협광장을 돌며 국정원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국정원 해체를 주장하는 거리 시국기도회에서 노래로 시민들을 만났습니다.그리고 지금은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온전한 인양을 촉구하는 길거리 음악회를 갖고 있습니다. 그때부터 기존에 여려 집회에서 불리고 있는 민중가요가 시민들에게는 약간의 괴리감을 주고 있는 곡들이 많아 사람들에게 다가 가기가 너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기왕이면 시민들이 공감 할 수 있는 노래, 시민들이 함께 할 수 있는 노래, 시민들이 생각하고 고민하고 성찰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는 노래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한번 곡을 써보자는 의욕이 생겼습니다.그 의욕이 생기니 밤에 자다가도 곡이 생각나거나 꿈 쏙에서도 오선지가 보이는 거예요(웃음) 그리고 기왕에 시작한 것 제대로 해보자고 마음먹고 음악학원을 다니며 피아노도 배우고 있습니다. 작곡한 노래가 어느덧 20곡이 훌쩍 넘어 섰습니다. 특히 이 곡들을 작사 하신 분들이 여수지역에서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로 이뤄져 있는 걸로 아는데 소개를 좀 해 준다면 곡을 쓰다 보니 저만의 글로는 한계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보다 많은 이들의 삶을 다룰 수 있고 그리고 우리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으면서 공감 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연들을담을 수 있는 것들은 무엇일까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을 만나게 됐고 그분들이 흔쾌히 글을 주셨죠 그 글로 곡을 만들었습니다.대표적인 곡을 본다면 현재 여수시민협 이사장으로 계시는 부영여고 이현종 선생님이 세월호 참사를 잊지 말자는 의미에서 쓴 ‘너는 가고 나는 남아’입시 경쟁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한 ‘ 줄 세우기 그만해’동시작가로 잘 알려진 여수 여고에서 국어교사로 있는 이옥근 선생님의 동시 중‘별나라’, ‘이름 하나’‘몸 벌레’,‘그래야 할 것 같아서’김양일 시인의 ‘어머니 밥상’, ‘질경이’, ‘멍’등 이 있습니다. 앞으로 만들고자 하는 곡들을 소개해 준 다면 매월 마지막주 토요일 여서동 수협광장에서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온전한 인양을 촉구하는 길거리 작은 음악회를 열고 있습니다. 저는 이 공간이 시민들과 함께 공감 할 수 있는 자리로 만들어져 가는 것이 바램입니다.그래서 앞으로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원전에 대해 결코 자유로울 수 없고 안전 할 수 없음을 알리는 노래, 각종 공해와 오염으로 일어나는 우리나라의 현실을 담은 환경노래, 입시 경쟁으로 상처 받고 우리시대의 청소년들 의 이야기, 반값 등록금이 현실화 돼야 됨을 주장 하는 노래, 그리고 우리사회에서 늘 쟁점화 되고 있는 비정규직 철폐 를 담은 곡들을 쓰고자 합니다.그래서 비록 졸작이지만 이 곡들로 날로 무관심과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는 우리사회에 소통이 뭔지, 이해가 뭔지를 알려내 그들 사이에 깊이 잠들어 있는 진실과 진정성을 깨워내 함께 하는 사회를 만드는데 보탬이 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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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중심 진료 추구로 환자들이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최선 다 할 터“당신의(환자) 행복이 곧 우리의 행복(예 치과) 이고 우리의 행복이 지역 사회로, 지역사회의 행복이 곧 나라의 행복으로 이어지는 나비효과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여수 봉산동에 소재한 예 치과 신정일 원장의 말이다. 기자가 그를 만나러 병원에 들었을 때 청결한 분위기와 밝고 맑은 웃음을 보여 주고 있는 직원들의 모습과 더불어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가스펠송이 환자들에게 불안감을 덜어 줌과 동시에 안정성과 평온함을 유지 하게끔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다음은 신정일 원장과의 일문일답이다. 타 병원에 비해 독특한 병원 운영과 진료 이념으로 환자들은 물론 직원들 다가가고 있다고 들었는데 소개를 해주신다면 = 먼저 저희 병원은 “당신 즉 환자분들의 행복이 곧 우리들의 기쁨이다 는 마음을 가지고 인간 중심의 진료를 근본으로 한다.” “전문화 및 종합화에 의한 합리적인 진료 추구, 임상 연구와 교육을 통한 치 의학 진료 추구, 미래 지향적 관리 및 운영 추구, 국민의 건강 의식도 향상을 위한 노력과 사회봉사를 실현 한다.”는 미션을 가지고 병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또 개인적으로 저는 책 읽는 것을 너무 좋아 합니다. 좋은 책을 서로 나눠 보고 내용을 같이 공유 할 수 있을 때 서로가 느껴지는 행복감과 즐거움은 배가 되는 것이죠. 또 더불어 사는 삶 을 늘 지향 하며 살아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타인으로 이것이 점점 늘게 되면 지역사회로, 지역사회에서 한국 사회전체가, 한국 사회전체에서 세계가 행복 해지는 삶을 살아가는 나비효과를 얻는 것이죠. 또 치과라는 병원이 진료비를 걱정하는 환자들이 가장 많은 곳 이어서 DC 를 부탁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렇게 말 합니다. 진료 기간 동안 DC를 해 줄 터이니 그 기간 동안 착한 일을 하나 씩 할 수 있겠느냐 라는 약속을 받는 겁니다. 물론 그 환자 분들이 어떤 착한 일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하나씩 실현 한 착한 일들이 점차 퍼져 나가 누군가로 이어지는 일테면 착한 일 바이러스로 확산 되면 우리사회가 얼마나 밝겠습니까. 낙도 지역 주민들을 위한 의료 봉사를 펴고 있다고 들었는데 특별히 섬 지역 주민들을 위해 무료 의료 봉사 활동을 펴게 된 계기가 있다면 우리 병원 환자 대부분이 어부 입니다. 게다가 병원도 항구 쪽과 가깝다 보니 바닷가 주민들이 저희 병원을 찾게 됐습니다. 그런데 도시권에서 거주 하는 분들과는 달리 섬 주민들은 기상악화나 농번기 등 이 다가오게 되면 빨리 진료를 받아야 될 시기를 놓치기가 일수입니다. 그리고 먼 길을 나오게 되는 노인들은 더 말 할 것 없이 힘듭니다. 그래서 이들에게 보다 더 쉽게 다가가고자 직접 배를 구입했고 섬 주민들을 찾아 의료 봉사 활동을 펼치게 됐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주민들은 내 집 같은 분위기에서 한결 가볍고 안정된 마음으로 진료를 받을 수 있어 완치도 빨리 이뤄집니다. 게다가 섬으로 찾아가다보니 주민들과의 만남이 의료진과 환자라는 관계의 벽을 넘게 됐지요 섬에 들어가는 날이 되면 마치 어린 시절 외갓집을 가는 듯 들뜬 모습이라 할 까요? 그런 교감까지 느낄 수 있어 좋습니다. 뭐라 할까 나눔과 비움, 낮춤에서 얻을 수 있는 보람까지 얻을 수 있어 좋습니다. 장학회 사업도 열성적으로 펼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장학 재단을 꾸리게 된 계기가 있는지요 = 한 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되는 데요 당시에 여수에서 수능을 갓 치른 학생 한명이 서울대에 합격을 했지만 비싼 등록금 때문에 하고 싶은 공부를 할 수 없고 대학 입학마저 힘들 수 있다는 소릴 접하고부터 그 학생을 돕게 된 것이 계기가 됐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렇게 많은 수입을 올리지는 못 하고 있기에 병원 수익금 1%를 매달 적립해 나가며 동시에 주변 지인들과 함께 뜻을 모아 매년 5-6명의 학생들에게 용기를 잃지 말자며 격려 해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가 기독교인이어서 해외에 파송 된 국내 선교사 분들에게도 조금씩 지원을 해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것은 저 스스로 가 갖고 있는 신앙관이기도 합니다. 바로 주위의 이웃들이 함께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게 바로 예수님을 기쁘게 하는 것 이다 는 거죠. 끝으로 앞으로 진행하고자 하거나 계획이 있다면 저에게는 꿈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여수 지역에 고등학교를 설립 하는 것입니다. 지역에 고교를 설립해 우리 지역의 훌륭한 인재들이 외지로 나가지 않고 지역에서 열심히 공부하고 자신의 꿈을 키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리고 저 혼자만의 힘으로 어렵다면 저와 생각이 같은 여러 사람들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지혜를 모아 갈 수 있는 동반자가 있다면 더 할 나위 없겠지요. 그래서 우리 여수 지역에서 훌륭한 인재들을 배출하게 되면 그들의 고향인 여수는 물론 이고 우리나라들을 빛내는 그 인재들이 바로 여수지역에서 청소년시기를 보냈다면 지역민으로서 느껴지는 그 자부심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런 학생들이 여수에서 많이 나올 수 있게 하는 게 저의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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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하는 마음으로 걸으며 아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했습니다.아직도 사랑하는 아들의 유골함을 안아 보지 못했습니다.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아서.... 하늘을 쳐다보지 못했습니다. 하염없이 눈물만 나서.... 아들의 이름을 불러 보지 못했습니다. 목이 메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 기도하는 마음으로 걸으며 떠난 아들의 고통을 덜어 주려고 했습니다. 십자가 순례 하면서 많은 것 느껴 지난 4.16 세월호 참사로 희생당한 안산 단원고 2학년 4반 김웅기 군의 아버지 김학일 씨의 말이다. 김 씨는 지난 16일 여수시 학동 소재 여수 여성 인력 개발센터에서 여수 시민사회단체 연대회의를 비롯한 대한 성공회 여수교회, 통합진보당, 노동당, 민주노총 등 지역의 시민, 종교, 정당, 노동단체가 공동으로 주최한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하는 국민 간담회 자리에 유가족 대표로 여수를 찾았다. 이 자리에서 김 씨는 7월 8일부터 8월 14일까지 안산 단원고에서 진도 팽목항을 거쳐서 대전 월드컵 경기장까지 십자가를 지고 도보 순례를 한 경험을 나눴다 가슴에는 영광이, 배낭에는 사랑이 김 씨는 “39일 간 900킬로미터를 걸으면서 정말 힘들었지만, 그때마다 신부님과 수녀님이 힘과 용기를 줬으며, 함께 걸어 준 사람들 덕분에 304명 영혼의 고통을 함께 나눴기에 걸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대전에 도착했을 때 가슴에는 영광이, 배낭에는 사랑이 가득 차 있었다”고 말했다. “사랑합니다. 모든 분들을” 지난 4월 16일 오전 9시 22분에 그의 아들 김웅기 군의 핸드폰에 남겨진 마지막 말이었다. 김 씨는 “자신이었다면 살려 달라고 발버둥만 쳤을 텐데....”라며 “아들이 지금도 늦지 않다고 말해 주는 것 같다. 앞으로 사랑을 나누겠다”고 말했다. 이어 “아이를 잃기 전에 10년 정도 냉담을 했지만 지금은 아이가 준 선물로 하느님께 한발 한발 다가가고 있다”고 고백했다. 참사 이후 많은 변화 일어나 저는 식당을 운영 하는 평범한 소시민 이었습니다. 그저 남들처럼 물가가 올라도 걱정, 내려도 걱정, 아들에게도 술 마시지 마라, 담배 피우지 마라, 그런 거 대학 가서 해라. 넌 법관이 되거라, 그렇지 않으면 신학을 공부해 종교인의 길을 걸어라. 이런 잔소리를 했던 그런 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웅기가 그렇게 떠나갔을 때 아니 대한민국 정부가 단 한명도 구조 하지 못했을 때 그리고 오늘로 해서 245일을 맞고 있는 지금 이 순간까지도 대한민국은 민주 공화국이며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조항이 얼마나 모순이고 얼마나 허구였으며 국민들을 조롱 해 왔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이 죽으면 별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주가가 떨어지면 비극이 일어난 것처럼 온통 난리 법석을 떠는 세상이 된다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이 어쩌면 우리나라를 두고 말 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계속되는 트라우마로 고통 지금 저도 그렇지만 저희 유가족들은 그날의 충격으로 인해 순간, 순간 무언가를 잃어버리기도 하고, 초등학교 수준의 단어조차도 간혹 헷갈려 말문을 열지 못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가족들은 일체의 모든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꺼려해 아예 집 안에서 나오질 않고 있기도 합니다. 웅기는 그 날 이후 199번째로 발견됐습니다. 뉘여져 있는 웅기의 모습을 보고 마치 저의 옆에서 자고 있는 듯 한 모습 이었습니다. 아이들의 시신에 번호가 붙여지면서 1번, 10번,100번 하나, 하나 번호가 붙여지고 있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게 분노로 일어났습니다. 총을 구할 수 없다면 석궁이라도 구해서 우리 아이들을 보낸 이들에게 응징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웅기의 그 모습을 보고 석궁이 아닌 6kg 짜리 십자가를 지고 900km를 걷게 됐습니다. 많은 국민들이 관심 가져 주시길 저는 오늘 같이 간담회가 잡히지 않으면 늘 광화문으로 향합니다. 그 곳에서 시민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잃은 부모에게 종북 몰이를 일삼는 수구보수 세력 그리고 그들을 부추기는 정치권력을 보면서 그들에게는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영혼이 없는 사랑은 거짓입니다. 진상규명이 이뤄지고 진실이 밝혀 지는 날까지 국민 여러분이 함께 해 주십시오 끝으로 김학일 씨는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관심을 가져 주기를 당부했다.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고 진상규명을 요구 하는 활동은 여수에서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다. 매주 목요일 여서동 수협 광장에서는 저녁 7시께부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과 결코 잊지 않겠다는 여수 촛불 모임이 진행되고 있다. 또 오는 20일 세월호 참사 광주시민 3년 상 상주모임의 주간으로 안산 단원고 학부모 들을 만나러 안산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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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시 여성가족과 최윤영 주무관-인터뷰--까치가 만난 사람- 여수시 여성가족과 최윤영 주무관 ‘모두가족품앗이’를 소개합니다.‘이웃 가족간 연계로 다양한 활동 펼 수 있어요 이웃에 사는 가족들과 그룹을 이뤄 서로의 끈을 만들어서 젊은 엄마들이 다양한 활동을 넓혀 갈 수 있는 ‘모두가족품앗이’가 해를 거듭 할 수 록 호응을 얻고 있다.여수시 여성지원과 건강가정 지원센터에서는 올해로 5년째를 맞고 있는 모두가족품앗이’가 지난 21일 오리엔테이션을 갖고 활동에 들어갔다.이에 본지는 21일 20여 가정이 모인 오리엔테이션 현장을 찾아 여수시 여성가족과 최윤영 주무관을 만나 봤다. 가족 품앗이 사업을 설명하자면 어떤것인가요?=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일반화 된 것은 사실입니다. 특히 가부장적인 틀이 남아 있는 우리나라에서 워킹맘으로 살아가기란 현실적으로 힘든 부분이 많죠.또 어린아이를 둔 엄마들의 경우 아이 때문에 외출 하는데도 많은 신경을 써야 됩니다.그래서 우리시에서는 같은 지역 또는 이웃에 사는 가족들을 그룹으로 나눠 서로의 자녀들을 돌봐주고 자신이 가진 시간과 노동력, 물품등을 나누는 다양한 활동 형태를 만들 수 있게 각 가족의 끈을 만들어 주고 있는데 이 제도가 바로 ‘모두가족품앗이’입니다.옛날에는 엄마들이 밭일 가거나, 장보러 가거나 하면 거리낌 없이 옆집에다 맡기고 가잖아요. (웃음) 거기서 착안 했다고 보면 됩니다. 가족 그룹은 어떻게 구성 되는가요?=일단 참여 대상 가족을 2개~3개의 그룹으로 나눠져 3개의 가정이 한 모둠이 됩니다.덧붙인다면 가까운 거리에 거주 하는 가족과 비슷한 또래 아이들을 둔 가정이 모일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그럼 구체적인 프로그램은 어떻게 이뤄지는지요?=아이들의 성향과 연령 그리고 엄마들의 역량에 따라 다릅니다.하지만 요즘 엄마들의 교육수준이 과거에 비한다면 상당한 수준에 있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으로 아이들에게 접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 자면요 ?비록 적은 지원비이지만 지원비를 토대로 해 유아들은 종이접기, 블록 쌓기 등 창작놀이교육, 그림그리기를 하고 취학 아동인 경우 영어를 비롯한 기타 학습 봐주기도 있죠.지난해는 오카리나를 가르쳐준 엄마가 있어서 아이들이 연말 행사장에서 공연을 열어 인기를 끈 적도 있었습니다. 또 어떤 엄마는 아침 장보기를 통해 장터의 이모조모를 보게 해 다양한 삶을 살아가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인성교육을 하는 사례도 있었죠.프로그램으로 보면 시민들의 관심이 높을 것 같은데 어떤 방식으로 모집을 하나요? 주로 시 홈페이지 공지 사항을 비롯해 언론보도자료가 주를 이루고 있고 현수막을 비롯한 신문광고는 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른 시, 도에서도 이 프로그램이 있는지요 ?물론입니다. 각 지자체별로 다 갖추고 있고 활동범위나 내용은 조금씩 다를 수 있지만 이 프로그램은 똑 같은 이름으로 매년 진행되고 있습니다. 여수에서는 올해로 5년째를 맞고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진행하는데 어려운 점은 없나요? 각 가족들 특히 아이들에게 좀더 다양하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을 구성 하고 싶은데 국비 지원금이나. 시지원비가 턱 없이 부족합니다.그렇다 보니 아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앞서 말했듯 종이접기, 블록쌓기 그리고 학습에 필요한 기타 문구류 정도 밖에 지원 하지 못하죠. 아이들이 즐길 수 있는 요리체험이나 나들이 같은 체험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프로그램을 놓고 보면 모여진 가족들 간의 신뢰도에 따라 다른 형태로 나타날 수 있을 것 같은데요?그 점이 제일 큰 핵심입니다. 모두가족 품앗이 사업은 시에서 강제성을 두지 않고 가족끼리 우대 관계 형성에 주력을 하고 있는 만큼 각 가족들이 서로가 정해진 약속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에 따라 성패가 달려있습니다. 그 점을 강조하기 위해 오늘 오리엔테이션을 가진 것입니다.끝으로 한 말씀 더 해 주시면요?이번 모두가족 품앗이가 어렵게 꾸려진 자리인 만큼 아이들 한명, 한명을 자기 아이들 돌보듯 해서 밝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올해를 보냈으면 합니다.또 이 프로그램을 시민들이 더 찾을 수 있도록 정부는 물론 시도 관심을 더 가져서 지원마련에 관심도 써 줬으면 하는 소망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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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도외시 되면 곧 자아 상실로 이어져”이 민 숙 (샘뿔 인문학 연구소장) 인간에 대한 평가가 생존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실용적 능력과 수단을 얼마나 가졌느냐를 놓고 보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이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여수에 인문학 연구소를 만들어 시민들을 대상으로 인문학연구소를 만들어 시민들에게 다가가고 있는 이민숙 소장을 만났다. 안산동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논술학원을 운영 하면서 인문학연구소와 이끄는 그를 만나기란 좀처럼 쉽지 않았다. “물과 나무와 인간 바람과 불, 그런 원시의 세계가 지금도 변함없이 우리에게 생명으로 살게 하는 이 땅 최고의 조건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나 그런 외형들이 지금 크게 위협받고 있습니다. 생명을 거세해 버린 물질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생겨나는 억지를 그냥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찾아온 불의, 불화, 전쟁의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여수 샘뿔 인문학 연구소 이민숙 소장(47)이 갖고 있는 이 시대의 화두를 이렇게 던졌다. 인문학 연구소를 만들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신다면 = 저가 책 읽는 것을 좋아 했습니다. 그래서 같은 책이라도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함께 읽고 대화를 나누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이 있었죠.저가 학생들을 대상으로 논술학원을 운영을 하면서 한 두 시간의 수업으로 학생들과 학부모를 만족 시켜주는데 어려움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학부모들부터 책을 읽게 하기 위해 그분들을 만나고. 다른 사람들도 함께 어울려 책 읽는 모임을 97년에 결성 했습니다. 그때 모임 이름이 책으로 탑을 쌓자 라고 해서 (서탑회)를 만든 게 시초였습니다. 요즘 사회에서는 인문학이 등한시 되면서 자기철학의 부재가 된 시대라고 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를 어떻게 생각 하십니까? = 저는 그 문제는 바로 갈수록 점철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봅니다.물질 자본의 압박으로 인해 사유하고,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이 위축 된 거죠. 이는 우리사회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세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끊임없는 경쟁구도 속에서 살아남기도 힘든 시기다 보니 그런 것들은 사치라고 보는 거죠.우리나라의 교육은 인문학이 도외시 되고 있습니다.문학책 한권 읽기 어려운 시대가 되버린 겁니다. 인문학을 천시한 댓가는 기술력은 있지만 창의력의 부재로 흘러가게 되었고 결국에는 모방으로 점철된 교육으로 빈껍데기 같은 교육이 바로 그 현실일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 라는 존재 즉 자아에 대한 존재를 찾지 못하고 자기 자신에 스스로 던져 보는 질문이 부재인 셈이죠. 연구소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회원들과 시민들에게 인문학적의 중요성을 알리는 가요? = 주로 문학인들을 자주 찾아뵙죠. 소설가 한승원 선생님을 만나서 강의도 듣고 또 그분의 삶도 듣게합니다.섬진강을 걸으면서 섬진강 주변에 살고 있는 시인 박두규 선생님을 만나 하룻밤 머물며 그분이 늘 화두로 가지고 있는 생명평화의 삶도 듣고 그분의 시속에 담겨 있는 이야기도 나눴습니다.또 매년 문학지 발간을 통해 다양한 문학을 접하고, 서로의 시를 평가 하는가 하면 시낭송회도 갖으면서 늘 사색하고, 사유 하는 자리를 만들고 있습니다. 연구소를 어떤 방법으로 운영을 하고 있습니까 ? = 먼저 연구소를 만든 시기는 2012년도에 학원교실 한 칸을 전면개방 시켜 놓고 샘이 깊은 물, 뿌리 깊은 나무라는 의미를 지닌 샘뿔 인문학 연구소를 만들었습니다.연구소는 현재 성숙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인문학적 역량의 극대화와 실험정신에 의거한 사회적 역량을 키우는 창조적 책읽기를 시행 하고 있습니다.또 혼자서는 읽기 힘든 고전을 좀 더 깊이 있게 읽고 토론하는 시간을 통해서 성현들의 정신세계에 쌓인 지혜의 층을 맛보는 시간을 갖습니다.그리고 가정과 사회, 세계의 리더로서 멋진 삶을 설계, 실천할 수 있는 인간형 도모하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요즘은 논어를 읽고 있습니다.이와 함께 문학창작아카데미도 운영합니다. 여기에서는 문학잡지 발행과 시화전, 시낭송회를 갖기도 하고 인근 지역의 문학회 사람들과 연계해 문단 작가들의 초청강연도 갖고 있습니다. 샘뿔연구소 외에도 다른 활동을 하고 있으신지요? = 빗살문학회라는 문학회를 이끌고 있습니다. 빗살 문학회는 지난 2008년에 전남학생문화교육회관이 여수에 만들어 졌습니다. 그 때 첫 오픈 프로그램으로 학부모와 함께 하는 문예창작교실이 있었습니다. 그 강의를 저가 담당했습니다.그때 인연을 맺은 분들과 좀 더 폭넓게 문학공부를 하고자 빗살문학회를 만들었는데 마침 학생문화회관이 있는 곳이 선사공원이어서 빗살무늬 토기를 착안해 이름 붙인 게 빗살문학회가 된겁니다.샘뿔 연구소회원들이 또 대부분 빗살문학회 회원이다 보니 결국은 같은 모임이라고 보면 될 것 같습니다.또 시 보조금을 통해 샘뿔 ‘작은도서관’을 운영하는데요. 인근 거리에 살고 있는 시민들이 쉽게 책을 접할 수 있게끔 도와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비치된 책들도 시 보조금과 함께 문예진흥재단 등을 통해서 무료로 기증받은 것 들입니다. 물론 저를 비롯한 회원들이 기증한 책들도 있지요. 며칠 전에는 문학나눔 기관으로부터 2011 우수문학도서를 받았습니다.애시당초 다른 기관에 배정되었다가 활용저조 판정을 받은 책들입니다.총 82권이나.....저간의 사정을 불문코 우리 샘뿔에 불어오는 행운이 분명하겠죠? ‘나비 그리는 여자’라는 시집을 내고 문단에 데뷔 하셨는데 이끌고 계시는 연구소 회원들이나, 문학회 회원들 중 등단 작가들이 있는지요. = 지금까지는 신춘문예나 문학잡지등을 통해 등단한 회원들은 없습니다. 하지만 올해부터는 많은 회원들이 그동안의 습작 활동을 통해 쌓은 기량을 펼쳐보고자 합니다. 그래서 1월부터 지금까지 2014년도 신춘문예 당선작을 분석하면서 최근 문단에서는 어떤 성격의 작품을 요구 하는지를 공부하고 있습니다.한편으로 생각 해 보면 과거에는 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나. 그렇지 않는 사람들이나 한권의 시집이나, 소설을 읽으면서 작가의 꿈을 꾸고 거기에 매달리던 사람들이 많지만 들어가는 문이 너무 좁은지라 애를 먹었죠.하지만 지금은 문학이 하나의 도구로 치부되기도 하고, 돈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게 된 현실로 인해 문단에 등단 한다는 것에 큰 꿈이 오늘날 사람들에게는 많이 사라졌죠.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앞으로 샘뿔 연구소가 여수에서 지향하고자 하는 방향을 말씀해 주신다면? =사람은 누구나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유토피아를 꿈꾸기도 하고 영혼의 안정의 꿈을 꾸기도 하죠 꿈꾸니까 행복 한 거죠 그래서 저희는 후배세대들도 꿈을 현실화 시킬 수 있는 그리고 그런 것을 견인 할 수 있는 징검다리가 되도록 노력 할 것입니다.<곽준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