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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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정암 조광조 선생김상훈 수필가 조선왕조 시대 벼슬아치들의 등장과 퇴장을 거두절미하고 딱 두 마디로 표현한다면 1.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2. 전하 억울하옵니다. 라는 2가지의 절대적인 긍정과 부정의 말로 대변할 수 있다고 한다면 무슨 대낮에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어이없어하는 이들이 더러 계실 거라고 사료 됩니다. 그러나 잠깐, 잘 알고 계시는 바와 같이 조선왕조 오백 년은 왕권(王權)과 신권(臣權)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 동반(東班)과 서반(西班) 대북(大北)과 소북(小北) 등의 끝없고 지루한 당파 싸움의 시대로서 그야말로 당쟁으로 시작하고 당쟁으로 끝나는 시종 상대 무너뜨리기의 시대였음을 우리 후손들은 역사를 통해 익히 알고 있습니다. 역사의 민낯이지요. 이렇게 굴곡진 역사의 흐름에 우울해진 후손의 한 사람인 저는 측은한 소회의 안타까움과 더불어 애잔함이 공존하는 아린 마음으로 글을 쓰게 되는 것에 대하여 매우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그 가슴 아픔의 강도가 아리다는 것은, 오늘 “소월정의주말엽서” 주인공은 중종 시대 개혁의 화신(化身)이었던 정암 조광조(1482~1519) 선생이기 때문이지요. 연산군의 이복동생 신분으로 태어나 꿈에도 왕위에 오를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불우한 왕자였던 이역(李懌)은 (중종, 조선의 11대 왕 1488~1544)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왕이 되어버린 바지 사장 격인 인물이었습니다. 이 격동의 혼란기에 조선왕조 최고 개혁의 화신인 조광조의 등장은 어찌 보면 하늘이 우리 조선과 조선 민중을 위하여 특별히 내리신 보물과도 같은 인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당시 이조판서였던 안당(安瑭)의 추천으로 관직에 오른 조선의 전 벼슬아치 중에서도 최고의 승진 속도의 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입지적인 인물이지요, 그가 벼슬길에서 얼마나 빨리 승진했냐 하면 다음 도표를 보시면 이해가 빠를 것 같습니다. 이는 조선 최고의 승진 속도를 공유하고 있는 이순신 장군과 견줄 수 있는데 참고로 1591년 당시 조정 최고의 실권자였던 서애 류성룡의 천거로 종6품 정읍 현감에서 정3품인 전라 좌수사로 파격적인 승진을 기록한 역사의 동질성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만, 하여튼 정암의 초고속 승진 이력을 보면 그가 임금뿐만 아니라 조정의 관료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능력의 소유자라 할 수 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그의 승진 이력서입니다. 1510년 (중종 5년) 진사시에 장원하여 성균관에 들어가 공부, 1515년 (중종 10년) 33세 때 9월 문과에 급제. 11월 종6품 사간원 정원 1516년 (중종 11년) 봄 호조좌랑, 예조좌랑, 공조좌랑, 3월 홍문관 부수찬 겸 경연 검토관 겸 춘추관기사관, 1517년 (중종 12년) 2월 홍문관 부교리 (종5품) 3월 홍문관 교리 (정5품) 7월 홍문관 응교 (정4품) 8월 홍문관 전한 (종3품) 1518년 (중종 13년) 1월 홍문관 부제학 겸 경연 참찬관 (정3품) 5월 승정원 동부승지 겸 경연 참찬관 (정3품) 1518년 (중종 13년) 7월 동지성균관사 겸 가선대부 (종2품) 1518년 (중종 13년) 11월 사헌부 대사헌 (정2품) 조선시대 사헌부의 대사헌은 판서와 같은 고위 관직이었지요, 오늘로 치면 검찰총장과 비슷해요, 이제 갓 공무원 생활을 시작한 관리가 3년 만에 검찰총장이 된 거지요, 어마어마한 초고속 승진인 겁니다. (위 도표는 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243~244쪽에서 따옴) 그러나 호사다마라, 그러한 그를 가만 둘리 없는 것이 당시, 조선의 당파 싸움이라는 무거운 현실이었습니다. 무능하고 의심 많은 임금은 훈구파(남곤, 심정, 홍경주 등)의 모함을 받아 즉, 주초위왕(走肖爲王, 조 씨가 왕이된다) 라는 어처구니없는 조작(造作)과 흉계(凶計)로 조광조 김식 등을 비롯한 사림파가 죽임을 당합니다. 과중한 경연(經筵, 왕의 공부)으로 인한 중종과의 갈등은, 위훈 삭제 문제, 소격서 철폐, 등의 개혁으로 한편으론 신료와 민중으로부터 박수를 받았지만, 개혁은 혁명보다도 어렵다는 역사의 속설을 증명이라도 하듯 종국에는 능력이 한창 떨어졌던 임금에게 신뢰를 잃고 전라도 화순 능주로 귀양을 간 후에 바로 사사(賜死) 됩니다. 역사에서는 이 사건을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선생이 활동했을 당시 임금과 사이가 좋아 신임을 받았을 때 눈만 뜨면 능력을 인정받아서 승진 또 승진이었으니 그 얼마나 많은 “전하!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라는 말을 읊조리면서 머리를 조아렸고 임금에게 귀양(歸養)의 형벌을 받고 유배지(流配地)에서 짧게 머물면서 사약을 받았을 때는, 그 얼마나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전하! 억울하옵니다”라는 말과 동시에 머리를 땅에 찧으며 절규하였을까요. 저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에 있는“정암조광조선생적려유허비, 靜庵趙光祖先生謫廬遺墟碑”를 서투르게 읽으면서 나의 글의 짧음에 대한 안타까움과 원대한 꿈을 접고 짧게 생을 마감했던(38세) 천재 개혁가의 마지막 절명시(絶命詩) 한 수를 소개하면서 그 안타까움을 헤아려 보고자 합니다. 愛君如愛父 (애군여애부) 憂國如憂家 (우국여우가) 白日臨下土 (백일임하토) 昭昭照丹衷 (소소조단충) 임금을 아비처럼 사랑했고 나라를 내 집처럼 걱정했노라,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으니 내 충심을 환히 비춰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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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과 밥 호프찰리 채플린(1889~1977)이 미국에서 활동했을 때 어느 곳을 여행하는데 그곳에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웃고 떠들며 왁자지껄 축제를 열고 있었습니다. 기웃거려보니 실로 기묘한 장면이 그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즐기고 있는 것은 ”찰리 채플린 흉내 내기 대회“였습니다. 자부심과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신분을 숨긴 채로 그 대회에 참가하게 됩니다. 그런데 결과는 겨우 3등! 바람직하지 못한 결과의 성적표였습니다. 젊었을 적 제 꿈이 영화배우였던 것을 차치(且置)하더라도 그 이야기를 들었던 시기는 늘 과음으로 탁한 생각과 행동으로 젖고 절어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제 인생을 살 만큼 살았고 알 만큼 알았고 성공과 실패, 환희와 좌절, 등을 경험 해 본 터라 나름대로 찰리 채플린의 소위 그 상황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채플린이 자신의 흉내 내기 대회에서 겨우 3등을 한 이유에 대해서 말입니다. 1. 이미 성공한 입장이라서 자만심에 빠져 있었다. 2. 그런 이유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3. 최선을 다하지 않았음은 물론 하나의 이벤트로 여겼다. 4. 우쭐한 마음으로 관객에 대한 배려와 매너가 부족했다. 5. 풍족했던 시기라서 절실하지 못했다. 반면, 이 대회에서 1등을 한 사람은 (확인할 수는 없고 1등 했다는 설이 있음) 20세기 미국 코미디계의 황제인 밥 호프(1903~2003)였습니다. 알려 진대로 밥 호프는 어디를 보아도 미남 이거나 훈남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거의 없는 너무나 평범한 얼굴이었지만 그러나 그만의 독특한 개성과 표정으로 수많은 오디션에 참여했습니다, 그러나 번번이 낙방을 밥 먹듯이 하고 있었던 어느 날 한 오디션에 도전했는데 심사위원들의 면면을 오히려 밥 호프가 알아볼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언제나처럼 심사위원이 심드렁하게 말했습니다. ”당신의 자료는 다 보았으니 애써서 소개할 필요까지는 없고 혹시 당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예! 저의 특기는 사람들을 웃기는 것입니다.” “그래요? 좋습니다, 그럼, 이 자리에서 우리 심사위원들을 바로 웃길 수 있을까요?” 그나마 자기에게 조그마한 관심을 보이는 한 심사위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밥 호프는 시험장 문을 열고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응시자들을 향해 크게 소리쳤습니다. “면접을 기다리고 있는 여러분! 여러분은 이제 그냥 귀가하십시오. 바로 지금 심사위원 모두가 만장일치로 나를 오디션에 합격시켰습니다!” 이렇게 해서 20세기 최고의 코미디 밥 호프는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나는 밥 호프의 입장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1. 그는 그만큼 절실했다. 2. 그런 이유로 항시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3. 최선을 다했으므로 결과가 좋은 것은 당연하다. 4. 수 없이 떨어지는 오디션 과정에서 자신만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5. 그는 항상 지금이 마지막이라는 절박함으로 오디션 현장에 임했다. 찰리 채플린과 밥 호프에 관한 10가지 나의 생각은 극히 주관적인 나만의 변(辨)일 수도 있겠지만 저의 꿈과 이상(理想)이었던 영화배우와 웃음치료사로서의 좌절이나 갈등, 또는 포기 등과 맞물려 있기에 실제로는 제 인생 자체에 대한 이유나 변명이기도 합니다. 제가 위의 10가지를 좀 더 일찍 터득했고 목표 의식이 뚜렷해서 인생을 더욱 치열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살았더라면 영화배우나 웃음치료사로 훨씬 성숙한 삶을 살았지 않았을까 때늦은 후회를 해 봅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자의 변명으로 여겨질 수밖에 없는 현재의 자화상에 슬그머니 무대 뒤로 숨어버리고 싶은 마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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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이 준 선물김상훈 수필가 신묘년설날 모처럼 집에 온 아들에게 덕담 몇 마디를 하고 난 다음 금연의 필요성을 이야기했습니다, 망설임 끝에 어렵게 내 의견을 제시했는데 녀석은 별다른 기색 없이 희미한 미소만 지으면서 예! 예! 하면서 대답하는 품새가 영 믿겨 지지 않았습니다. 끊을 의지는 확고한데 그게 잘 진행되지 않는다든가 실행을 해 보지만 항상 성공하지 못했다는 그런 기본적인 대답도 아닌 그저 건성으로 내 물음에 성의 없는 반응만 하고 있어서 녀석이 딱히 끊을 생각이 없는 모양이라고 짐작하면서 성묫길에 나섰습니다. 왕복 3시간쯤 소요되는 부모님의 산소를 다녀오는 동안 내내 우리 부자는 별로 말이 없었습니다. 녀석이 운전을 좀 해 주었으면 좋겠는데 옆자리에 앉더니 이내 잠이 들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조금 지나서는 옅든 코까지 골면서 태평스럽게 잠든 모습에 짜증이 슬며시 밀려왔지만 때가 때인지라 번잡해진 도로 사정을 감안(勘案)하면 내가 직접 운전하는 게 낫겠구나 하고 에둘러 생각을 고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내가 만일 지금의 아들 나이쯤에 아버지를 모시고 할아버지 산소에 성묘를 가면서 아버지께서 장시간 운전을 하고 내가 옆자리에서 태평스레 잠을 자고 있다는 모습을 상상해보니 그런 가정만으로도 아버지께 불효를 드린 것 같아서 얼굴이 붉어졌습니다. 모든 것이 내 탓이지 하는 자괴감도 들었고 참 세상 많이 변했다는 생각도 불현듯 스침과 동시에 너는 어쩔 수 없는 MZ세대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 그렇더라도 이렇게까지? 하는 서운하고, 조바심 나고 정리되지 않은 감정의 편린(片鱗)들이 머릿속으로 비집고 올라오는 혼란스러움에 한동안은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었습니다. 따라서 성묘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도 부자간의 좌석은 변함없음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고 오랜만에 만난 아들과 대화 한마디도 없이 되돌아올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몰입된 후부터는 너무 서운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소용돌이치면서 안정감마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우드랜드에 들려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해 보면 혹시 뭔가의 소득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긴박한 생각이 들어서 차량을 급히 억불산 쪽으로 돌렸습니다. “여기가 어디예요?” 잠에서 부스스 눈을 뜬 녀석은 알 수 없는 눈앞의 풍경에 뜨악한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응 정남진 편백 숲 우드랜드라는 곳이야 아주 좋은 명승지란다 특히 너 같은 잠퉁이 녀석에겐 더없이 좋을 수도 있는 곳이거든 내려서 좀 쉬었다 가자” “네~~~!” 모든 나무 중에서 피톤치드를 가장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알려진 편백 나무가 빼곡히 차 있는 숲길이 장관을 이루고 있는 톱밥을 깔아놓은 산책로에 들어선 순간부터 편백 특유의 그윽한 향취가 온몸에 휘감기는 공기의 청아함과 함께 코끝으로 확 끼쳐왔습니다. 10 여분쯤 걸어서 정교하게 만들어진 데크길로 접어들었을 때 아이는 심호흡도 하고 기지개를 켜는 모습을 보였고 나 또한 가슴의 답답함이 조금쯤 풀리는 듯한 청량함이 온몸으로 느껴져 왔습니다. 숲의 오묘(奧妙)한 힘과 자연의 무궁(無窮)한 능력에 동화되어 굳어있던 내 마음이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처럼 고요하게 퍼지고 있었다고나 할까요. 그것은 편백 나무 특유의 향취 때문일 수도, 아니면 부모님 산소를 오랜만에 다녀온 불효자만이 느끼는 작은 뿌듯함에 연유할 수도 있겠지만, 하여튼 우리 부자는 어느새 손을 잡고 걷고 있었습니다. 아이의 손은 땀이 약간 배어 있어서 부드럽고 다사로운 느낌이었는데 그것 또한 편백의 향기가 우리 부자의 손과 손 사이로 슬며시 녹아들어 체온을 따듯이 올리고 있는 듯한 상쾌함이 묻어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도 나처럼 이런 기분일까) 녀석의 어두웠던 표정이 서서히 걷히고 잔잔한 미소가 얼핏 보일 때 관리실에서 전하는 말이 스피커를 통해 들려왔습니다. 이곳 전체는 금연 구역이니까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극히 일상적인 내용의 안내 말이었는데 잠자코 듣고 있던 녀석이 키득키득 큰소리로 웃더니 빠르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저 안내방송이 이상한 궤변을 늘어놓고 있네요, 여기는 흡연지역이니까 산불 예방과 여러분의 건강을 위하여 금연을 삼가 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는데요 하하하, 금연을 삼가라, 너무 재미있는 말 아닙니까. 흡연과 금연, 금연과 흡연의 조합이라니!” 나는 잠시 어리둥절했지만 바로 상황이 정리되었습니다. 그가 기분 좋았을 때 했던 특유의 익살이 되살아나고 있다는 신호입니다. 당연히 나도 평소 내 방식대로의 맞장구를 칠 수밖에요. “뭐 이 녀석아! 네놈 코가 호강한 대신 귀에는 감기가 온 모양이구나, 금연을 삼가라고? 그게 말이 돼? 흡연을 삼가라는 말이겠지!” “아닙니다, 분명히 금연을 삼가라고 했습니다. 하하하” “뚱딴지같은 궤변은 제 놈이 늘어놓고선 하하하하“ ”아니라니까요. 저 안내방송이 이빨에서 땀 냄새 나는 말을 하고 있다니까요. 안내방송도 1년에 한 번씩 실수하는 날이 있는데 오늘이 바로 그날인 모양입니다. 그것도 정월 초하룻날부터 했으니 1년의 액땜을 지금 하는 셈이라니까요, 하하하하!“ 나는 아이의 녹슬지 않는 상상력과 순간의 재치와 빠른 변화의 대처에 녀석이 아직도 여전한 익살꾼으로 살아가고 있구나, 하는 안도감으로 아이에게서 받았던 서운한 마음의 빗장이 슬며시 풀리고 있음을 흐뭇하게 느끼고 있었습니다. 순간, 아이는 순수했던 옛날의 그 눈빛으로 돌아왔고 나의 흐뭇해진 느낌과 아이의 본래대로의 돌아옴은 우리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곧장 홍소(哄笑)로 이어졌습니다. 주변에 관광객들이 더러 있었지만 우린 웃음을 그치지 않았습니다. 아니 중지할 수가 없었지요, 우리의 호쾌(豪快)한 웃음소리는 바람과 함께 푸르고 푸르른 창공으로 나래를 펴면서 이름 모를 새와 함께 하늘로, 하늘로 높이 높이 솟아 올라갔습니다. 집을 나설 때 침울하게 시작했던 성묫길이 유쾌함으로 순식간에 바뀐 것입니다. (그래 바로 이것이 진정한 여행이 준 선물이 아니겠는가. 역시 우드랜드는 탁월한 선택이었고 웃음은 만병통치약이 확실해!) 나는 점점 만족한 표정으로 변해갔고 한바탕 웃음으로 기분이 좋아진 녀석은 달뜬 음성으로 말을 이어 갔습니다. ”아버지 이제부턴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사실은 어젯밤 온전히 잠을 못 잤습니다. 모처럼 아버지를 뵙고 수척해지신 모습이 아른거려 이것저것 생각하느라고요 그러나 우드랜드의 맑은 공기를 마시니까 정신이 명료해졌습니다. 그래서 선물 하나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의 말씀대로 정월 초하룻날인 오늘부터 정말 금연하겠습니다, 아까 할아버지 산소에서 아버지의 희망 사항인 금연하기를 저 자신과 명예를 걸고 다짐했습니다.“ 나는 녀석의 뜻밖의 고백에 콧날이 급격히 시큰해졌습니다, (어, 어? 이건 편백 나무의 진한 피톤치드 때문만은 아닌데 말이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찡해진 내 콧속으로 편백 나무의 한없이 기분 좋은 향취가 흠씬 밀려왔고 녀석의 손은 한층 더 다사로운 온기를 나에게 보내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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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슬링 사랑김상훈 수필가 작년 10월 가을하늘이 유난히 파랗던 주말의 어느 날, 친구 우경(愚耕)이 누런 사각봉투 하나를 나에게 주었습니다. 속엣것을 꺼내 보니 익살스러운 안동 하회탈을 형상화해서 만든 짙은 갈색의 목제 타이슬링 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외출할 때 일일이 넥타이를 매번 매기도 번거롭고 시간도 걸리고 해서 두어 개의 타이슬링을 구한 뒤 그때그때 분위기나 기분에 따라 사용해보니까 편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아내가 아무래도 나이가 더 들어 보이니까 자기와 외출할 때는 매지 않은 것이 좋겠다고 해서 좀 어정쩡함을 유지하고 있는 와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하회탈 타이슬링을 본 순간 내 취향에 딱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경의 얘기인즉슨 이렇습니다. 안동의 충효당에서 열린 전국 종가(집) 모임에 갔을 때 (그는 홍주송씨 이요당파 광길종가 12대 종손임) 거기에 모인 모든 이들에게 안동의 상징이랄 수 있는 하회탈 타이슬링을 하나씩 선물하더랍니다. 그래서 내 생각이 나서(라기보다는 우경 특유의 장난기 발동이라고 여겨집니다만) 주최 측에다 하나를 더 구할 수 있느냐고 물었더니 물론 더 줄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는 겁니다. 그러나, 꼭 한 개가 더 있어야 할 이유를 설명하면서 끈질기게 요구했더랍니다. 우리 형제는 쌍둥이이고 이번 행사에는 형편상 동생이 참석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심한 감기가 와서 어쩔 수 없이 내가 오게 되었다, 그런데 이 선물을 나만 가지고 가면 동생이 갑작스러운 와병으로 참석하지 못했음에 몹시 서운해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받은 선물을 동생에게 주기도 쉽지 않으니까 다시 한번 재고해 달라는 간곡한 얘기 끝에 어렵게 하나를 더 구했다는 겁니다. 나는 그의 기지와 익살이 신통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해서 우경을 만날 때는 어김없이 기분 좋은 사연이 있는 이 타이슬링을 매겠다는 약속을 그와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든 어느 날, 우경과 내가 같은 타이슬링을 한 것을 우연이 본 심송(尋松)이 어떻게 약속이나 한 것처럼 두 사람이 똑같은 것을 착용했느냐고 묻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경은 여차여차해서 그렇게 됐어, 라고 얘기했을 때 그 설명을 듣던 심송은 두 사람이 같은 것을 매고 있으니까 보기에 참 좋네, 하면서 흥미를 보였습니다. 그 후 한 달여쯤이 지날 무렵 나는 또 하나의 타이슬링을 선물 받게 되었습니다. 심송이 인근의 중고등학교 교장단으로 구성된 모임에서 안동의 도산서원엘 여행했는데 은악양선(隱惡揚善, 남의 나쁜 점은 덮어주고 좋은 점은 널리 알린다, 중용에서 유래). 이라는 퇴계 이황 선생의 가르침 글이 새겨진 네 모 반듯한 철제 타이슬링을 내게 선물 한 것입니다. 나의 성향에 꼭 맞을 것 같아서라는 정겨운 설명과 함께 말입니다. 그 후, 나는 우경을 만날 때는 하회탈 제품을, 심송을 만날 때는 은악양선을 가능한 한 매기로 작심하였습니다. 그것은 나름대로 두 친구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며 내가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예의이며 배려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분 좋은 사연이 깃든 선물을 받은 나로서는 두 친구에게 알뜰한 믿음으로 보답하고 동시에 살뜰한 보살핌을 받고 있다는 고마움의 증표로 보여지기를 희망하면서 말입니다. 타이슬링의 편리한 점은 넥타이보다 간편해서 좋고 한겨울이나 여름철에 굳이 정장을 안 해도 어지간한 자리에는 결례가 되지 않으며 티셔츠나 스웨터를 입을 때에는 목 부분을 좀 조여서 착용하면 추위를 덜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또 여름철에는 늘어져서 볼품이 한창 떨어진 감추고 싶은 목주름을 슬며시 보이지 않게 할 수 있어서 두루두루 좋았고요, 그뿐만 아니라 내가 타이슬링 한 것을 본 지인이나 이웃들이 참 잘 어울린다, 당신의 스타일과 매치가 되어 되게 좋게 보인다, 어디서 구했느냐 글씨의 뜻은 무어냐 등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매우 흡족한 마음으로 설명과 대답을 할 수 있어서 친구들께 받은 선물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단순히 돈의 액수로 친다면 그리 큰 금액은 아닐지라도 나로서는 절친에게서 받은 이 안동산(安東産) 타이슬링은 갈수록 나의 최고의 깔맞춤과 액세서리가 되어서 외출할 때마다 늘 같이하고 있음을 매양 기분 좋게 생각하고 있고 아내도 이제는 동조하는 분위기가 되었습니다. 타이슬링을 착용하고 외출한 후 귀가했을 때는 어김없이 이상 유무를 확인하고 줄을 가지런히 정리한 다음 나만이 사용하고 있는 상자에다 정성들여 보관해서 관리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뭐가 그리 중해서 그토록 애틋하게 깊은 장롱 속에다 모시냐는 아내의 핀잔을 들을 때도 더러 있지만 앞으로 나는 줄이 낡았거나 헐거워져서 타이슬링 으로써의 기능을 조금씩 잃어간다고 할지라도 고지식하고 융통성 부족한 내 방식대로의 보관법을 견지(堅持)하리라 마음먹고 있습니다. 그것은 두 친구의 고마움을 잊지 않겠다는 의미도 있지만 내가 살아갈 날들이 그리 오래지 않다는 생존의 엄중함이 진득이 떠 오를 때마다 타이슬링에의 애절함과 애정함이 절실해졌기 때문이리라고 여겨집니다. 나의 생이 다 할 때까지 좋은 친구들과 같이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곧장 행동으로 이어졌듯이 그 마음과 행동의 매개체인 이 타이슬링은 내 삶의 소소한 기쁨과 여유로움을 나에게 알려주는 생명줄로써의 존재임을 명증(明證)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갈수록 애착이 가고 사랑스러워짐을 실감하고 있는 요즈음의 기상도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행복의 전달자인 두 친구에게 그 수혜자인 소월정(笑月亭) 주인이 보냅니다. 인생은 당신이 행복할 때 좋습니다. 그러나 더 좋은 것은 당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행복할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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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나물을 캐면서김상훈 수필가 향일암의 진산 금오산(金鰲山)으로 해쑥을 캐러 왔습니다. 청정! 그야말로 무공해 지역입니다. 와서 보니 쑥뿐만이 아니라 고사리, 왕고들빼기 등이 지천입니다. 몇 년 전부터 이맘때면 봄나물을 캐러 갔었는데, 올해도 변함없이 금오산을 찾았습니다. 아내만이 알고 있는 명당자리는 햇나물들이 군락을 이룬 채로 우리를 반겨 줍니다. 올해는 특별히 친구 부부를 은밀히(?) 초대했습니다. 친구 부인이 대단한 요리 솜씨를 가진 분이라 동행을 권유했더니 흔쾌히 승낙한 것입니다. 오늘은 친구 부인께서 정성껏 준비한 맛있는 음식을 두 가족이 같이 먹으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입니다. 또 순천의 명주 ‘나누우리’ 막걸리를 반주로 곁들어 마셨더니 입이 알아서 절로 흥을 돋웁니다. 두 분 여성은 막 돋아나는 해쑥을 캐고, 친구와 나는 고사리와 왕고들빼기를 끊거나 캡니다. 나는 기분이 한껏 좋아져서 큰소리로 맘껏 소리 지를 수 있는 그 느낌과 분위기에 매료되어 호남의 비타민이며 호남인들의 영원한 얼과 흥이 버무리 되어 있는 그 유명한 판소리 단가인 “호남가”를 토해냅니다. 내가 최고로 기분이 좋았을 땐 어김없이 입에서 거의 무방비의 상황으로 튀어나오는 흥얼거림입니다. 함평 천지 늙은 몸이 광주 고향을 보랴하고 제주어선 빌려 타고 해남으로 건너 갈 제 흥양의 돋은 해는 보성에 비쳐있고 고산의 아침 안개 영암을 둘러있다. 태인 하신 우리 성군 예악을 장흥 하니 삼태육경이 순천 심이요 방백 수령은 진안군이라. 앞에는 태평양으로 이어지는 너른 바다! 뒤에는 그 유명한 금거북이라는 뜻의 금오산! 배산임수의 전형을 보여주는 다도해 해상국립공원의 잔잔한 바다 위로 하얀 물살을 가르며 달리는 통통배들, 녹색 수액을 가득 머금은 여린 나무 끝에서 전해오는 새싹들의 움틈의 현장, 크고 작은 온갖 섬들이 금거북을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도열 해 있는 풍경이 눈에 가득 들어옵니다. 정말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는 옛글과 함께 상큼한 시상이 떠오릅니다. 산과 바다, 그리고 섬들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면서 물빛, 산빛, 하늘빛이 고즈넉하게 물들고 있는 남녘의 해안 풍경은 포근하고 정겹고 안온합니다. 아! 오늘은 그야말로 눈과 입, 그리고 코와 귀 등 신체의 모든 구멍이 활짝 열리어서 건강한 기쁨을 호흡하니 온종일 호사를 누리는 날이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사람이 있고, 좋은 음식이 있고, 좋은 풍광이 있으니 이 또한 흥얼거리는 것이 제격이 아니겠습니까? 저의 졸 시조 「향일암」입니다. 향일암 향일암 가는 길은 내내 꿈길 이어라 좌우의 온갖 바윈 거북 등 무늬여라 거무산 직벽 바위는 영험한 기도처라 관음전 연리근엔 손 맞잡은 젊은이라 두 손을 맞잡으니 사랑의 노래여라 댕그렁 풍경소리는 그들만의 축복이라 해넘이 노을 속엔 만선의 통통배라 시 속에 그림 있고 그림 속에 시 있어라 고사리 여린 잎맥엔 봄빛 설핏 얹혔어라. 註 : 거무산은 금오산의 옛 이름. 산에 산림이 울창하여 검게 보이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해 오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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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월정 부부 상경기김상훈 (수필가) "오메, 서울은 여름에 가도 춥다든디 어쩐다냐?" 이 말은 우리 어머니께서 생존해 계셨을 때 서울이라는 곳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로 가끔 사용하셨던 말씀입니다. 흔히 알려진 대로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각박한 서울의 인심을 가장 울 엄마식으로 표현했던 말이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서울깍쟁이라고 사뭇 자기 고향이 더 낫다고 합리화 시키던 시절에 울 엄마의 자존감과 해학과 풍자가 버무려진 서울이라는 곳이 편하지만은 않다는 표현 방식의 하나입니다. 이렇듯 여름에 가도 춥다는 서울을 한겨울인 12월에 저희 부부는 다녀왔습니다. 참고로 전날의 엄청난 바람과 다음날의 기습 한파는 올해 들어 최고 추위인 영하 9도, 체감온도는 15도라고 방송에서는 호들갑을 떨고 있었습니다. 서울 여행의 목적은 백내장 수술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불어 조절성 인공장치를 삽입하여 근거리, 원거리를 훤히 볼 수 있게 하는 눈 수술을 받기로 예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친구 부부가 몇 년 전 이 수술을 했는데 세상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졌고 안경을 쓰는 불편함에서 해방되어 날아갈 것 같다고 해서 그 병원을 소개받은 것입니다. 나의 심각한 눈 상태와 아내가 항상 인상을 찌푸리고 글을 읽고 쓰는 불편함을 떨쳐버리기 위해서 서울의 유명 안과병원을 찾은 것입니다. 예약 시간은 오후 2시, 3시간 반 이상의 온갖 검사를 받은 뒤 원장님의 감동적인 기도와 함께 왼쪽 눈부터 수술하였습니다. 수술 시간은 약 15분 정도로 수술 후 우리 부부는 네 개의 눈이 졸지에 두 개로 줄어드는 외눈박이로 깜짝 변신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왼쪽 눈에 안대를 하나씩 붙였는데 그 불편함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우선 걸을 때 눈앞의 원근과 바닥의 높낮이를 전혀 가늠할 수가 없고, 한 눈으로 보는 낯선 서울의 휘황찬란한 거리는 우리 부부에겐 생전 처음 보는 괴물로 보였습니다. 주변의 호텔은 비싸니까 신논현역 근처 교보타워 반대편에 있는 ‘N 호텔’을 소개받아 병원 문을 나설 때의 시각은 밤 6시가 막 지나고 있었습니다. 친절한 병원 여직원이 택시를 이용하면 곧 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밖으로 나왔을 때 곧바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장면이 한쪽 눈을 통해 다가왔습니다. 그 모질게 추운 바람과 수많은 인파와 끝없이 이어지는 눈부심이 심한 네온의 불빛과 자동차 경적은 1분도 안 되어 우리 부부를 완전한 이방인, 아니 예외 없는 전쟁고아로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퇴근 시간과 맞물린 서울의 심장부 압구정역 3번 출구 앞에서 우리는 버려진 노인처럼 절망의 절벽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한쪽 눈으로 아내가 옆에 있는지(손을 잡고 걷기는 불가능했습니다.)를 열심히 확인하며 떠밀리듯이 움직이면서 질주하는 택시를 잡으려다가 아찔한 순간도 있었지만, 그렇다고 택시를 잡기는 불가능하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내가 무슨 수로 저 수많은 인파 속에서 택시를 잡을 수 있단 말인가? 눈 좀 고쳐서 편히 살려다가 그냥 거리에서 객사할 수도 있겠다는 방정맞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꽉 막힌 고정관념에다 그것에 몰입하는 집요함, 반드시 택시를 이용하라는 병원 여직원의 말에 함몰되어 다른 경우는 손톱만큼도 고려해 보지도 못한 편협함이 우리 부부의 고난을 가중하고 있었습니다. ‘N 호텔’을 소개하고 있는 유인물을 보이며 도움을 청했을 때 대부분의 서울시민은 무심하고 귀찮다는 반응이었습니다. 그렇게 헤매기를 30여 분, 마침내 어느 친절한 여성 한 분이 여기는 택시 잡기가 불가능한 지역이니 1442번(?) 버스를 타고 세 정거장을 지나 신논현역에서 내리면 교보타워 반대편에 우리가 찾는 호텔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야 살길을 찾았습니다. 오, 나의 구세주여! 나의 마돈나여!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전쟁 못지않은 역경과 고난 끝에 예약한 호텔에 도착했을 때의 시각은 7시 20분이었습니다. 산술적으로 계산해 보았을 때 우리는 그 추운 길바닥에서 외눈박이로 1시간 이상을 헤맸던 것입니다. 거리상으로는 겨우 2.5km밖에 되지 않은 머지않은 길을 말입니다. 호텔에 와서 정리해 보니까 택시 잡기는 아예 불가능했고 전철과 버스를 이용할 수가 있었는데, 그놈의 택시만 잡으려고 했으니 하여튼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말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되었습니다. 촌놈은 어디를 가도 촌놈이라는 자각에 부끄러움을 느꼈고, 아내에게 한없이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내는 너무 지쳐서 넋이 나간 듯 별로 말이 없습니다. 호텔에 들어왔다 해도 얼굴을 씻지도 못하고 안대 또한 떼지도 못한 채 테가 굵은 수면용 안경을 쓰고 자는 불편함을 감수할 수밖에 도리가 없었습니다. 이튿날, 오른쪽 눈을 마저 수술하려고 호텔을 나와 병원으로 갈 때는 많은 택시가 머리를 조아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호사도 누렸습니다. 제기랄, 이렇게 평온한 거리가 어젠 그렇게 삭막하고 비열한 생과 사의 현장으로 군림했었단 말인가? 라는 생각에 기가 막혔습니다. 영하 9도의 추위쯤은 전날의 고행에 비하면 깜도 되지 않는다는 생각에 실소를 금할 수 없었습니다. 병원에 도착해서 왼쪽 눈과 똑같은 검사를 한 다음 오른쪽 눈을 수술하였습니다. 끝난 시각은 오후 1시쯤, 우린 무사히 수술을 마치고 귀가하였습니다. 1박 2일의 서울행은 눈이 밝아진 대가를 혹독히 치른 하나의 사건이었고, 한바탕의 꿈을 꾼 듯 야릇한 기분이었습니다. 하루에 네 번씩 소염제, 항생제 등 세 개의 점안액을 넣고 눈에 물이 들어가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가 필요하며 특히 밤에는 모든 빛이 달무리처럼 둥글게 보여 밤 운전은 절대 하지 않아야 하는 불편함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뭔가 하나의 절실함을 얻기 위해서는 꼭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교훈을 온몸으로 실감한 종횡무진 우리 부부의 상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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쥐꼬리 소동김상훈 수필가 나는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남도 답사 일번지 제1장 제1절에 소개된 강진이란 곳에서 6·25전쟁이 일어나기 전해에 태어났습니다. 산자수명과 배산임수로 조화를 이룬 햇빛 맑고 물빛 고운 고을에서 태어나서 자랐다는 것은 언제나 자랑거리입니다. 초등학교 4학년 가을쯤으로 기억됩니다. 당시 우리는 쥐를 잡아서 자른 쥐꼬리를 학교에 가져오라는 선생님들의 독려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습니다. 가뜩이나 식량이 부족했던 시절에 그 피 같은 곡식들을 쥐새끼들이 엄청나게 먹어 치우니 전 국가적으로 쥐와의 전쟁을 선포한 후 어떤 방법으로든 쥐를 잡아 꼬리를 잘라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어떤 친구는 쥐를 잡으려고 쥐구멍에 불을 놓다가 집을 홀라당 태워버렸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도 흉흉히 들려오던 시절이었습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각 학년과 학급으로 쥐꼬리 할당량을 정해주면 어떻게든 그 목표를 달성해야 담임선생님께서도 자유로웠고, 선생님으로서는 공부 잘하는 아이보다 쥐꼬리를 많이 가져온 학생에게 더 신임을 보였던 시절이 있었으니, 지금 학생들은 웬 선사시대 고인돌 옮기던 이야기냐고 황당하기도 하고 어이없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너무나도 또렷이 제 기억 속에 각인된 어린 날의 잊을 수 없는 추억의 한 대목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쥐꼬리는커녕 쥐 털 하나도 확보하지 못한 채 학교에 가야 했던 참담했던 월요일이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풀이 죽은 패잔병 꼴로 등교했습니다. 그런데 그날 유독 내 짝은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생글생글 웃는 품새로 보아 쥐꼬리를 많이 가져온 것으로 보여졌습니다. 동시에 나는 아주 교활하고 음흉한 생각을 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쉬는 시간에 짝꿍이 화장실을 간 사이에 그만 그 옳지 못한 생각을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오! 이런! 내 기억으로는 생애 처음으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댄 사건으로 기억됩니다. 당시에는 일진이니 짱이니 뭐 이런 말 자체가 없었던 시대였지만, 나는 반 친구들과 썩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던 시절이었기에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잠시 빌려 온다는 몹시도 합리적으로 그래서 가볍게 위치 이동만 한다는 생각이었는데, 문제는 짝꿍 녀석이 쥐꼬리를 누군가가 훔쳐 갔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상황이 묘한 방향으로 진행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반 친구들 전체를 집합시킨 선생님께서는 강한 어조로 말씀하셨습니다. "쥐꼬리를 훔친 놈은 속히 신고해라!" 나에게는 선생님의 말씀 중에 ‘훔친 놈’과 ‘신고’라는 엄숙한 단어가 무거운 중압감으로 다가왔습니다. 만일 내가 스스로 신고해서 이른바 ‘훔친 놈’으로 알려지게 된다면 내 위치가 심히 손상되어 앞으로의 모든 활동에 심각한 제약을 받을 수 있다는 생각 때문에 나를 더욱 움츠리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반 모든 아이를 책상 위에 무릎 꿇은 자세로 앉힌 후 눈을 꼭 감으라고 엄하게 명령하셨습니다. 쥐꼬리를 가져간 사람은 눈을 크게 뜨고, 가져가지 않은 놈은 절대로 눈을 떠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만일 실눈이라도 뜨는 놈이 있다면, 그 규정을 지키지 않았으니까 훔친 놈으로 간주하겠고. 시간은 딱 5분을 주겠다. 선생님의 말씀 중 달라진 부분은 ‘훔친 놈’에서 ‘가져간 사람’으로 말이 순화되었고, 눈을 뜬 사람을 ‘눈을 뜬 놈’으로 격하시켰다는 부분에 나는 마음이 조금쯤 편해지긴 했지만, 가슴은 이미 방망이질을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눈을 떠서 선생님께 잘못을 시인하는 것도 커다란 용기이다. 따라서 나는 용기 있는 사람은 용서할 것이다. 선생님의 음성은 어느덧 자애로운 아버지의 말씀처럼 부드러워졌습니다. 눈을 그대로 감고 있을 것인가, 아니면 뜰 것인가. 나는 점점 햄릿이 되어갔습니다. 졸렬한 저항이냐, 용감한 항복이냐. 선택은 오직 나! 김상훈. 너에게 달려 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 결정의 순간은 왜 그렇게 길게 느껴졌든지 손엔 진땀이 나고 목은 갈증으로 타는 듯했지만 나는 결국 다음 행동을 결정짓고 있었습니다. 눈을 뜨기로 말입니다. 그러자 의외로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나는 이때다! 하고 눈을 크게 뜨면서 선생님을 똑바로 바라보았습니다. 눈이 마주쳤을 때 선생님께서는 잠시 고개를 끄덕이시며 알았다는 신호를 보내왔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친구들 전체를 책상에서 내려와 본래대로 의자에 앉게 한 다음 낮은 음성으로 말씀을 이어 갔습니다. 선생님의 목소리는 우리 모두를 긴장에서 빠져나오게 하고 사건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전혀 손색이 없는 낮은 억양이었지만 그러나 크나큰 울림이 있었습니다. "너희들의 노력으로 지난주에 우리 반이 전교에서 “쥐꼬리수집운동” 1등을 하게 되었다. 결과가 좋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여기서 끝낸다. 쥐꼬리를 가져간 친구도 다행히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고 눈으로 선생님께 말했다. 쥐꼬리를 잃어버린 친구도 우리 반이 1등 하는데 크게 힘을 썼으니 응원의 박수를 보내주자. 따라서 선생님 혼자서만 쥐꼬리를 가져간 학생을 알고 있는 것으로 하겠으니까 너희들도 그렇게 이해해 주기 바란다, 알았나? 동의한다면 박수로 마무리하겠다. 박수!!“ 우리는 선생님의 신속하고 공정한 문제 해결과 그 무거웠던 분위기에서 해방됨에 대해서 매우 다행으로 여기면서 짧은 대답과 긴 박수로 마침내 쥐꼬리 소동을 마무리했습니다. 이상은 1950년대 말 시골의 어느 초등학교에서 일어난 한바탕의 소극(笑劇)이었습니다. 담임선생님은 이제 고인이 되셨고 내 짝이었던 친구는 수 십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지혜와 인내를 가르쳐 주셨던 그리움으로 내 마음속에 지금도 살아 계시고 친구는 늘 미안함의 대상으로 가슴속에 남아서 보고 싶은 얼굴로 자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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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생명의 노래와 그리고 시조(時調) 한 수김상훈 수필가 기분이 좋을 때 흥얼거리는 노래 한 곡쯤은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중학교에 들어가서 처음 배웠던 “봄이 오면”을 부르는 습관이 있습니다. 특히 ‘꽃만 말고 이 마음도 함께 따가 주’, 라는 마지막 대목에선 아주 신이 나서 목소리를 길게 빼며 트롯의 한 구절처럼 구성진 음성으로 ‘함께 따가 주우우우!’ 라고 소리치면서 스스로 희열을 느끼곤 합니다. 또, 기분이 조금쯤 저조해 있을 때도 어김없이 이 노래를 불러서 우울했던 분위기 자체를 반전시킵니다. 희한(稀罕)한 것은 이 노래를 부르고 나면 대다수의 경우 언짢았던 기분이랄지 어느 한 곳에 막혀있었던 부분이 금세 풀린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경우를 뭐라 할지 모르지만, 나의 경우 감히 이 노래를 “생명의 노래”라고 불리고 싶은 욕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좋을 때도 봄이 오면 이요 울적할 때도 함께 따가 주우우우!~ 하고 흥얼거리면 그냥 술술 풀린다는 얘깁니다. 딱히 어느 때까지일지 확실한 기약은 없지만, 70 나이를 넘겼으니 적어도 내가 생을 다할 때까지 스스로 이 생명의 노래는 계속되리라 예견해 봅니다. 그러나, 이 노래를 작사한 파인 김동환은 소설가 최영희의 부군으로서 국경의 밤, 승천하는 청춘, 해당화 등의 좋은 시를 남겼던 시인이었지만 적극적으로 친 일을 했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시라야마 아오키(白山靑樹)라고 창씨개명을 했고, 6.25 전쟁 때는 납북되어 북한에서 납북인사들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촉진협의회 중앙위원으로 활동하다가 사망한 옥에 티가 있는 인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후 최초로 음악 교과서를 통해서 소프라노를 전공했던 아름다운 여선생님의 유려한 해설까지 들으면서 맨 처음 배웠던 추억의 노래임에 방점을 둡니다. 또 한 이미 반세기를 훌쩍 넘긴 세월의 흐름에 작사가의 옥에 티에 대한 부분은 그가 그림처럼 푸르게 읊조린 3절의 미려한 시 구절구절에 하얀 옥양목처럼 순수했던 시절에 내가 그토록 동경해 마지않았던 대상이었다는 이유로 덮어두어야지 하는 다짐을 늘 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합니다. 또, 중학교 1학년 때 국어책에서 배웠던 최초의 현대시조 한 수를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은이와 제목은 생각나지 않지만, 누님이 없는 나에게 시인은 당신의 누님을 생각하며 애틋하고 정감 있는 시어로 나의 외로운 감성을 슬프게 자극했던 특별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지은이나 제목이 전혀 생각나지 않고 흐릿한 기억으로 시조는 3연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가 외우는 부분은 2연까지라는 것에 대하여 우둔함과 안타까움이 항시 적체(積滯)되어 있었던 작품입니다. 이 시조 역시 내가 어떤 문학적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는 어김없이 등장하는 1순위의 흥얼거림입니다. 어찌 그다지도 사람의 마음을 적절하고 절절한 시어로 자극하는지 왜 그 마지막의 3연은 생각나지 않는지에 대한 애태움은 매양 절박함으로 내 마음속에서 체증처럼 머물고 있었습니다. 언젠가는 알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마음을 다스리곤 했지만, 그 언젠가는 쉬이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늘에야 그 빗장이 풀렸습니다. 우연히 통영의 문화와 인물 등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내 가슴에 비수가 꽂힌 듯 다가오는 이가 있었습니다. 통영 하면 유치진, 유치환 형제와 박경리, 윤이상, 전혁림, 김상옥, 김춘수, 전옥숙, (영화감독 홍상수의 모친) 등의 작고한 예술인들이 많은 예향의 고장입니다. 마침내 초정김상옥(草汀金相沃)이란 시인이 얼핏 둔감한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아! 여기에 바로 답이 있을 줄이야! 드디어 오늘 그렇게도 입에서만 빙빙 돌며 나를 괴롭혀 왔던 시인과 그의 봉선화라는 시조 작품 3연을 온전하게 가슴으로 흠씬 품어보게 되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소개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봉선화 비오자 장독간에 봉선화 반만 벌어 해마다 피는 꽃을 나만 두고 볼 것인가 세세한 사연을 적어 누님께로 보내자. 누님이 편지 보며 하마 울까 웃으실까 눈앞에 삼삼이는 고향집을 그리시고 손톱에 꽃물 들이던 그날 생각 하시리. 양지에 마주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하얀 손 가락 가락이 연붉은 그 손톱을 지금은 꿈속에 본 듯 힘줄만이 서노나. 읽으면 읽을수록 외우면 외울수록 누님을 향한 그리움과 애틋함으로 절절히 그려 나가는 멋진 시조 작품입니다. 특히 3연의 첫째 시작 부분인 ‘양지에 마주 앉아 실로 찬찬 매어주던’ 이렇게나 기막힌 대목이 생각나지 않고 애태우더니 오늘에야 그 민낯을 보는 기쁨을 맞이한 것입니다. 그것은 전율이었고 실제로 헤어졌던 누님을 60여년 만에 만나는 그런 느낌과 설래임이 가슴을 타고 흘러내렸습니다. 이런 이유로 노래는 “봄이 오면”. 시조는 “봉선화‘ 가 나의 최고의 노래임과 동시에 나의 최고의 애송 시조 즉, “나의 생명의 노래와 시조”가 될 것입니다. 기분이 좋고 그름을 아랑곳하지 않고 ‘봄이 오면’을 부르면서 희열을 느낄 것이고 시름은 잊을 것입니다. 또, 감성이 메마르거나 영혼이 허기져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져 있을 때는 어김없이 “봉선화”의 반만 벌인 분홍 꽃망울과 꽃물 들이던 하얀 손톱과 힘줄이 선 꿈속에서조차 아련했던 누님과의 만남을 옷깃을 여미어 읊조리면서 내 인생을 조화롭게 경영해 나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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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행시는 나의 운명 2김상훈 수필가 필자는 자천타천 삼행시의 대가입니다. 평가는 오직 여러분의 몫입니다만. 제가 한때 했던 일은 웃음치료사였습니다. 아래의 5행시로 사람들을 웃기는 웃음치료사들께 웃음과 박수를 받았던 흐뭇한 추억이 있습니다. 웃 : 웃음과 음 : 음악으로 치 : 치매도 예방하고 료 : 요통도 잊게 하는 사 : 사랑할 수밖에 없는 멋쟁이 이름으로 짓는 삼행시는 그 사람의 특징과 이미지를 콕 찍어 표현해야 하는 쉽지 않은 작업입니다. 자칫 잘못하면 엄청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민감한 부분이 항상 내재해 있습니다. 그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를 극복해 가면서 짜릿하게 도전해 보겠습니다. 제 최고의 친구는 유 인달 씨입니다. 그가 있는 곳은 항시 유쾌한 웃음과 해학이 있습니다. 솔직히 그의 삶이 부럽습니다. 유 : 유쾌한 인 : 인생 달 : 달덩이 보다 더 밝은 친구.! 그를 아는 분들은 ‘달덩이’라는 대목에 빙긋이 미소 지을 것입니다.(모르는 분들을 위해서 약간 설명을 드리자면, 그는 30대 중반부터 심한 탈모증이 있었습니다) 저의 최고의 후배는 이부기 씨입니다. 그는 많은 부분에서 성공한 인물입니다. 근면 성실함이 유별나지만, 이름 덕분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 이름은 부 : 부르기 쉽고 기 : 기억하기 좋아야 한다. 인천에 사는 저와 동갑내기 친구는 김옥진 씨입니다. 그녀도 웃음치료사인데 그가 언제나 웃음 치료 시간에 자기를 소개할 때는 이렇게 시작을 합니다. 물론 제 작품이죠. 김 : 금보다 옥 : 옥보다 진 : 진정한 보석! (김 옥 진 입니다. 와아아 박수우~~~) 또 한 분의 웃음치료사는 안양의 이루리 씨입니다. 기지가 번뜩이는, 애정이 가는 삼행시라고 자평합니다. 이 : 이루리 이루리 많은걸 이루리 루 : 누리리 누리리 모든걸 누리리 리 : 이루면 누리고 누리면 이루리 반면 제 최악의 인간은 이만희 씨입니다. 이 : 이젠 만 : 만나지 말자 희 : 희대의 사기꾼아! 아쉽지만 슬픈 삼행시도 있습니다. 인간의 삶을 생로병사라 하지 않습니까? 나이 30도 못 되어서 일찍 간 제 친구의 이름은 이래선입니다. 친구는 이름 때문에 그렇게도 빨리 하늘의 문을 두드렸지 않나 싶습니다. 그의 짧은 생애처럼 저도 짧게 절규합니다. 이 : 이 래 : 래 선 : 선 안 돼! 서울의 제 친구 김정섭도 모두가 인정하는 저의 최고의 친구였습니다. 그렇게 건장하고 유머러스하고 다정다감했던 친구도 교통사고로 불귀의 객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글은 짧고 여운은 깁니다. 김 : 김정섭! 정 : 정말로! 섭 : 섭섭해! 이렇게 저는 삼행시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삼행시는 나의 운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혼자 있거나 가족들과 같이 있을 때, 그리고 지인들과 더불어 있을 때도 행복의 바이러스와 건강의 비타민인 해학(諧謔)과 웃음을 늘 최고의 덕목으로 삼고 살아가고자 하며 그 저변에는 늘 삼행시가 운명처럼 자리하고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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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행시는 나의 운명김상훈 수필가 오늘은 필자 부부, 아들 가족, 그리고 제3의 여성 한 분의 이름으로 삼행시를 소개하면서 인간의 삶과 삼행시와의 놀라운 연관성(聯關性)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제 이름은 김상훈입니다. 그런데 상대가 내 이름을 기억하기가 쉽지 않은 듯했습니다. 이름 세 (3) 자에 자음의 받침이 각각 들어 있어서 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상대에게 삼행시를 외우게끔 해서 이름을 기억하도록 노력했습니다. 김 : 김상훈은 상 : 상상만 해도 훈 : 훈훈한 남자! 제 아내 이름은 변영선입니다. 아내의 콧대가 백두산과 동격이었죠. 그러나 삼행시 한 수로 그 높은 콧대를 접게 했습니다. 내친김에 프러포즈에도 성공했습니다. 변 : 변치 않겠소 영 : 영원히 변치 않겠소 선 : 선서 하겠소. 제 손주 녀석의 이름은 김재이 입니다. 있을 재(在) 자에 기쁠 이(怡) 자, 풀이하자면 ‘금 같은 네가 있어서 기쁘다.’는 뜻으로 작명을 했습니다. 在 자는 항열(行列) 자이고 또한 재이는 영어로 ‘J’입니다. 그런 재이는 제 자식과 미국인 며느리 사이에서 태어난 하나밖에 없는 그야말로 금쪽같은 손자인데 어느 날 갑자기 아들 며느리와 함께 이민을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눈 만 뜨면 보고 싶어서 심히 괴롭습니다. 김 : 금이나 재 : 재물 보다 이 : 이제부턴 재이. (이렇게나 녀석을 아꼈었는데 말입니다) 제 아들놈의 이름은 김동현입니다. 물론 단 한 명뿐인 유일한 피붙이고요. 아들이 이민을 떠난 후에 이런 삼행시가 탄식과 함께 나왔습니다. 김 : 김동현! 동 : 동경하던 미국으로 이민가서 현 : 현재는 미국의 아들이 되어버린 해외동포.! (삼행시의 운명적인 영향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며느리의 이름은 세넌 김입니다. 역시 미국은 쎈 나라더군요. 세 ; 쎄다! 넌 : 넌! 김 : 김해김가 2명을 아이오와 김씨로 순식간에 만들어 버리다니! 안 될 인연은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거의 결혼 단계까지 진행됐었고 결혼문제도 구체적으로 오갔는데 발목이 잡혔습니다. 이 또한 삼행시 때문이라고 여겨집니다. 그 여성의 이름은 이미정 씨였습니다. 이 : 이쁩니다. 미 : 미인입니다. 정 : 정말입니다. 이토록 처음에는 좋았는데요 그러나 사귀다 보니 단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당연히 삼행시도 이렇게 변해갔고요. 이 : 이쁘냐고? 미 : 미인이냐고? 정 : 정말이냐고? 헤어질 때는 이랬다니까요. 이 : 이 갈려! 미 : 미치겠네! 정 : 정떨어져! 이런 연유로 이 여성과는 헤어졌습니다‘(순전히 이름과 삼행시의 연관성 때문으로 판단됩니다) 혹여(惑如) 이 글을 이미정이란 이름을 가진 여성께서 읽으셨다면 이미정의 첫 행만 읽어 주시기를 그저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