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9 (월)
어릴 적,함께 살았던 외할머니는 무뚝뚝하고,화를 잘 내시고,다정한 말씀 한마디 없으셨던 엄한 분이었다. 동네 사람들 누군가가 세 손녀들 칭찬을 할라치면 오히려 깎아내리기 바쁘셨다.그리고,종종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누워 계시길 잘했다.당시엔“할머니,또 머리 아파?왜 머리가 아파?”하고 묻지를 못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인식도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할머니의 익숙한 모습이 궁금증을 유발하지 않았거나 할머니와 나와의 어떤 정서적 연결감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앉혀놓고 도란도란 얘기를 하신다든지,따스하고 애정어...
작년 여름에 집터에 새로운 공간을 들이고 팬션으로 운영하면서 이런저런 손님들을 받게 되었다. 가볍게는 하루 이틀,많게는 한 달,두 달까지 지내다 가셨다.그리고,국내 손님들이 대부분이지만 종종 외국에 체류하고 계신 한국분들도 오셨다.또 친정,시댁 식구들 혹은 신랑이나 나의 친구나 지인들이 모임장소로 머물고 가셨다. 얼마전에는 캐나다에서 손님 두 분이 오셨는데,엄마는 한국인이고,아들은 캐나다인이었다.현재 아들이 제주도 국제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는데, 2년 계약으로 한국에 왔다가 몹시 실망하고1년만에 캐나다로 다시 돌아가려 ...
아침에 눈을 뜨면 창 밖으로 초록빛 신록과 유월의 상큼한 공기가 들어온다.새들은 먹이를 찾느라 부산하게 돌아다닌다. 바깥 화장실 앞,단감나무 한그루속이 아지트인 참새들은 떼지어‘포르르 포르르’날아다니며 먹이를 찾고,직박구리는 요즘 익어가고 있는 아로니아 열매를 입에 물고 빨래줄에 앉는다.그 중에 검은 머리에 잿빛과 보라,군청의 깃털을 가진 물까치의 나는 모습은 참으로 우아하다. 긴 꼬리를 이끌며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바람을 타고 나는 모습이 근사하다.나도 저렇게 날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들고양이들도 뭐 먹을게 없...
햇살은 뜨겁지만 산들바람은 너무도 싱그러운4월!강가에 평상 하나 내어놓고 하루종일이라도 흐르는 강물을 보고 싶은 날들이다. 신록은 우거지고,강의 물비늘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새 한 마리 유유히 강을 날고,선선한 봄바람 불어오는 오늘같은 날.강가 평상에 앉아서 바라보는 강의 풍경들이 너무도 곱고 아름다워서 눈물나는 날.나의 내면풍경도 저토록 조화롭고 고우면 참 좋겠다!싶은,강의 풍경이 미치도록 부럽고 서러운 날... 그리고,섬진강이 바라다 보이는 이런 곳에 작고 예쁜 집 한 채 짓고 매일같이 흐르는 강을 보면서 살고 싶은...
오늘은 화개로 서예 배우러 가는 날이다.학기 초라 큰 아이 학교 상담을 마치고, 3시 즈음 구례에서 출발했는데,피아골 입구 즈음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하더니 석주관 칠의사 사당 있는 곳부터는 거북이 걸음이다. 수업 시간에 너무 늦는 것 같아 좀 조바심이 났는데,마음 급하게 먹어봐야 소용없는 일.작년부터1년 이상 이어지는 코로나 시국에 너무도 답답한 사람들이 꽃구경하러 도로로 쏟아져 나온 걸 이해해야지.도로가 막히는 걸 체념하고 나도 차 안에서 꽃구경을 하며 차가 멈추면 이 기회에 사진도 몇 장 찍고...그러다가 차가 움직이면 뒤...
새들의 부산한 움직임으로 시작하는 아침.아침부터 신혼 까치 부부는 부지런하다. 우리 집 앞 전망 좋은 노랑 팽나무에 앳된 신혼 부부가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둘은 신혼의 단꿈에 부풀새도 없이 열심히 일을 한다. 한 마리는 물어 나르고,또 한 마리는 그것을 이리도 놓았다가 저리도 놓았다가 한다.물어오던 역할을 하던 까치도 간혹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옮기기도 한다. 한 번에 그냥 딱!놓는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최상의 설계와 완벽한 시공을 하는 것이다. 새들이 집을 짓는데 보통 내공이 있는...
1월 초,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한가득 쌓여있다.어릴적엔 밤새 눈내려 새하얗게 된 세상을 보노라면 가슴이 뛰고,그 은빛 세상에 매혹되어 너무도 황홀했는데... 눈이 내리던 새벽,간혹 잠자다 깨어나 마루에 있는 요강에서 볼일을 볼 때 그 차갑고도 맑고도 적막한 느낌 속에 펑펑 내리던 눈!달빛이라도 비치는 날엔 눈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나던 어둠속의 신비! 그리고 으스스 몸을 떨며 다시 따뜻한 이불속에서 곤히 단잠을 자다가 환한 눈빛이 초가집 창호지 문으로 비쳐들고 문풍지 사이로는 알싸하고 상큼한 눈 내린 아침의 공기가 스...
굽이굽이 감돌아드는 섬진강 어디메쯤 헌책방이 생겼다.그것도 작고 아담한 책방이 아니다. 부산에서40년 넘는 오랜 세월 동안 헌책방을 운영하셨던 부부가 구례구역 맞은편에3층짜리 책방을 내셨다.마치 대학 시절의 도서관에 다시 온 듯한 그런 향수마저 불러일으킨다. 게다가2층, 3층에 올라가면 섬진강과 건너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강 건넛마을도 볼 수 있다. 단아하게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다가 고개 들어 유유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온갖 시름 떨쳐내도 좋을 자리이다. 이 중년의 나이만큼 오래된,혹은 그보...
보름을 이틀 앞둔 밤하늘에는 아직 채워지지 아니한 동그란 달이 떠 있다. 그래도 달은 훤하게 밝아 하늘에는 검 푸르스름한 양떼구름이 층층이 노닐고 저녁별 몇 개가 반짝이는 모습은 현묘한 밤하늘을 충만하게 느끼게 해 준다. 밤9시 즈음,섬진강이 가까이 흐르는 유곡마을 지인 집에 갈 일이 있었다. 시간이 늦어 아이들은 놓고 가려고 했는데,주인 언니가 삼둥이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유곡마을 초입은 넓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산골 같은 느낌이 들고,또 산세가 둥그스름하면서도 웅장한 맛이 있...
입추와 말복이 지난 지 여러 날,구례에도 코로나 환자가 생기기 시작해서 지역민들이나 학교에서도 무척 긴장하는 상태였다. 당분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학습을 하기로 했다.집에만 있다 보면 삼둥이들이 심심하고 게임,스마트폰을 하겠다며 실랑이질만 할 것 같아서 매일 산책을 하기로 했다. 먼저 가까운 화엄사 숲길을 천천히 걸어보고,천은사 뒤안길과 새로 만들어진 푸르른 저수지 길도 걸었다. 아이들 아빠가 쉬는 날이면 함께 걷기도 했다.화엄사와 천은사 계곡 길을 걸을 땐 아이들이 계곡물에 뛰어들어 고삐 풀린 망아지처...
2020년 폭우 장 진희 하늘이 노했다 땅이 노했다 지구가 무섭다 바다도 강도 계곡도 산도 무섭다 하늘에서 천둥소리 요란하고 개울 속에서도 바윗돌 구르는 천둥소리 끊임없다 개울가 집 개울물 넘칠까봐 개 목줄부터 풀어준다 옷가지 가방에 싸고 노트북 챙겨 좀 높은 곳에 세워둔 차에 실어 놓는다 밤새 잠 못자고 들락날락 개울물 수위를 지켜본다 싸다 싸 목숨 하나 살자고 하늘 땅 못살게 군 댓가 집안을 살펴보니 밭에 내어 호박 참외 배추거름 되어야 할 똥오줌 수세식 변기로 흘려보내고 ...
올해는 계속 내리는 비로 여름 계곡의 싱그럽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네요. 아이 셋 낳고, 10여 년 동안 집안과 텃밭에서만 뱅뱅 맴돌다 보니 언젠가부터 여름이 되면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몸이 너무 지치고 숨쉬기도 힘들 정도여서 아이들 데리고 무작정 화엄사,피아골,쌍계사,참새미골 계곡에 가서 놀다가 해 질 녘 돌아왔지요. 아이들은 물개마냥 세상 행복하게 놀다가 해가 어둑어둑해져도 물에서 나올 줄을 몰라 저랑 매번 실랑이질했답니다.때론 버너,냄비 준비해서 계곡 옆 정자에서 아빠가 끓여주는 라면으로 저녁도 맛나게...
농 무 신 경림 징이 울린다 막이 내렸다 오동나무에 전등이 매어 달린 가설 무대 구경꾼이 돌아가고 난 텅 빈 운동장 우리는 분이 얼룩진 얼굴로 학교 앞 소줏집에 몰려 술을 마신다 답답하고 고달프게 사는 것이 원통하다 꽹과리를 앞장세워 장거리로 나서면 따라붙어 악을 쓰는 건 쪼무래기들뿐 처녀 애들은 기름집 담벽에 붙어 서서 철없이 킬킬대는구나 보름달은 밝아 어떤 녀석은 꺽정이처럼 울부짖고 또 어떤 녀석은 서림이처럼 해해대지만 이까짓 산 구석에 처박혀 발버둥친들 무엇하랴 비료 값도 안 나오는 농사 따위야...
붉은 기운을 이끌고 장엄하게 서산으로 넘어가는 해. 작약,데이지,노란 코스모스,낮달맞이,매발톱,방울꽃으로 환한 화단과 황토 한옥을 은은히 비쳐주며 오늘 하루의 삶도 아름답고 감사했노라고 속삭이는 노을. 한 아빠는 집 아래 밀밭으로 익어가는 밀을 베러갑니다. 그리고 초록빛 기운이 감도는 몇 주먹의 밀대를 쓱쓱 베어옵니다. 또 한 아빠는 잔 나뭇가지들을 모아 불을 피웁니다. 나뭇가지에 불이 붙어 작게 타오를 즈음 아이들은 너도 나도 밀대를 손에 쥐고 밀이삭을 불에 태웁니다. 밀사리를 아시나요? 사리는‘불살라 먹는...
올해 들어 구례장터에서는 종종 신나는 일이 벌어졌다.설을 앞두고 지리산 엄마들이‘지리산 아이들 사진전’을 열었다. 장터에 나오신 할머니,할아버지,아저씨,아주머니,이모,삼촌,아이들,명절에 고향을 찾아 음식 장만하러 나오신 분들...많은 이들이 이쁜 아이들의 사진을 보고 꽃보다 예쁜 함박웃음을 지으셨다. 대보름날에는 엄마,아빠,아이들이 어울려 풍물을 치며 장터를 한 바퀴 돌았다.지신밟기도 하고 액맥이 타령도 부르면서 액은 저~~리 물러가고,좋은 일들 가득하시라고 복을 빌어드렸다. 아이들도 졸랑졸랑 따라다니며 상쇠의 넉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