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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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의 핵심은 무엇일까, ‘[다음 소희]와 악의 평범성’이민숙 여수 샘뿔인문학 연구소 소장 (시인) “광주 수산시장의 대어들.” “육질이 빨간 게 확실하네요.” “거즈 덮어놓았습니다.” “에미야, 홍어 좀 밖에 널어라.” 1980년 5월 광주에서 학살된 여러 시신들 사진과 함께 어느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 있는 글이다. “우리 세월호 아이들이 하늘의 별이 된 게 아니라 진도 명물 꽃게밥이 되어 꽃게가 아주 탱글탱클 알도 꽉 차 있답니다~.” 요리 전의 통통한 꽃게 사진과 함께 페이스북에 올라 있는 글이다. 이 포스팅에 ‘좋아요’는 500여 개이고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댓글은 무려 1500개가 넘었다. ‘좋아요’보다 댓글이 더 많은 경우는 흔치 않다. 사진을 올리고 글을 쓰고 환호한 사람들은 모두 한 번쯤 내 옷깃을 스쳤을 우리 이웃이다. 문득 영화 「살인의 추억」마지막 장면에서 비로소 범인을 찾은 듯 관객들을 꿰뚫어보는 송광호의 날카로운 눈빛이 떠오른다. 범인은 객석에도 숨어 있고 우리집에도 숨어 있지만 가장 보이지 않는 범인은 내 안의 또다른 나이다. --<악의 평범성 1> 전문/이산하/『악의 평범성』/창비 넓은 운동장에 신참 훈련병들이 예쁜 토끼들과 놀고 있는데 갑자기 교관들이 뛰어들어 칼로 토끼들의 목을 잘랐다. 그러고는 토끼들의 껍질을 벗겨 배를 가르고 내장을 꺼내 훈련병들에게 던졌다. 어린 병사들이 내장을 장난감으로 갖고 놀도록 명령했다. 명령은 날마다 반복되었고 나중에는 훈련병들 스스로 토끼들의 뱃속에 칼을 담가 노를 저었다. 미군 병사들이 베트남전쟁 투입 전에 받은 이 담력훈련을 ‘토끼훈련’(rabbit lesson)이라고 불렀다. 베트남의 수많은 학살은 우연도 실수도 아니었다. --<토끼훈련> 전문/이산하/『악의 평범성』/창비 #악의 평범성이란 철학적 용어(한나 아렌트를 가리키며 언급하는)가 아니다. 잔인함도 아니다. ‘평범성’이다. 인간의 평화로운 일상과 현재적 삶으로의 놀이터처럼 기능하고 있는 페이스북을 통해 노출되고 있는 오늘 이 시간의 ‘정상적 평범성’이다. 그러나 정상인가? 평범한가? 내 존재의 평범성과 악의 평범성은 어떻게 같거나 다른가? 우리는 다함께 「다음 소희」 영화를 봤다. 그들에게 ‘소희’는 착한 딸, 책임감 강한 제자, 그리고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해 직업을 소개받고 열심히 근무하는 여고생이다. 소희는 자존심 상하게 하는 고객을 달래고, 계약을 해지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오는 고객들의 마음을 돌려 재계약하게 하는 콜센터 실습여고생이다. 최고의 통화기록과 고급한 성취율에 올랐던 즈음, 고객들은 해지할 권리가 있다, 라고 생각하는 소희는 해지를 받아준 순간 회사의 해충이 된다. 소희에게 ‘전화’는 걸려오는 단순한 통화의 도구가 아니라 스스로의 노력만큼 보수를 높여주는 ‘노동의 성취 도구’이며 회사를 견인하는 탱크의 바퀴인 것이다. 끝없는 전화... 끝없는 설득...끝없는 폭력적 대꾸를 통해 얻어지는 노동력 평가, 그러나 월말의 결산 결과는 그 행위의 대가가 아니라 거대 자본의 노략질에 다름 아니다. 현대 자본은 더욱 견고하게 노동을 착취하고 입막음하고 그러므로 악하다. 그 ‘악’의 연대는 자본뿐만 아니라 소희를 그 현장에 보낸 학교 선생님, 학교 게시판을 가득 채운 취업률, 취업과 취업률과 학교의 미래 비젼과 상위 기관의 조종이 영화 화면을 숫자로 채운다. 숫자의 평범성! 피타고라스의 현현들이 21세기의 숫자를 신으로 받든다. 그 숫자판 안에 갇힌 수많은 소희들... ...‘소희의 평범성’ ‘악의 평범성’은 우리가 끊임없이 달성하고자 하는 숫자(자본)속으로 매몰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평범성이 아니라고? 소희를 던져버린 숫자! 거대한 빅데이터! 우리에게 아름다움이란 생명인가 숫자인가! #인간과 토끼가 죽어가고 있다. 역사의 토끼는 이미 충분히 죽었으나, 살아가고 있는 존재 핏빛 동백으로 떨어져가는 젊음, 악의 평범성 속에서 지금도 ‘다음 소희’들은 숨 막히다. 카나리아의 마지막 변명조차 들리지 않는 깊고 어둔 갱 속에서 잠수함 속의 토끼처럼 숨죽인 시간은 흘러가고 있다. #아우슈비츠의 시간만이 악의 평범성을 대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를 둘러싼 사건들과 내 안에 똬리 틀고 있는 악의 평범성을 건드릴 수 있는 눈빛, 그것이야말로 시의 비범성이다. 시는 평범성과 비범성을 두루 어깨동무하며 은유와 상징의 한 획을 긋는 현재적 표현방식이다. 시여 악을 부수는 악으로 가자 시는 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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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月은 갈아엎는 달이민숙 샘뿔인문학연구소 소장 시인 내 고향은 강 언덕에 있었다. 해마다 봄이 오면 피어나는 가난. 지금도 흰 물 내려다보이는 언덕 무너진 토방가선 시퍼런 풀줄기 우그려놓고 있을 아, 죄 없이 눈만 큰 어린 것들. 미치고 싶었다. 四月이 오면 山川은 껍질을 찢고 속잎은 돋아나는데, 四月이 오면 내 가슴에도 속잎은 돋아나고 있는데, 우리네 祖國에도 어느 머언 心底, 분명 새로운 속잎은 돋아오고 있는데, 미치고 싶었다. 四月이 오면 곰나루서 피 터진 東學의 함성, 光化門서 목 터진 四月의 승리여. 江山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출렁이는 네 가슴만 남겨놓고 갈아엎었으면 이 균스러운 부패와 享樂의 不夜城 갈아엎었으면 갈아엎은 漢江沿岸에다 보리를 뿌리면 비단처럼 물결칠, 아 푸른 보리밭. 강산을 덮어 화창한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그날이 오기까지는, 四月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四月은 일어서는 달. --<四月은 갈아엎는 달> 전문/신동엽/ 1960년대 신동엽의 사월은 갈아엎지 않으면 안 되는 썩은 역사의 사월이었다. 3월에 터진 함성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갈수록 태산, ‘새로운 속잎’이 돋아나는 3월을 외면하고 ‘무너진 토방가선/시퍼런 풀줄기 우그려넣고 있을/아, 죄 없이 눈만 큰 어린 것들’의 아프고 가난하여 서러운 봄이었다. 그 배고픔에 덧대듯 어지러운 땅덩어리의 봄이었다. 얼마나 안타까운 날들이었으면 ‘미치고 싶었’을 것인가! 터져오던 곰나루의 ‘피 터진 동학의 함성’은 들려오지 않고, ‘진달래는 피어나는데’ 녹두꽃 피었다는 소식은 들려올 듯한데... ... 녹두장군의 기개로 일으켜 세워야 할 그 함성이 들려올 봄인데... ...우리 시대의 봄은 어떤 봄인가, 여전히 캄캄한 봄날, 진달래 눈부신 역설의 봄날이다. 그리하여, 21세기! ‘그날이 오기까지는, 四月은 갈아엎는 달’ ‘그날이 오기까지는, 四月은 일어서는 달’ 동학의 처녀가 되어 동학의 들판에 서서, 백두 한라의 정신으로 무엇을 갈아엎어야 하는지 물어야 한다. 묻다보면 펼쳐지리라. 올곧은 질문 앞에 놓일 우리 삶의 환한 길, 그러나 진정 그날이 오기까지는 갈아엎어야 한다. 일어서야 한다. 히어리 피어나는 조계산 접치재에 노란 꽃등이 길을 밝힌다. 노란빛 꽃들이 더 광활하게 산천을 밝히고 있다. 산수유 생강나무 민들레 노랑제비꽃... ...그러나 세계는 피맺힌 겨울 동토일 뿐, 결코 정신의 객토는 요원한가. 이제 곧 갈아엎어야 할 그 ‘사월’이다. 4.3, 4.16, 노랑나비여 노란 자유여 더 멀리 더 높이 날아올라라 어기찬 자존으로! 삶이란 단순한 시도 아름다운 노래도 아니다. 신동엽의 그 4월을 건너 우리의 4월을 맞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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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 너머 인간, 빨강의 미학이민숙 샘뿔 인문학 연구소 소장, (시인) 해마다 이맘때면 이곳저곳에서 그 해의 결산들이 쏟아져 나온다. 살아온 시간은 늘 몇 편의 시와 몇 편의 수필, 소설 등으로 한 해의 문을 닫기 위해 또는 새해로 건너가기 위해 문집 하나를 가름하고 친한 사람들이나 보이지 않는 독자를 향해 더 깊은 이야기꽃을 피운다. 우리에게 문학이란 무엇인가? “작가가 된다는 것은, 인간의 내면에 숨겨진 제2의 존재와 그 존재를 만들어낸 세상을 인내심을 가지고 오랜 세월 동안 노력하여 발견하는 것입니다. ... ... 방안에 틀어박혀 책상 앞에 앉아서 홀로 자신의 내면으로 침잠하여 단어들로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이... ...” 터키의 작가 오르한 파묵은 “변함없는 열정으로 같은 말(馬)을 수없이 그리다보니 아름다운 말을 눈 감고도 그릴 수 있게 된 이란의 옛 세밀화가들을 묘사하면서 저는 이것이 작가라는 직업과 저 자신의 삶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라고 고백한다. 파묵의 명저 『내 이름은 빨강』에는 예술가의 삶과 애증의 문제, 예술작품에 깃든 애환과 삶의 빨간 열정에 대해 묘사되어있다. 예술은 전통을 계승할 뿐 아니라 그것을 깨트릴 줄 아는 용기도 동반될 수밖에 없는데 시대는 물질과 정신 속에서 고민하는 예술가 사이의 갈등을 간과하지 않는다. 서로를 인정하며 앞서고자 하고 질투하며 죽이고 죽는 극한의 대립을 표현하면서 ‘파묵’은 그 사이에 사랑을 놓는다. ‘사랑’은 그리하여 무엇을 남기는가? 아니 사랑보다 더 소중한 어떤 것이 있다는 것인가? 빨강! 그것은 ‘탄생의 빨강’이며 질투 속에서 동료를 죽이고 마는 ‘살인자의 빨강’이며 죽어가는 자가 삶을 마지막 고통 속에서 느끼는 ‘피의 빨강’이다. 그런 와중에 죽어버린 남편을 기다리는 애절한 여인이 전통 속에서 새롭게 찾아든 첫사랑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절체절명의 ‘빨강’이기도 하다. 작품 속에서 ‘빨강’은 말한다. “나는 빨강이어서 행복하다. 나는 뜨겁고 강하다. 나는 눈에 띈다. 그리고 당신들은 나를 거부하지 못 한다. 나는 숨기지 않는다. 나에게 섬세함은 나약함이나 무기력함이 아니라 단호함과 집념을 통해 실현된다. 나는 나 자신을 밖으로 드러낸다... ... 내가 칠해진 곳에서는 눈이 반짝이고, 열정이 타오르고, 새들이 날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나를 보라, 산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를 보라 본다는 것은 또한 얼마나 아름다운가!” 파묵의 좀 더 절실한 글에 대한 열망은, 자신이 태어난 터키와 자라온 고향 이스탄불이 세계의 중심부가 아니라 중심부 바깥에 있었고 자기 자신 또한 변방주의로 몰림 받았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인 자신을 통해 거대한 반전, 소설적인 어떤 위대한 변화를 이뤄내고자 노력했다고 쓰고 있다. 파묵은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아버지의 여행 가방’이라는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 속에서 아버지가 평생 지니고 살았던 ‘변방의식’을 통해 그 의식을 극복해야 하며 변방에서 느끼는 고독과 과거에 대한 굴욕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을 언급한다. 그것으로 인해 전락하고 말 존재에 대한 두려움과 주변에 대한 분노가 글을 쓰게 만들었지만 마침내 많은 사람들의 찬사와 영광 속에서 기억될 것이라는 믿음, 낙관이 한 존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성공은 낙관에 의한 결과물입니다.” “저의 세계는 터키라는 민족적인 세계와 서양 세계가 혼합된 것입니다.” 파묵이 극복하고자 하는 마음속에는 낙관과 부정적 세계관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파묵은 “모든 것을 향한 멈출 수 없는 호기심과 읽고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 있었음에도 예술가에게는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고 희망도 주지 않는 나라라는 인식 아래 그것을 없애야겠다는 스스로의 다짐 “질투”도 마다하지 않고 그 내적 혼란을 불식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한다. 한 편의 시 속에는 이렇듯 세계가 소용돌이친다. 그렇지 않다면 무슨 의미인가. 그 세계 속 중심에 시인 자신이 자리하는 것이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스스로의 시간’속에서 ‘빨강’을 느끼는 일, 그리하여 한 삶의 ‘낙관’과 ‘희망’을 창조하는 일이 한 권의 책으로 마무리하는 의미가 된다면 뭘 더 바랄까! 그렇게 ‘빨강’과 ‘사랑’이 한통속으로 놀다보면 질투를 넘어서서 슬픔을 넘어서서 환한 햇살로 펜을 잡았던 손끝도 더 뜨거워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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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습관, 날마다 즐거운 날이민숙 샘뿔인문학 연구소 소장, 시인 모든 인간의 삶은 습관의 결과물이다. 인식과 병행한 습관도 있고 자신도 모르게 길들여진 습관도 있다. 아침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직장에 나가고, 귀가하여 쉬고 잠을 자고 또... ... 그 뿌리는 어디에 있을까. 이 우주를 느끼기 전, 아니 그 지식을 통해 우리의 삶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리기 전부터 우리는 태어나는 생명체로서의 습관을 갖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의 DNA는 가장 피동적으로 주입된 그러나 가장 강력한 습관의 집적물일 것이다. 그러니 삶이란 책임 질 수 있거나 책임 지지 않거나 그러한 과정 속에서 끝없는 길을 가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약 250만년 전 인간이 도구를 만들었다는 첫 증거가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인간은 맨몸의 성자가 아니다. 포유동물인 인간은 직립보행의 결과 이른 출산의 운명을 타고 태어났고, 미숙했고, 다른 동물에 비해 가장 긴 교육의 기간을 거쳐 성숙해진다. 그 결과물이 사회화할 수 있는 기간의 늘어짐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출현한 기간이 10만 년이라고 상정한다면 거의 200여만 년이 스스로의 사색의 능력 없이 물려받은 동물적 기능으로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만이 가장 짧은 역사 속에서 가장 혁명적으로 변화를 만들었다고 하는 예측이 유효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짧은 시간 속의 변화는 위대하다! 현대인에게 가장 강력한 도구는 오늘 자신이 갖고 있는 습관이다. 습관은 길고 변화는 짧다! 어떻게 이 짧은 시간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변화를 만들 수 있을 것인가.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의 저자 스티븐 코비는 습관 형성의 세 요소를 이렇게 분석한다. 의욕(desire), 지식(knowledge), 기술(skill). 습관에 주목하는 첫째 이유는 '좋은 습관'에 대한 관심 때문인데, 스스로의 습관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어떤 패러다임을 갖고 있는가를 인지하는 게 첫째 요인이다. 무엇을 의욕하고 있는가. 왜 의욕 했는가. 그 의욕의 결과는 어떤 과정 속에서 쟁취되는가. 과정이 바로 지식이다. 우선 '나'를 알아야 한다. 그다음 나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 '방법'에는 무수한 요소가 있는데 그러한 요소를 하나하나 관찰하고 인지하고 행동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행동'이야말로 '기술'이다. 인간의 의욕은 무의식적이다. 왜? 사피엔스의 10만년, 아니 도구사용의 250만년이 개인의 탄생의 비밀로 새겨져 있을 테니 말이다. 우리에게는 도구가 있다. 그것이야말로 습관을 좌우하는 비장의 무기라고 할 수 있겠다. 자연이라는 도구, 문명이라는 도구는 우리 삶의 가장 명백한 지배자다. 하늘과 땅 물과 바람, 그리고 나를 존재케 하는 핏줄의 비밀, 나를 웃고 울게 하는 친구들, 나를 절망케 하는 철학적 담론, 나를 전율케 하는 예술작품들, 오늘도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한 편의 시! '습관이 바뀌면 인생이 바뀐다' 식상할 정도로 흔히 듣는 말이다. 그러나 진정 사소한가? 그 습관은 대단히 과학적인 산물이기도 하다. 습관은 대를 이어 흐를 정도로 강력하다. 내 좋은 습관은 나도 모르게 내 아이들에게 대물림된다. 그러나 알고보면 스스로 좋지 못한 환경을 버리고 더 좋은 습관과 더 좋은 환경을 만들어온 경우는 아주 많다. 대물림된 환경은 내가 선택한 게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어린 시절의 간절한 '희망'을 통해 스스로 더 훌륭한 자신의 미래를 창조할 수 있는 유일한 동물종인 것이다. 지금 누군가가 가장 순수한 마음으로 자신의 내일을 희망한다면 그건 가장 아름다운 '의욕'이 될 것이며 가장 합리적인 '지식'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며 가장 역동적인 '기술(관계며 준칙)'도 스스로 빛을 만들며 다가올 것이다. 찾고자 한다면 우리를 도울 '멘토'는 주변에 널려있다. 가장 흔히 도움 받을 수 있는 게 '멘토의 왕인 책'이다. 아무도 혼자서는 성공할 수 없다. 칡뿌리처럼 인간을 휘감고 있는 습관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완강함은 그러나 끊지 못할 바는 아니다. 간절히 원하면 길거리에 채이는 돌멩이보다 더 흔한 게 '멘토'다. 오라 내게로! 멘토들은 기다리고 있다. 습관을 혁명할 한 뜨거운 인간을! 성공한 사람들의 88%는 하루 30분 이상 책을 읽었다. 그들이 읽은 책의 장르 중 50%가 역사책이다. 역사책 속에는 무수한 지혜가 있다. 현재의 사회적 이슈를 분석, 선택, 행동할 수 있는 풍부한 지적 에너지가 살아있다. 문학도 역사를 벗어날 수 없다. 책만큼 인간의 에너지를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는 건 운동이다. 그리고 질 좋은 수면도 한 몫 한다. 습관의 스펙트럼은 복합성의 단순성이다. 자신의 일상적 관계를 돌아보면 알 수 있다. 당신과 친한 그(그녀)는 긍정적인가? 좋은 습관(책읽기 운동하기 봉사하기)을 가지고 있는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가 원만한가? 열정을 지닌 사람인가? 책임감이 강한 사람인가? 영감을 주기를 좋아하는가? 가장 가까운 사람을 충분히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그와 더불어 21세기 한 가지 보태야 할 화두는, 자연을 아끼고 사랑하는가? 소비에 깐깐한 사람인가? 겸손한가? 내 개인적 글쓰기의 멘토는 참으로 많다. 그 중 한 사람이 조지 오웰이라 할 수 있는데 그는 글쓰기의 이유(욕구)를 단순화시켜 네 가지로 요약한다. 1.순전한 이기심-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사후에 기억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 2. 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3.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 4.정치적 목적 -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그는 말했다. 그 시대가 평화로운 시대였더라면 화려하거나 묘사에 치중한 책을 썼을지도 모르며.... ...그러나... ...그는 그럴 수 없었다. "내가 맥없는 문장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 에세이 <나는 왜 쓰는가>에서 오웰은 그렇게 마지막 문장을 마무리한다. 글이란, 습관이란, 역사성이란, 우리에게 삶의 참된 의미를 찾아 하루의 진정성 위에서 일어나고 행위하고 땀 흘리는 행동의 산물에 다름 아니라고 말 할 수 있다. 인간의 뇌는 다행히도 대단히 단순해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들을 켜켜이 착실하게 시냅스 속에 저장한다고 한다. 그 사람을 만났을 때, 스스로 내 자신을 바라보며, 아침 일찍 하루를 시작하면 된다. 한 구절의 아름다운 글을 적고 즐겁게 "일일시호일(日日是好日)" 나를 견인해 줄 문장은 내가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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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에 대하여이민숙 여수 샘뿔인문학연구소 소장, 시인 몇 년 전 몽골에 처음 발을 딛고 난 후, 다시 한 번 몽골 여행을 다녀온 후, 무슨 이유인지 그 어떤 곳보다 더 또다시 가고 싶은 곳이 된 몽골, 세 번째 여행을 앞두고 있다. 왜일까?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토록 끌리는 이유는? 금세 머리를 개운하게 정리해주는 것, 간단하다. 한없이 넓은 초원과 그 맑은 하늘과 달빛과 별빛이다. 광활함에 대해 막연한 동경을 하게 된 건 어릴 적 읽었던 시 <광야>를 통해서였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데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광야>/이육사/1945년/ 국어시간에 교과서를 통해 배웠지만, 단박에 반해버린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한없는 동경의 언어들 때문이었으리라. 광야의 아득한 이미지와 처음 하늘이 열렸을 그 때의 신비, 첫사랑의 어린 소녀가 가슴을 졸이며 읽고 또 읽었던 시, 쓰고 또 써가며 외웠던 시. 몽골에 처음 닿았을 때의 느낌은 딱 육사의 <광야>에서 맡았던 그 향기였다. 백마 타고 오는 초인처럼, 몽골의 말들은 기름진 꼬리를 반짝이며 초원을 가득 누비고 있었다. 한겨울에 보았던 몽골말들은 말 그대로 경이로움이었다. 그 추운 날, 영하 40도의 겨울에 미동도 없이, 아니 유유히 걷거나 달리거나 풀을 뜯어먹거나 아무런 두려움 없이 그 시간과 공간을 즐기고 있었다. 그 말들의 풍경 사이로 보름달이 떠오르고, 분명 저 먼 곳으로부터 초인은 달려오고 있으리라! 육사처럼 조국을 잃어버린 처절함과는 다른 마음이었지만 분명 그 말들은 한겨울이라고 하기 어려울만큼 미동조차 없는 거대한 생명력으로 영하 40도의 추위를 거뜬히 건너가고 있었다. 천지간, 지구가 오염되어 몸살을 앓고 있는 21세기, 몽골은 누가 살고 있는지, 언제부터 살아왔는지, 서로가 만나 이야기라도 나눌 수 있는 것일까 할 정도로 끝없이 광활한 초원 지대에 띄엄띄엄 보이던 게르......산도 강도 사막도 더 이상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원시의 그 비릿한 첫 풍경들 그대로였다. 첫사랑 아니라고 말 할 수 없었다. 인간과 인간 아니라도 첫사랑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 몽골은 내게 온 사랑의 순정이었다. 그 땅과 하늘과 풀과 흰눈의 천지와 봄 몽골의 그 빗방울까지, 첫사랑의 시어들이 가득히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시를 쓰고 또 썼다. 시란, 첫사랑이 아니면 안 된다. 썼던 과거의 글자들로 엮어진 구태의연은 시가 될 수 없다. 내 생애 어느 첫겨울 첫 하늘 아래 설원은 흰 다이아몬드로 빛나고 첫 태양이 첫눈을 비춘다 모든 건 끝없는 '첫'이다 첫 만남이다 첫새벽 첫 놀라움 첫 발자국....... 시 <첫편지> 부분 /이민숙 몽골은 처음 가도 첫사랑이요 또다시 가도 첫사랑이요, 늘...가고 또 가도 첫사랑일 것 같다. 더 많은 기억들은 다 잊어버리고 그 한없는 원시의 풍경들과 그 드넓은 초원의 바람과 말들과 소떼 양떼와 더불어 자연을 사는 몽골인들의 시공간을 나는 맛보고 왔으므로, 답답한 도시의 연기 같은 일상을 순수로 되돌려 살아갈 수 있을 것 같다. 이번 여행 역시 몽골 그 자체일 뿐만 아니라 가장 빛나는 첫 경험의 시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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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아름답습니다이민숙 샘뿔인문학연구소 소장 (시인) 연꽃의 꽃말은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순결' '신성' '청정'이라고 합니다. 연꽃 한 송이에는 우주가 있습니다. 연꽃 한 송이에는 사랑이 있습니다. 연꽃 한 송이에는 그리움이 있습니다. 연꽃 한 송이에는 억겁의 인연이 있습니다. 결코 소리내어 웃지 않는 웃음이 있습니다. 염화미소는 연꽃의 연민이요 빛이요 고통이며 이 세상에 태어나 짊어지게 된 업보로부터의 깨달음입니다. '가섭과 세존'의 신화 속에는 그 둘의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우정이 존재합니다. 오래토록 만났지만 한 순간의 오해로 깨지는 우정이 있는 반면 지금 이 순간 만나서 영혼의 화통을 느끼며 서로의 존재를 일치시키는 마음, 일체유심조, 이심전심으로 하나가 되는 존재도 있습니다. 그러나 일체유심조가 무엇인가요, 한 순간에 금가는 우정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마음이니까요. 당신과 나는 누구에게나 아름다운 존재니까요. 환한 꽃이 있습니다. 연꽃은 그러나 환하지만은 않습니다. 귀한 꽃입니다. 연꽃은 그러나 귀한 것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깊은 연못은 진창이며 목숨들이 피었다 져버린 뒷골목 두려움이나 상처, 존재의 원형적 역설이 끝없이 추락하며 비밀스러운 생명을 잉태시키는 곳입니다. 아...그 열망의 핏빛 절망들을 피워내는 연지(蓮池)는 얼마나 긴 긴 시간의 환생(還生) 터란 말입니까. 도저히 건져 올릴 수 없는 불가능의 운명 속에서 연꽃은 피어납니다. 어쩌면 바리데기가 저승길의 무한 역경을 헤치고 돌아와 부모를 살려내는 그 순간처럼, 연꽃은 인간의 의지 바깥에서 인간의 의식 속으로 들어와 무한절망까지도 품어 안도록 하는 신화 아닐까요. 부처의 염화미소는 왜 연꽃 속으로 인간을 끌어당겼을까요. 연꽃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의 삶이 하찮아집니다, 뭐라구요? 하하 아닙니다. 그렇다가도 내 목숨이 일순 대단해집니다. 이 꽃을 보려고 나는 태어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말입니다. 해마다 7월이면 연꽃의 절정을 알리는 절친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꽃이면서 꽃으로 해석할 수 없는 그 어떤 무위의 순간들이 연꽃을 만나는 숨막히는 감동의 순간입니다. '절정'과 '절친'은 낱말도 닮았습니다. 절박한 에너지를 품고 있습니다. 그의 초대장 덕택에 칠월의 마음은 피고지고 피고지는 영원의 연밭입니다. 칠월 첫 날, 아침 연꽃을 만나고 분홍빛 웃음을 머금고 돌아오는 길인데 눈에 적개심이 가득한 고양이가 내 앞에 딱 버티고 서 있다 실오라기만한 적개심조차 없는 나는 고양이가 자세를 풀 때까지 기다려줄 마음이다 나는 분홍빛 웃음을 지어 보인다 고양이는 웃음을 받아줄 마음이 없는지 쌩 하니 어디론가 가버린다 고양이가 사라진 허공을 향해 나는 한 번 더 웃음을 지어준다 더할 수 없는 애정을 담아서 칠월의 신부가 내게 그랬듯이 --<칠월의 신부> /안준철/ 카페 다음/ [사람의 깊이] 칠월의 신부는 핑크빛 연꽃의 바다에서 만난 그녀입니다. 신부의 순결과 사랑이 가득한 아침에 함께 만난 적개심의 고양이, 그러나... ... 더할 수 없는 애정을 담아서 웃어줍니다. 칠월의 신부는 그 어떤 궂은 얼굴에도 웃음을 보냅니다. 험한 적개심의 먹구름에게도 웃음을 보냅니다. 부처는 그 얼굴의 웃음을 알아챕니다. 염화미소, 칠월의 신부와 신랑은 그 웃음으로 만나 천생연분의 사랑을 풀어갑니다. 세상이 고통으로부터 풀어져 연꽃의 강물을 이룹니다. 사랑이란 다가가는 것 아침 연지의 한 송이 연꽃 앞에 한 발짝 한 뼘 더 다가가 네 숨결과 맥박 그 심장의 울림 온 존재 기울여 그리 또렷이 듣는 것 몸이 멀다면 마음으로 더 오롯이 --<애련일지 16, 사랑이란> /이병철/페이스북/ 온 마음, 온몸, 심장의 울림과 숨결과 맥박으로 다가가는 것, 아침 연지의 한 송이 연꽃 앞에 또렷이 온존재 기울여 듣는 것... ...사랑! 그런 당신은 아름답습니다. 연꽃으로 핀 당신의 마음이 오롯이 제게로 와서 환합니다. 이 거친 세상의 한밤을 지새운 저의 영혼은 이 아침 설렘으로 두근거립니다. 당신이 들어주는 고통의 하루하루가 이젠 더 이상 고통이 아닐 것을 믿습니다. 연꽃의 7월은 이제 7월을 넘어 삶의 끝 벼랑까지 가슴의 사랑을 견인해 줄 우리의 본성 속 부처로 환생할 것입니다. '본성을 바로 보면 부처가 된다(견성성불 見性成佛)' 오늘은 우리 서로 부처가 되는 날! 내 안의 연꽃에게 한 뼘 더 다가가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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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과 진실, 칼릴 지브란 --『아홉가지슬픔에관한명상』을 읽고이민숙 샘뿔 인문학 연구소 소장, 시인 **그의 마음을 구성하는 원소들로부터 공감과, 존경심과, 그리움과, 참을성과, 뉘우침과, 놀라움과, 용서하는 태도를 뽑아내어 그것을 하나로 합성시킬 수 있는 화학자라면 ‘사랑’이라고 일컫는 원자를 창조할 능력을 갖게 될 것이다. --인문학의 궁극은 사랑이다. 아니 삶의 궁극은 사랑이며 사람이다. 그 안으로 들어가 보면, ‘공감, 존경심, 그리움, 참을성, 뉘우침, 놀라움 그리고 용서하는 마음’이 있다. 우리가 읽어온 책들의 작가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그 어려운 이야기들...아니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어딘가로 굴러가고 말아서 손바닥을 펴서 보여줄 수 없는 내 일상의 발자국, 그것의 종착지엔 무엇이 있는가? **이집트의 피라밋들이 자취도 없이 무너지고 뉴욕의 마천루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 다음이라고 할지라도 나비는 들판 위에서 팔랑거리며 돌아다니기를 계속할 것이고, 풀밭에서는 이슬방울들이 여전히 반짝이리라.--이 지구상의 영원성은 인간의 문명을 등에 업고 세워진 거대한 구조물이 아니라, 새벽이면 풀잎 끝에 달랑거리는 물방울로 살다가 아침 햇살에 사라지는 이슬방울들인 것이다. 나비같은 존재들, 영원이란 어디에 있는가? **우리들의 가장 나쁜 결점은 다른 사람들의 잘못에 대한 선입견이다.--내가 해 온 말과 행위들 중의 가장 나다운 것은 ‘다른 사람’을 읽는 태도일 것이다. 특히 그 사람의 잘못을 들추어내며 웅변하는 나의 내면에는 얼마나 엄청난 ‘선입견’의 블랙홀이 자리하고 있는가? **내 생각은 추상의 세계에서 오고 내가 하는 말은 연관성의 세계로부터 오기 때문에 나는 오류를 범하지 않고는 결코 얘기를 할 수가 없다.--내가 갖고 있어서 표현하게 되는 나의 생각의 원천이 있는가? 그것은 실재하는가? 내가 게거품을 물고 하는 말들의 세계는 어디로부터인가? ‘너와 나’의 관계 아니라면 우리가 던지는 말이 무슨 근거를 갖게 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말의 진실성을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저 세계의 오염된 가치관이 혹 내 말의 구조를 떠맡고 있지는 않은가? **가난은 일시적인 결함이지만, 지나친 부유함은 영원한 질병이다.--부와 가난의 어깨춤에 대한 몇 가지 오해랄까? 무엇이 결함이고 무엇이 질병인가? 왜 지나친 부유함은 질병의 상태로 전락했는가? 세계는, 부의 창고로부터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 세계는 자본가들의 정신병적 칼춤을 맞고 피흘린다. 영원히 치유될 수 없는 부! 가난을 책임질 수 있는가? 생명은? **의로운 자는 사람들의 마음과 가깝지만, 자비로운 자는 신의 마음과 가깝다.--정의로움, 자비로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은 우리가 추슬러야 할 마음은? **그들이 나에게 말했다. “만일 잠든 노예를 발견하면 그를 깨우지 마세요. 그는 자유를 꿈꾸고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내가 대답했다. “만일 잠든 노예를 발견하면 그를 깨우고 자유에 대해서 그와 얘기를 나누어야 합니다.”--노예여 잠에서 깨어나라! 누가 그대의 현실 속에서 그대의 꿈인 ‘자유’를 책임질 수 있다는 말인가? 꿈을 꾸는 것보다, 그 꿈을 가져와 장난이라도 치며 이야기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자유’! 그대는 자유롭게 살고 있는가? **썰물 때 나는 모래밭에다 글을 한 줄 써놓고 그 글에다 내 모든 마음과 내 모든 영혼을 바쳤다. 내가 써놓은 글을 읽어보려고 밀물 때 돌아와 보니 바닷가에서는 나의 무지만이 보일 따름이었다.--바닷물에 적셔진 내 마음의 글, 어디까지 썼으며 그것은 나의 진정한 글인가? 밀물 때면 지워져버린다 해도 내 마음은 기억이나 하고 있는가? 글 속에 내 영혼 모두를 바쳤건만, 왜 금세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굶주린 야만인은 나무에서 과일을 따서 그것을 먹는다. 개화된 사회에서는 배고픈 시민은 나무에서 과일을 딴 사람에게서 그것을 산 사람에게서 그것을 산 또 다른 사람에게서 그것을 산다.--야만의 시대의 과일 나무가 그립다! 내가 스스로 따먹을 수 있는 과일은 어디에? **노래 부르기를 스스로 즐거워하기 전에는 노래를 부르는 사람은 그대를 기쁘게 해 줄 수가 없다.--모든 삶의 즐거움이 그대의 것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그대를 즐겁게 해 줄 수가 없다. 그 노래의 핵, ‘예술’이라면? 시와 음악과 그림과... ...그것들을 즐길 수 있는 마음의 색채, 그대는 무슨 색으로 살고 있는가? **그대는 이미 이루어진 바를 향상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아직 이루어야 할 바를 향해 손을 뻗음으로써 발전하게 된다.--지금의 시간과 이곳의 공간이 우리 삶의 중심이다. 이루어낸 어제는 내 삶의 근원에서 이미 사라졌다. 아직은 미지의 세계, 그곳으로 나아가라! 어떻게? **시는 마음속의 불꽃이고, 수사학은 눈송이이다. 불길과 눈이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겠는가?--불꽃처럼 사는 시인이여! 시를 살아라. 언어는 껍데기일 뿐이니! **시는 전체에 대한 이해이다. 부분 밖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대는 어떻게 그것을 전할 수 있겠는가?--삶의 예술이란, 나뭇잎 하나에 들어있는 한 낱말의 언어가 아니라, 숲속에 녹아있는 생명의 오케스트라, 전체와 부분은 서로를 감싸안고 밤새 노래한다. 한 뿌리와 한 나뭇가지와 한 꽃과 그것을 떨어뜨리는 바람은 숲을 흔든다. 그 흔들림에 우주가 흔들린다. 산다는 것, 시를 쓴다는 것, 시를 읽는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사소한 웅대함인 것이다. 시어 하나가 우주로부터 왔음을 이해하는 것, 어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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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치의 노래, 정태춘, 그리고 네루다이민숙 여수 샘뿔 인문학연구소 소장 (시인) ‘메타포’는 시인의 무기인가, 노래를 만난 가수의 영감인가, 어제 내가 본 영화는 현재의 한 언어를 잉태하게 할 수도 있는, 나에겐 하나의 메타포였다. 그는 어느 날, 아무런 생각도 없이 노랫말을 썼고 노래를 만들었고 불렀고 가수가 되었다. 그리고 시대는 그를 불의의, 아픔의 한복판으로 떠메고 갔다. 떠멤을 당한 가수는 시대를 더 똑바로 보았다. 더 가슴 아픈 노래를 만들어 불렀다. 그러나 아프자고 부르는 최루성 노래는 분명 아니다. 영화 보는 내내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기 어려웠지만 메타포 아닌 직설어법도 지금 와서는 분명 우리에게 하나의 메타포로 남아 또다른 메타포를 만들어낸다. 그런 것이다. 예술이란. ##모두 우산 쓰고 횡단보도를 지나는 사람들 탑골공원 담장 기와도 흠씬 젖고 고가 차도에 매달린 신호등 위에 비둘기 한 마리 건너 빌딩의 웬디스 햄버거 간판을 읽고 있지 비는 내리고 장마 비구름이 서울 하늘 위에 높은 빌딩 유리창에 신호등에 멈춰서는 시민들 우산 위에 맑은 날 손수건을 팔던 노점상 좌판 위에 그렇게 서울은 장마권에 들고 다시는 다시는 종로에서 깃발 군중을 기다리지 마라 기자들을 기다리지 마라 비에 젖은 이 거리 위로 사람들이 그저 흘러간다 흐르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냐 우리들의 한 시대도 거기 묻혀 흘러간다 저기 우산 속으로 사라져 가는구나 입술 굳게 다물고 그렇게 흘러가는구나 비가 개이면 서쪽 하늘부터 구름이 벗어지고 파란 하늘이 열리면 저 남산 타워 쯤에선 뭐든 다 보일 게야 저 구로 공단과 봉천동 북편 산동네 길도 아니 삼각산과 그 아래 또 세종로 길도 다시는 다시는 시청 광장에서 눈물을 흘리지 말자 물대포에 쓰러지지도 말자 절망으로 무너진 가슴들 이제 다시 일어서고 있구나 보라 저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빨간 신호등에 멈춰 섰는 사람들 이마 위로 무심한 눈빛 활짝 열리는 여기 서울 하늘 위로 한무리 비둘기들 문득 큰 박수 소리로 후여 깃을 치며 다시 날아오른다 하늘 높이 ---5.18 민주화 42주년에 불렀던 노래 -<92년 장마, 종로에서>/정태춘 <92년 장마, 종로에서> 뿐만 아니라 그 앨범에 수록된 거의 모든 노래가 그랬다. 시대의 암울했던 정황들이 가득찬 노래들....<양단 몇 마름>, <저 들에 불을 놓아>, <비둘기의 꿈>, <이 어두운 터널을 박차고>, <LA 스케치>, <나 살던 고향>... ... 그의 노래들은 한결같이 그런 그런 삶의 응어리들이며 시대의 초라함, 더 큰 비참이 등장한다. 시인이 그렸던 풍경들과 어우러진 노래의 선율은 무엇이 언어이고 무엇이 시대의 실상인지 가름할 수 없는 메타포의 웅숭깊은 별빛들이다. 빛난다 바다의 빛! 하늘과 인간이 한통속으로. 그 안의 인간들인 우리는 이 시대, 그 장마를 맞이하며 그 빗소리의 언어를 박수 치며 하늘 높이 날아오를 꿈, 시청 광장에 모이지 않아도 될, 물대포에 맞아서 죽지 않을... ... 그런 시대를 살 수 있는가. 참 아득한 봄날이다. 산티아고의 절세 미인들과의 사랑을 꿈꾸는 마리오는, 네루다의 우편배달부에 등장하여 그 엄청난 우편물을 배달하느라, 실업의 권태를 겨우 벗어난 그 남자 마리오는 네루다를 만난 어느 날 어지럼증에 휘말린다. 그를 어지럽게 만든 건 메타포! ##“여기 이슬라 네그라는 바다, 온통 바다라네./순간순간 넘실거리며/예, 아니요, 아니요라고 말하지/예라고 말하며 푸르게, 물거품으로, 말발굽을 울리고/아니요, 아니요라고 말하네./잠잠히 있을 수는 없네./나는 바다고/계속 바위섬을 두드리네./바위섬을 설득하지 못할지라도./푸른 표범 일곱 마리/푸른 개 일곱 마리/푸른 바다 일곱 개가/일곱 개 혀로/바위섬을 훑고/입 맞추고, 적시고/가슴을 두드리며/바다라는 이름을 되풀이하네.”--『네루다의 우편배달부』/안토니오 스카르메타/--에서 시를 들은 마리오는 외친다. “... ...제가 마치 선생님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같았어요.”....“내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네루다는 말한다. 네가 뭘 만들었는지 아니 마리오?... ...“무엇을 만들었죠?” “메타포” 소설은 그렇게 그렇게 흘러간다. 그 클라이막스가 어떤 사건으로 전개되었는지, 책을 직접 읽었거나, 영화 <일 포스티노>를 보았던 독자들은 알리라. 그러나, 나는 저 장면이 최고의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메타포의 첫 바닷물을 마셨던 마리 오! 그의 삶은 그로부터였을 테니까. 그 순간이 없었다면 그에게 라틴아메리카의 혁명 물결이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혁명이란 역사를 뒤집는 순간만이 아니라, 한 인간의 삶을 에워싸고 흐르는 삶과 죽음의 핏빛 열정이 아닌가 말이다. 그는 시를 만났다. 그 뿐이다. 파블로 네루다의 파란만장한 삶도, 마리오의 격정의 삶도, 정태춘과 지금의 시대를 함께 건너온 민중들의 오랜 장마의 삶도, 피할 수 없는 메타포로 인해 아름답게 그러나 여전히 고독하게 흘러간다. 아름다움이 고독한 예술가를 키운다. 고독이 아름다운 예술가를 키운다. 정태춘의 고독과 영화 <아치의 노래, 정태춘> 속에 들었다 온 짧은 두 시간이 길게 여운으로 남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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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장과 간장이민숙 샘뿔인문학 연구소 소장 음력 정월이면 간장을 담근다. 올해엔 남아있는 간장이 넉넉해 메주 두 덩이를 가지고 담갔다가 두 달여 된 날, 된장을 분리했다. 우리 민족의 대표 발효 식품이며 양념거리, 두 식품은 소금물과 한몸으로 섞여 서로를 보듬어준 덕택에 맑고 구수한 간장과 향기로운 맛의 된장이 되어 따로 작은 항아리에 자리를 잡았다. 담겨진 날짜가 길어지면 간장맛이 깊어지고, 좀더 이른 시기에 분리하면 된장맛이 좋아진다. 내 맛을 고집하는 게 아니라 상대의 맛을 깊게 만드는 자연의 이치. 인간의 삶에서도 그러한 지혜가 있으리라. 노자 도덕경엔 이런 말이 있다. “잘 가는 자는 자취를 남기지 아니하고, 잘 하는 말은 흠을 남기지 아니한다. 잘 헤아리는 자는 주산을 쓰지 아니하고, 잘 닫는 자는 빗장을 쓰지 않는데도 열 수가 없다. 잘 맺는 자는 끈을 쓰지 않는데도 풀 수가 없다. 그러하므로 성인은 늘 사람을 잘 구제하며,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 ... 이것을 일컬어 밝음을 잇는다고 한다. (是謂襲明 시위습명)” -노자 도덕경 27장 부분: 『노자가 옳았다』/ 도올 김용옥/ 살아가는 길의 밝음에 대한 성찰은 생활 속에서 면면히 이어져야 할 것이다. 스스로의 위치를 자랑하지 않아도 그가 가는 자취를 보면 알 수 있다. 그의 말을 듣다보면 알 수 있다.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개별적 행동을 어떻게 해 왔으며 하고 있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똥인지 된장인지’ 우스갯소리로 자주 듣는 말이다. 지혜란 밝음의 길을 내며 걷는 사람이 남기는 선물이다. 그 ‘밝음’은 상대의 감정과 선택을 밝음 속으로 유도해낼 줄 아는 것임을 배우는 아침이다. 맛의 길, 조상이 남겨준 된장 간장 담그고 분리해내는 시간적 상대성에 기대어 상생의 일상을 상상해본다. “그러므로 좋은 사람은 좋지 못한 사람의 스승이며, 좋지 못한 사람은 좋은 사람의 거울이다. 그 스승을 귀히 여기지 않고 그 거울을 아끼지 아니하면 지혜롭다 할지라도 크게 미혹될 것이다. 이것을 일컬어 현묘한 요체라 한다.(是謂要妙 시위요묘)”-노자 도덕경 27장 부분: 『노자가 옳았다』/ 도올 김용옥/ 지혜로움과 미혹됨의 요체는 명명백백한 빛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없는 자취이며 흠을 남기지 않는 언어이며, 기계에 의존하지 않는 신념의 계산력이며, 닫는다 해도 빗장을 쓰지 않는 현묘함임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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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의 가치는 지켜질 때!이민숙 샘뿔인문학 연구소 소장 말이 가지는 큰 가치는 신뢰에 있다. 그 말의 주인은 인간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삶의 모습들이 긍정적으로 비친다는 건 청자에게 왔던 ‘말’이라는 기호가 ‘신뢰’라는 결론을 포함할 때이다. 신(信)은 인간(人) +말(言)의 결합체이다. 믿음의 깃발은 행위이다. 그래서 언행일치를 더욱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또한 신(信)=행(行)이다. 거짓말과 믿음은 멀고도 먼 사이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러한 단순구조를 무시하고 한 인간을 평가하려고 할까. 그 울타리 안에는 무엇이 있는 것일까. 에리히 프롬은 그의 명저 『소유냐 존재냐』에서 사람들의 삶의 구조를 소유적 삶과 존재적 삶으로 설명한다. 거칠게 도표로 정리하자면 이렇다. 소유적 실존양식 존재적 실존양식 관계와 세계를 ‘나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고 나의 것으로 만드는 관계,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나의 것으로 만들려는 관계 소유의 반대 개념. 두 가지 형태를 구분하려 한다. 이 형태는 생동적이며 세계와 실체적 관계에 있다. 존재의 또다른 형태는 겉보기(appearing)의 반대개념. 있다(be)라는 말의 어원은 미혹적 가상(假像)과는 반대되는 한 인격에 내재한 참실재이다. 인간 역사는 개개인의 자유로운 존재적 삶을 지향했다. 그러면서 그들이 역사를 향한 약속을 해왔다. 그러나 위대한 약속은 왜 실현될 수 없었는가? -첫째, 삶의 목적은 행복이라는 다시 말하면 최대치의 쾌락이라는 전제(극단적 쾌락주의) 둘째, 자기중심주의, 이기심, 탐욕. 부유층만이 누리는 극단적 쾌락주의에 대한 비이성적 의미부여에 있다고 프롬은 분석했다. 약속도 실행도 도무지 오리무중으로 빠져버렸다는 그 핵심적 모순에는, 인류가 발전(?)시킨 경제체제는 ‘인간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보다는 그 ‘체계의 성장을 위해서 무엇이 좋은가’라는 물음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다분히 정치적이다. 대 한민국의 지금 이 시점에 그 물음을 대입해본다면 어떤 결론에 이를 수 있을까. 누가 인간을 위한 정치제도를 만들 수 있는가. 누가 체계의 정치적 성장을 위한 경제체제 만들기에 열중할까. 그동안 그 정치인들은 어떤 역할을 해 왔는가. 이 물음에는 섣불리 결론 내릴 수 없는 오류가 있다. 이건 한 국가의 책임이나 그 국가의 경제체제나 정치체제에 온전한 실행의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거대 국제적 체제 및 국제기구의 역할 및 우리 안의 ‘소유적 가치관’이 깊숙이 개입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지구 한 쪽에서는 지금도 포성이 그치질 않는다. 우크라이나의 민중은 고통에 휩싸여있다. 문제를 일으킨 책임자는 누구인가? 한 사람인가, 우리 모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리의 내면을 비판적으로 들여다보고 우리의 행복을 저해하는 요소들에 대하여 자기비판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것만이 내가 주인된 존재적 가치의 삶이 가능할 것이다. 너를 소유하고 내 이기심을 옹호하고 그것도 판단하기 어렵도록 정신적 폐허 상태로 나아갈 때, 우리는 우리의 약속을 헌신짝 취급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 인격에 내재한 참실재를 보고 있는가? 우리의 미래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려는 인간적 태도에 달려있다고 보는 것이다. 존재는 다시 말하면 진행형인 사랑이다. 이데아가 아니라, 실천적 인격체의 통합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