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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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와 엄마와 나 그리고 연결성.어릴 적, 함께 살았던 외할머니는 무뚝뚝하고, 화를 잘 내시고, 다정한 말씀 한마디 없으셨던 엄한 분이었다. 동네 사람들 누군가가 세 손녀들 칭찬을 할라치면 오히려 깎아내리기 바쁘셨다. 그리고, 종종 머리에 흰띠를 두르고 누워 계시길 잘했다. 당시엔 “할머니, 또 머리 아파? 왜 머리가 아파?”하고 묻지를 못했던 것 같다. 아마 내가 인식도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보아온 할머니의 익숙한 모습이 궁금증을 유발하지 않았거나 할머니와 나와의 어떤 정서적 연결감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를 앉혀놓고 도란도란 얘기를 하신다든지, 따스하고 애정어리게 나를 대해 주신 적이 없었다. 내 이름이 불리워질 때는 아마도 동생들과 싸워서 혼낼 때, 또 할머니 가슴속에 쌓인 울화가 터져 나올 때, 집안일 시키거나 동생들 돌보라고 하거나 어떤 필요에 의해서 부를 때... 아마도 그 때 불리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내 이름이 친근하게 느껴지지 않고, 뭔가 어색함, 이질감이 느껴진다. 1년 6개월 정도 나이차가 나는 동생이 태어난 후, 나는 할머니 방으로 보내졌고, 엄마는 둘째 돌보랴 농사일 하랴 아마도 나는 엄마랑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할 새도 없이 할머니 손에서 더 많이 키워졌던 듯 하고, 무뚝뚝하고 불같은 할머니 밑에서 많은 눈치를 보며 자랐을 게다. 게다가 할머니가 너무 무서웠던 엄마와 아빠는 내가 할머니에게 혼날 때 전혀 보호도 해주지 않고, 혼나고 난 뒤에 어떤 위로도 해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 때 나는 작은 골방에서 혼자 울었겠지. 그러다가 6~7살에는 이종사촌오빠가 광주로 고등학교를 가게 되어 할머니가 나를 데리고 가서 오빠 하숙을 시키셨다. 그리고, 초등학교 들어가기 얼마 전에 집으로 돌아온 듯 하다. 그런데, 아빠는 언젠가부터 시름시름 앓고 계셨고, 내가 입학한지 얼마 안 된 봄날, 아빠는 돌아가셨다. 그런데, 엄마는 부모 앞에서 남편 죽었다고 우는 거 아니라는 사람들의 말에 제대로 통곡도 못하고, 애도도 하지 못한채 아빠를 보내고 말았다. 그리고 나서 내가 대학 졸업한 후에 엄마에게 아빠에 대한 얘기를 꺼내기 전에는 아빠에 대해서 절대 말하면 안 되는 듯한 분위기 속에서 살았다. 내가 결혼해서 아빠 산소에 인사드리고, 벌초하러 가기 전까지 엄마는 생전 아빠 산소를 찾지도 않으셨다. 아빠는 우리 가족 안에서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사람처럼 되어 버렸고, 엄마는 아빠를 가슴에 묻고, 늙으신 어머니와 세 딸들을 위해 생존현장에서 고군분투하셨다. 그러나, 가슴 속 응어리진 한은 엄마를 세상에서 고립되게 만들었고, 그 외로움과 고립감을 할머니와도 나누지 못했고, 한 직장에서 일하고 있는 친언니에게도 나누지 못했다. 그렇다 보니 하물며 딸들에게도 당신의 아픔을 얘기할 수 있었겠는가! 나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로, 엄마가 얼마나 힘들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엄마에게 잘해야겠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착한 딸이 되어야겠다.’ 라고 다짐한 듯하다. 그러나, 엄마가 당신의 속마음을 한번도 얘기한 적이 없으셨기에 나는 엄마와 정서적으로 단절되어 있었다. 할머니하고도 연결된 적이 없는데, 엄마와의 연결감도 경험할 수 없었고, 그러면서 나도 또한 두 여동생들, 학교 친구들과의 연결감도 느낄 수가 없었다. 이렇다 보니 나의 삶 또한 고립된 섬처럼 늘 외롭고 힘겨웠다.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엄마에게 얘기조차 못하고 살았다. 내가 얘기할 수 있었던 상대는 그나마 간간이 있었던 학창시절의 단짝들, 말 없는 자연, 일기장, 그리고 대학 졸업 후 만난 신랑과 인생의 선배들이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나이 오십을 바라보며 나는 이제 외할머니가 왜 그토록 팍팍하고, 힘겨운 삶을 살아왔는지, 왜 머리 싸매고 드러누운 날이 많았는지를 조금 가늠해볼 따름이다. 나는 국화를 참 좋아한다. 그 단아한 모습이며, 깊어가는 가을속에 피어나는 그윽한 향기를 사랑한다. 올해 나의 뜰에 국화를 들이고 나서 작은 시 한편을 써 보았다. 죽고 싶어도 떡볶이는 먹고 싶고 죽고 싶어도 가을국화는 이쁘다 몇 날 며칠 지리산을 쏘다니다 흙땅에 널부러져도 빨치산녀처럼 비바람 맞아 발은 퉁퉁 불고 머리는 쫄딱 젖어 미친년처럼 헝클어지고 허기가 져도 산행이 끝나고 사람사는 마을로 내려갈라치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산에 올라오면 나는 한 마리 선한 짐승 혹은 경계없는 그 무엇이 된 듯한데 저 곳으로 내려가면 어느덧 사람들과 부대끼고 갈등하며 사는 것이 더할 수 없는 손톱밑의 가시였다 존재의 뿌리를 뒤흔드는 이유도 알 수 없는 괴로움에 무작정 오른 스무살의 지리산행 걷고 또 걸었지 남몰래 울고 또 울었지 근데 말없이 받아주는 어떤 기운 있어 그 품에 안겼어 내려가기 싫었지만 어째 돌고 돌아 세월은 흐르고 나는 어느새 이곳 지리산에 살고 있네 6.25의 아픔으로 인한 외할머니의 상처 남편의 죽음에 제대로 애도조차 못했던 할머니와 엄마의 한스런 세월이 흐르고 흘러 내 안에 있다는 걸 이곳 상처많은 지리산 땅에서 알게 되었다 할머니도 엄마도 가르쳐 주지 않았고 하다못해 당신들의 넋두리도 듣지 못했던 나는 수천, 수만 날을 헤매고 헤매며 지금 이 땅위에 서 있다 노고단이 자리하는 뒷산 유유히 흘러가는 섬진강이 눈앞에 바라보이는 나의 뜨락 이제 여기 낙엽 떨어지고 들국화도 피어나니 내 뜰에도 국화 몇송이 들이고 이제는 머언 뒤안길 돌아온 나에게 그 꽃들을 바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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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고가는 길손들.작년 여름에 집터에 새로운 공간을 들이고 팬션으로 운영하면서 이런저런 손님들을 받게 되었다. 가볍게는 하루 이틀, 많게는 한 달, 두 달까지 지내다 가셨다. 그리고, 국내 손님들이 대부분이지만 종종 외국에 체류하고 계신 한국분들도 오셨다. 또 친정, 시댁 식구들 혹은 신랑이나 나의 친구나 지인들이 모임장소로 머물고 가셨다. 얼마전에는 캐나다에서 손님 두 분이 오셨는데, 엄마는 한국인이고, 아들은 캐나다인이었다. 현재 아들이 제주도 국제학교에서 교사를 하고 있는데, 2년 계약으로 한국에 왔다가 몹시 실망하고 1년만에 캐나다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 했다.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한국엄마는 캐나다 아들에게 한국인과 한국문화의 정과 아름다움을 조금이라도 느끼게 해 주고 싶다 하셨다. 그 아름답고 독특한 문화가 있는 섬, 제주에서 어떻게 실망을 할 수 있을까 궁금해서 제주도를 여기저기 둘러 보고, 한국 사람들도 만나 보았느냐고 묻자 학교에서만 생활하느라 제대로 둘러보지 못했다고 한다. 국제학교에서의 삶은 그냥 외국에서의 삶 그대로였다고 한다. 주말 같은 때, 제주를 여기저기 여행해 보지 그랬냐고 물으니 성격이 여기저기 적극적으로 탐사하고, 모험하는 성격이 아니라고 한다. 한국인 엄마가 하는 말이, 캐나다 아들은 국제학교 교사로 세계 여기 저기 다니면서 일을 하고 있는데, 지난번에 브라질에서 일이 즐겁게 끝나자 한국에서 한 번 일해 보았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의 삶이 너무도 실망스러워서 돌아가려는 아들이 무척이나 안타까우셨나 보다. 캐나다에서 지내던 엄마는 고국에 있는 친정 식구들도 만나고, 아들과 함께 여행도 하고 싶어서 한국에 오셨다고 한다. 그분들이 오던 첫날에 가랑비가 내리고 있었다. 오후에 도착했는데, 캐나다 아들은 걷고 싶다고 해서 우리 큰아들이 형을 안내해서 섬진강 길을 걷고 왔다. 다음날 아침, 구례의 우리밀빵과 잼, 산양치즈를 곁들여 손님들께 드렸더니 무척 좋아하셨다. 그리고 아침 후, 아들은 우리집에서 화엄사까지 왕복 4시간 정도 되는 거리를 홀로 걷고 왔다. 그동안에 나는 이 한국엄마와 차를 나누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당신이 살아오신 삶, 어떻게 캐나다에 건너가게 되었는지, 앞으로는 어떻게 살고 싶은지 등... 그리고, 점심 때가 좀 지나 아들이 돌아왔을 때 신랑이 부추전을 부쳐주어 손님들과 함께 맛있게 먹었다. 전을 먹고, 막걸리 한 잔도 마시고, 얘기도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 가고 있었다. 신랑은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나는 마당 벤치에 가벼운 저녁거리를 차렸다. 잠시 후, 우리집에서 한달살이를 하셨던 모자와 여자 한 분이 놀러와 자연스레 함께 어우러지게 되었다. 날은 그다지 덥지 않은 초여름 저녁이요, 하늘에는 별이 총총 뜨고, 마당에는 모닥불이 피워지고, 그 주변에 둘러앉은 사람들은 얘기를 나누는 아름다운 밤이었다. 그러다가 장구도 치고, 민요나 노래도 부르고 춤을 추면서 놀기도 했다. 캐나다 아들은 기타를 잘 친다고 해서 그의 기타 솜씨를 듣고 열렬하게 박수치고 호응해 주었더니 무척 쑥쓰러워했다. 노래도 불러보라 했더니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그리고, 그는 장구 가락에도 관심을 보이며 배우고 싶어해서 잠시 가르쳐 주었다. 밤 늦도록 즐겁고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다음날 모자는 점심 즈음 떠날 예정이었다. 오전에 두 분과 함께 문척 맞은편 쪽 섬진강 길을 걸었다. 대나무 숲길과 아름다운 섬진강이 굽이굽이 흐르고 있는 길을 걷는데, 너무도 좋다 하시며 나중에 귀국해서 살게 되면 여기 구례에서 살고 싶다 하셨다. 그분들과 점심으로 비빔밥을 먹고 나서 헤어졌다. 캐나다 아들은 눈물을 글썽글썽이며 헤어짐을 무척이나 아쉬워 했고, 고맙다고 연거푸 얘기했다. 엄마는 아들이 한국을 떠나기 전 그나마 아름답고 따스한 추억을 만들고 가서 너무도 감사하다고 얘기했다. 이곳에서의 좋은 기억들로 인해 아들이 나중에라도 또 한국을 찾게 되기를 바래보았다. 캐나다 뿐만 아니라 영국에서 오신 한국분은 2주를 머물다 가셨는데, 멋진 정원이 있고 귀여운 삼둥이와 따뜻한 마음의 부부가 사는 이런 시골집이 너무도 좋다 하셨다. 여름이라고 신랑의 고향 친구들도 놀러왔는데, 고향 친구 중 이곳에 부모님이나 친척이 없는 친구들이 가족과 함께 놀러 왔다. 낮에는 가까운 문수골로 우리 아이들과 함께 물놀이를 가고, 저녁에는 우리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가까운 광주에 사는 친구도 우리집에 놀러왔다. 신랑은 이들을 위해 마당에 모닥불을 피우고, 고기를 굽기도 하고, 술 한잔을 나누며 그동안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이곳 지리산의 따뜻한 녹차 한 잔을 내며 맑고 그윽한 차향을 나누었다. 도시에서의 삶이 녹록치 않을 신랑의 친구들. 이 맑고소박하고 담박한 차향으로 마음의 고단한 짐들이 스르르 녹았으면 좋겠다. 방을 하나 새로 들이고 나서 많은 손님들이 왔다 가셨다. 오신 이들이 이곳에서 편안히 행복하게 머물면서 새로운 기운을 얻어 가셨으면 좋겠다. 이곳 시골이 치유의 삶터, 치유의 공간, 모심과 살림의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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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바닥 사랑.아침에 눈을 뜨면 창 밖으로 초록빛 신록과 유월의 상큼한 공기가 들어온다. 새들은 먹이를 찾느라 부산하게 돌아다닌다. 바깥 화장실 앞, 단감나무 한그루속이 아지트인 참새들은 떼지어 ‘포르르 포르르’ 날아다니며 먹이를 찾고, 직박구리는 요즘 익어가고 있는 아로니아 열매를 입에 물고 빨래줄에 앉는다. 그 중에 검은 머리에 잿빛과 보라, 군청의 깃털을 가진 물까치의 나는 모습은 참으로 우아하다. 긴 꼬리를 이끌며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바람을 타고 나는 모습이 근사하다. 나도 저렇게 날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들고양이들도 뭐 먹을게 없나 집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마당에 깔아놓은 까칠한 멍석이 좋은지 벌러덩 드러누워 털을 햟는다. 새벽같이 일어나는 우리집 강아지는 너무 일찍 일어나 피곤한지, 심심한지 제 집에서 나와 마당에 드러누워 아침잠을 즐긴다. 자리에서 일어나 쌀을 씻어 안치고, 밭이나 마당으로 나간다. 얼마전 매 주었는데도 밭과 마당에는 풀이 한가득이다. 비라도 한 두 번 내리면 주인이 방심한 틈을 타서 풀들은 재잘재잘대며 올라오는 것 같다. 비를 맞고 쑤욱 자라 있는 풀들을 보면 풀들에게서 “얏호~”소리가 나는 것 같다. 그러나, 생글거리지만 이 얄미운 풀들을 매 주어야 참깨, 들깨, 고추, 가지, 토마토 등 다른 작물이 제대로 크고, 마당의 잔디가 잡풀로 난장판되지 않는다. 서둘러 마당의 일을 마치고, 방에 돌아와 아이들을 깨운다. 일어나지 않으려는 아이들과 실랑이질을 하며 바쁜 아침일과가 시작된다. 큰아이는 중학생이라 이제는 제법 알아서 하지만 둘째와 셋째는 기를 쓰고 조금이라도 더 자려고 하는 터라 깨우는게 너무 힘들다. 나는 그 사이에 반찬을 만들기도 하고,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거나 아니면 빨래를 꺼내 널기도 한다. 아이들 자는 방과 부엌과 세탁실을 종종거리며 다니는데 8시가 다 되어야 마지못해 일어나는 두 녀석들. 어쩔때는 큰소리를 내야 일어나기도 한다. 이제 30분 안에 모든 걸 해결해야 한다. 아이들 일어나서 세수하고, 옷 입고, 밥 먹는 것 까지...학교 버스가 8시 30분에 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30분 안에 이 모든 걸 하기에는 늘 벅차다. 그래도 둘째는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니 학교 버스 시간에 맞추지 않아도 되는 여유가 있는데, 이 막둥이가 영~~ 늑장을 피운다. 그러던 막내가 지난주 자전거를 배워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겠다고 한다. 아직은 서툴러서 안 된다고 해도 엄마 몰래 타고 가버린다. 이번주 월요일의 풍경. 평소 읍에 있는 직장과 학교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신랑과 큰 아이, 되도록이면 자전거를 타고 초등학교에 가는 둘째, 그리고 새로 자전거를 배운 셋째. 이 네 명의 남자들이 우리집 아래 돌담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쪼로록 내려가는 모습이 참으로 애뜻하게 다가왔다. 아! 막내는 아직 내리막길에 서툴러 자전거를 끌고 갔구나. 아무튼 막둥이가 어느결에 자전거를 배우게 된 것도 감격스러웠지만 네 사람이 자전거로 함께 나가는 모습은 뭔가 뭉클함을 느끼게 했다. ‘우리 아이들이 벌써 저렇게 자라 아빠와 함께 세상으로 나가는구나!’ 뭐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다. 6월 들어 비가 많이 오고, 신록은 무성해지고 해서 지난 주말에 산 좋고 물 좋은 피아골로 산행을 다녀왔다. 작년 여름에는 나 혼자 세 아이들을 데리고 피아골 산장에 다녀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가족과 신랑이 청년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산 형님들 여섯분도 함께 갔다. 구례에 살아도 피아골 오기가 쉽지 않은데 많은 분들과 함께 가니 더더욱 흥겹고 좋았다. 산 형님들은 아이들 주신다고 김밥이며 과자며 사탕 등을 바리바리 챙겨 오셨다. 우리 삼둥이들이 아저씨들의 사랑과 격려를 듬뿍 받으며 걷는 이 피아골 산행은 두고두고 추억에 남으리라 싶었다. 대학 시절, 한참 지리산에 다닐 때 들었던 소망이 남편과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지리산에 오는 것이었는데, 이제 나는 세 아이들을 데리고 이 지리산의 품에서 아이들을 키우는구나! 라고 생각하니 참 감사하고 흐뭇하였다. 때는 하얀 노각나무 꽃들이 작은 함박꽃인 듯 치자나무 꽃인 듯 피어나고 있었고, 송이송이 통째로 져서 길이나 바위에 흐드러지게 떨어져 지나는 길손의 발목을 잡고, 혹은 물 위에 둥둥 떠내려 가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 내린 비로 불어난 계곡물은 폭포소리로 장쾌하고, 내 안의 찌든 때를 말끔히 씻겨 주고 비워내는 듯 했다. 산에 들면 그런 생각이 든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인 듯 쉴새없이 자연을 파괴하며 오만하게 살고 있지만 인간은 그저 자연의 일부일 뿐이라는 것을... 깊은 산속의 수많은 생명들이 어우려져 내뿜는 맑고 선한 기운으로, 산에 들면 사람도 그저 선해지고 순해진다. 피아골 대피소 혹은 노고단까지 오르는 산행의 길은 우둘두툴 바위도 많고 계속 오르막 길이라 걷는 걸 즐기는 나도 조금 힘든 코스이지만 그래도 걷는 길에서 느끼는 기쁨은 말할 수 없이 크다. 우리 아이들도 걸으면서 기쁨을 누리고 삶을 누렸으면 좋겠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좀 어수선하게 썼는데, 모든 생명은 발로 사랑을 한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아침에 일어나 만나는 새, 고양이, 개, 개미, 지렁이, 진딧물... 그리고 나와 신랑과 아이들... 그리고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 모두 발로 자기 삶을 산다. 아이들은 발을 굴려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고, 발걸음을 내디뎌 산에 오른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 발걸음 종종거리며 아이들을 챙기고, 집안 살림을 하고, 농사일을 한다. 신랑은 아이들과 함께 자전거로 출근하고, 가족을 위해 직장에서, 땅에서 일을 한다. 발걸음은 사랑이다. 삶이다. 발바닥 사랑 - 박 노해 사랑은 발바닥이다 머리는 너무 빨리 돌아가고 생각은 너무 쉽게 뒤바뀌고 마음은 날씨보다 변덕스럽다 사람은 자신의 발이 그리로 가면 머리도 가슴도 함께 따라가지 않을 수 없으니 발바닥이 가는 대로 생각하게 되고 발바닥이 이어주는 대로 만나게 되고 그 인연에 따라 삶 또한 달라지리니 현장에 딛고 선 나의 발바닥 대지와 입맞춤하는 나의 발바닥 내 두 발에 찍힌 사랑의 입맞춤 그 영혼의 낙인이 바로 나이니 그리하여 우리 최후의 날 하늘은 단 한 가지만을 요구하리니 어디 너의 발바닥 사랑을 좀 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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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에 대한 단상들.햇살은 뜨겁지만 산들바람은 너무도 싱그러운 4월! 강가에 평상 하나 내어놓고 하루종일이라도 흐르는 강물을 보고 싶은 날들이다. 신록은 우거지고, 강의 물비늘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새 한 마리 유유히 강을 날고, 선선한 봄바람 불어오는 오늘같은 날. 강가 평상에 앉아서 바라보는 강의 풍경들이 너무도 곱고 아름다워서 눈물나는 날. 나의 내면풍경도 저토록 조화롭고 고우면 참 좋겠다! 싶은, 강의 풍경이 미치도록 부럽고 서러운 날... 그리고, 섬진강이 바라다 보이는 이런 곳에 작고 예쁜 집 한 채 짓고 매일같이 흐르는 강을 보면서 살고 싶은 소망이 드는 날... 나는 어릴 적 깡촌에서 살아서 강을 잘 모른다. 고작해야 졸졸거리는 시냇물과 그 시냇물에서 잡았던 다슬기와 작은 송사리, 그 다슬기와 송사리를 담아오던 검정 고무신 그리고 가끔씩 물 위로 폴짝폴짝 뛰어오르던 물고기들과 이른 아침 물안개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겨울이면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얼어붙은 냇물, 그 얼음장 밑으로 흐르던 냇물의 소리,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얼음이 점점 녹고, 또랑또랑 맑게 흐르던 시냇물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청미래 덩굴(맹감 나무) 이파리로 떠먹던 산속 옹달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이 곳 구례에서 살게 된 지 벌써 13년이 되었건만 나는 아직도 섬진강에 대하여 말하기가 어렵다. 강과 어울려 논 유년시절의 추억이 없기 때문일까? 신랑은 어린시절, 친구들과 동네 형, 동생들과 강에서 멱을 감으며 놀았다고 한다. 신랑에겐 어쩌면 강은 친구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치만 이제 강도 조금씩 조금씩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다. 이전에는 주로 차를 타고 강 주변을 지나치는 편이었다면 요새는 걸으면서 강을 바라보고, 만나고 있다. 강 주변 노오란 갓꽃과 대나무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걷다가 강가에 선 미루나무도 만나고, 고개들어 올려다본 새파란 하늘에는 조각구름들이 걸려 있다. “미류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 있네. 솔바람이 불어와서 살짝 던져 놓고 갔지요.” 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햇살과 바람에 반짝반짝 빛나고, 잎새를 뒤척이는 미루나무를 보면 나는 한편의 아련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 강 길 어디메 쯤에선가 자전거를 탄 6~70년대의 연인이 나타날 것 같은... 남학생은 흰 와이셔츠에 검정바지, 그리고 검은 모자를 쓰고, 여학생은 흰 블라우스 교복에 검정치마, 그리고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곱고 수줍은 얼굴로 뒤에 탄 모습... 봄날의 강과 반짝이는 미류나무와 자전거와 신록처럼 싱그럽고 파릇파릇한 앳된 연인들... 이 강길을 수십번, 수백번 오고가며 우정을 쌓고 사랑을 싹틔울 연인... 난 미류나무를 보면 그런 생각이 한편의 영화처럼 막 떠오른다. 그리고, 문척쪽의 섬진강 길을 걷다 보면 이쪽에서 일하셨던 큰시누이가 떠오른다. 올봄 매화꽃이 한창 이쁠 적에 하늘나라로 가신, 아직은 살날이 참 많았던 큰 누이. 그녀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 부산 신발공장에 공순이로 들어가 살림살이 팍팍한 시골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냈던 누이. 한 달에 이틀 정도만 쉴 수 있고, 명절때나 되어야 선물이라도 좀 사 들고 가족들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누이. 그렇게 시작한 부산 생활은 결혼으로 이어지면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는데, 한 5년 전에 큰 누이는 부산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때 그녀는 이렇게 얘기했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여기 고향에 돌아오니 오래 살고 싶어졌네.” 아침마다 섬진강 길을 따라 자전거로 출근하면서 강물도 보고, 새도 보고,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바람도 느끼고, 가을이 되면 그토록 좋아하던 코스모스도 보면서 늦깎이로 삶의 여유로움과 행복을 누렸던 큰 시누이. 그런데, 갑자기 불치병이 발견되면서 그녀는 얼마 전 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녀가 머물렀던 공간과 그곳에서의 추억들을 되새기자니 마음에 그리움과 슬픔이 차오른다. 그러면서 ‘산다는 게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이제 섬진강은 나에게 작은 추억들과 아련한 슬픔들을 남겨 놓고 흘러가고 있다. 이 강은 흘러흘러 바다로 가겠지. 나의 마음도 흘러흘러 大海로 가고 싶다. 그리움도, 슬픔도, 아픔도, 기쁨도 모두 한줄기가 되는 大海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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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피다. 그리고 달을 보다.오늘은 화개로 서예 배우러 가는 날이다. 학기 초라 큰 아이 학교 상담을 마치고, 3시 즈음 구례에서 출발했는데, 피아골 입구 즈음부터 차가 막히기 시작하더니 석주관 칠의사 사당 있는 곳부터는 거북이 걸음이다. 수업 시간에 너무 늦는 것 같아 좀 조바심이 났는데, 마음 급하게 먹어봐야 소용없는 일. 작년부터 1년 이상 이어지는 코로나 시국에 너무도 답답한 사람들이 꽃구경하러 도로로 쏟아져 나온 걸 이해해야지. 도로가 막히는 걸 체념하고 나도 차 안에서 꽃구경을 하며 차가 멈추면 이 기회에 사진도 몇 장 찍고...그러다가 차가 움직이면 뒤에서는 그새를 못 참고 빵빵거린다. 에고~~ 꽃구경 좀 하자구요! 꽃놀이 나왔으면서 왜 이렇게 서두르시는 거예요? 지난주까지는 벚꽃 봉오리에 붉은 물이 잔뜩 올라 있더니 한 주 사이에 꽃이 팡팡 터져 버렸다. 비 오고, 햇빛 나더니 벚나무들도 몸이 가려워 그새를 못 참고 화사하게 꽃을 피워낸다. 그나마 꽃샘추위가 한 이틀정도 온 바람에 속도가 살짝 더뎌진 듯 하다. 허나, 4월이 오기 전에 봄꽃의 절정이라는 벚꽃마저 다 터져 버렸으니 어찌보면 참 속절없다. 꽃들이 천천히 하나씩 피어야 그 꽃들을 차분히 음미할텐데... 산수유 꽃 아래서는 산동애가를 읊조리고 매화 아래선 그 그윽한 향에 심취해 논을 감을 수 밖에 없을테고, 거기에 매화차 한 잔이면 말이 필요없을테고, 목련꽃 아래서는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어보고, 진달래꽃 아래서는 소월의 진달래 시를 읊으며 나 보기가 역겨워 떠난 님을 생각할까 말까?^^ 어린시절, 온 산을 휘저으며 진달래 한아름 꺾어오던 볼 빨간 어린 소녀를 추억할 테고, 개나리꽃 아래서는 따스한 봄 햇살 아래 쫑쫑거리며 다니는 샛노오란 이쁜 병아리들을 생각하고, ‘개나리꽃 들여다 보면 눈이 부시네. 보국대 들어가신 아버지는 언제 오시나?’라는 일제 강점기에 보국대 들어간 아버지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가 생각나겠지. 그런데, 지금은 꽃들이 온통 짬봉으로 피어나 그런 걸 천천히 누리고 생각할 여유가 없어진 듯 하다. 암튼, 벚꽃 필 무렵, 섬진강변을 따라 가다보면 지금 이 쪽 편의 꽃보다 강 건너 꽃구름 이는 저쪽의 꽃들이 더 예뻐 보인다. 눈을 안으로 돌려 지금 내가 처한 이곳, 혹은 내가 가진 보물, 나의 아름다움을 눈여겨볼 수 있기를... 코로나로 수업을 중단했다가 지난주부터 오랜만에 다시 서예를 시작하니 손이 잘 풀어지지는 않았지만 붓글씨를 쓰며 차분하고 정갈해지는 이 느낌. 참 좋다! 어쩔 때는 가족들 저녁 챙기러 안 가고 계속 글씨만 쓰고 싶은 생각이 든다. 붓글씨는 뭐랄까? 내게 있어 번뇌를 내려놓고 마음을 고요하게 흐르게 하는 힘이 있는 듯 하다. 수업이 끝나고 쌍계사 가는 길로 잠시 걸어갔다가 내려왔다. 오늘은 시간이 촉박해 7000보 정도 걸었다. 벚꽃은 사정없이 피어나고, 차들도 사정없이 다니고, 봄날도 사정없이 간다. 내가 좋아하는 화개골의 봄도 화살같이 날아간다. 오후 늦게 여수 사는, 신랑 아는 형이 놀러 오셨다. 신랑이 일주일에 한 번씩 가서 자고 오는 산속에 텐트를 치고 같이 자겠다고 온 것이다. 오늘 우리집에 아들들 친구 네 명과 조카까지 와서 1녀 6남매의 저녁엄마 노릇을 하고, 나도 산 속에 올라가봤다. 큰아이는 먼저 올라가 있었고, 신랑이 밥과 반찬을 가지러 내려온 김에 둘째와 한달살이 하는 아이를 데리고 올라갔다. 주변은 나무들에 묻혀 어둡고, 신랑은 모닥불을 피워 고등어를 굽고 있었다. 하늘에는 반달이 휘영청 밝고 별들도 듬성듬성 이쁘게도 떠 있다. 산속에서 보는 달은 또다른 맛이 있네 그려. 저 달과 별로 시를 노래하고, 막걸리에 고등어 구이와 김치를 안주삼아 불멍을 하다가 10시 즈음 내려왔다. 둘째 아들은 그곳에서 자겠다고 해서 큰아이와 00이만 데리고 내려왔다. 집이라고 돌아와 보니, 꼬마 손님들은 집에도 안 가시고, 우리 집에서 주무시겠다고 하며 빔으로 '해리포터 영화'를 보고 계셨다. 씻지도 않고, 방 청소도 안하고...에효~~ 그 시간에 방 정리 정돈하고 청소하는데, 힘들당. 꼬마 손님들은 11시까지 영화를 보시고, 그 중에 한 녀석은 영화가 끝난 시각에 숙제를 하시겠단다. 에고~~ 머리야! 숙제를 꼭 하겠다는 너의 책임감이 가상하여 오늘은 허락하노마는 다음에는 아니 되느니라! 그 아이가 숙제를 한다고 스탠드 등을 켜놓은 불빛을 의지해 나는 막내에게 '어린왕자'책을 읽어주고, 그 아이는 12시 즈음 숙제를 끝내놓고 꿈나라로 갔다. 오늘 하루 참 알차게 살았다.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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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치부부가 집을 짓는 시간.새들의 부산한 움직임으로 시작하는 아침. 아침부터 신혼 까치 부부는 부지런하다. 우리 집 앞 전망 좋은 노랑 팽나무에 앳된 신혼 부부가 집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둘은 신혼의 단꿈에 부풀새도 없이 열심히 일을 한다. 한 마리는 물어 나르고, 또 한 마리는 그것을 이리도 놓았다가 저리도 놓았다가 한다. 물어오던 역할을 하던 까치도 간혹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옮기기도 한다. 한 번에 그냥 딱! 놓는 것이 아니라 나뭇가지를 이리저리 옮겨가며 최상의 설계와 완벽한 시공을 하는 것이다. 새들이 집을 짓는데 보통 내공이 있는 것이 아니다. 부실공사란 있을 수 없다.^^ 이 까치 부부가 집을 짓는 기간을 봤더니 약 20일 정도는 몸서리나게 나뭇가지를 물어 나른다. 내가 새참이라도 해다 주고 싶을 정도로 쉴 참 없이 일을 한다. 그런데, 비 오는 날 공사현장이 쉬는 것처럼 새들도 쉬었다. 지난번에 이틀정도 비가 내리니 까치 부부도 일을 안하고 어디에선가 쉬는 듯 했다. 20일 정도에 집 꼴이 어느 정도 갖추어지자 약 열흘 정도는 마지막 잡도리(단단히 준비하거나 대책을 세움)로 전보다는 쉬엄쉬엄 일하며 집을 더욱 탄탄히 하는 작업을 했다. 해서 드디어 한달여만에 집이 완성되었다.(이후 한 열흘 정도 더 마무리 작업을 한 것 같긴 한데, 그다지 눈에 띄지는 않았다.) 까치들이 우리를 집들이에 초대해주면 단박에 달려갈 텐데 아쉽게도 우릴 부르질 않는다. 창가에 앉아 한달여 가까이 그들의 집 짓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그들에 대한 경외감이 일었다. 저 신혼 부부가 이제 둥지에서 잘 살면서 알콩달콩 알을 낳아 새끼를 까고, 키우고, 그러는 와중에 비바람도 태풍도 몰려오겠지. 그래도 집은 끄떡 없을테고... 그리고, 오랜만에 개똥지빠귀 새도 본다. 아침에 일어나니 마당의 살구나무 가지에 한마리 새가 앉아 있어 누군고~~ 하고 한참을 바라보니 ‘아~~개똥지빠귀다!’하는 필이 딱 왔다. 굿모닝! 개똥지빠귀! 아침을 하러 부엌에서 통유리창으로 뒤안 텃밭을 내다보니 온갖 작은 새들이 몰려와 잔치를 벌이고 있다. 오른쪽은 참새 무리, 왼쪽은 뱁새 무리(붉은 머리 오목눈이), 가끔 들고 나는 박새와 딱새와 노랑턱멧새... 오늘은 유난히도 새들이 몰려와 아침을 먹는데, 뒤안 두엄자리에서 뭔가 맛있는 먹이를 발견했나 보다. 그 작은 새들이 부산히 움직이며 아침을 먹는 모습이 무척이나 발랄하고 경쾌하다. 나도 끼워달라고 하고 싶다. 아침에 오랜만에 순두부국을 끓였다. 멸치, 다시마 육수를 낸 다음 뚝배기를 꺼내 파, 고춧가루 기름을 내고 거기에 육수를 붓고 순두부와 달걀 한 알을 넣고 간장과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었다. 다른 냄비에 돼지고기 볶음이 있어 그것도 조금 넣었다. 그랬더니 시중에서 하는 순두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넘넘 맛있다. 아직은 쌀쌀한 아침에 뚝배기 순두부국은 진리다! 둘째는 아쉽게도 순두부국이 다 만들어지기 전에 학교에 갔고, 큰애랑 막내는 따끈하게 잘 먹었다. 둘째가 먹을 양을 남겨 두었더니 학교에서 돌아와 저녁에 맛보더니 엄지척!을 해준다. 아이를 낳고 엄마가 되다 보니 내가 만든 음식을 아이들이 맛있게 먹고, 엄마음식 최고!라고 칭찬을 해주고, 그 음식으로 이런저런 추억을 쌓아가는 일이 참 아름다운 순간들이다. 저 엄마까치도 새끼가 태어나면 부지런히 먹이를 잡아다 먹이고, 새끼들은 받아 먹으며 우리 엄마 최고!를 외치겠지. 어릴 적 봄이면 여린 쑥을 뜯어 끓여주신 할머니의 쑥국, 더운 여름날, 할머니의 뜨거운 팥칼국수와 엄마의 고소한 콩국수, 엄마가 외출하시고 안 계신 날 아빠가 가마솥에 만들어 주신 비빔밥의 추억(그것이 내 생애 가장 맛있는 비빔밥이었다) 가을걷이 끝난 논에서 잡은 살찐 미꾸라지로 엄마가 끓여주신 추어탕, 가을에 저수지 수로를 따라 돌아다니던 민물새우를 잡아 만들어주신 할머니의 토하젓, 한겨울 눈쌓인 길을 면에서 한 시간 거리인 시골 동네까지 수레를 끌고 올라와 두부를 팔았던 두부장수. 그 귀한 두부를 사서 끓여주셨던 엄마의 두부된장찌개, 추운 겨울날 뜨거운 김 호호~~불며 먹었던 세상 맛있던 두부된장찌개... 이렇게 맛있는 음식과 그리운 추억들이 오버랩되면서 어린 시절은 행복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오늘 저녁은 무엇을 먹으며 아이들과 추억을 쌓을까? 올해안에 까치 새끼들은 다 자라 둥지를 떠나겠지.(30일 정도면 거의 다 자라 떠난다고 한다. 그렇게나 빨리?) 나는 아직 한참 우리 삼둥이를 키우고 있는 중인데, 나에게도 어느덧 아이들을 떠나 보내야 할 날이 성큼 다가오겠지. 떠나 보내기 전 아이들과 함께하는 지금의 이 시간들을 소중히 여기며 맛있는 음식, 좋은 추억들도 새록새록 쌓아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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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길을 걸어 그대에게 가는 마음.1월 초,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한가득 쌓여있다. 어릴적엔 밤새 눈내려 새하얗게 된 세상을 보노라면 가슴이 뛰고, 그 은빛 세상에 매혹되어 너무도 황홀했는데... 눈이 내리던 새벽, 간혹 잠자다 깨어나 마루에 있는 요강에서 볼일을 볼 때 그 차갑고도 맑고도 적막한 느낌 속에 펑펑 내리던 눈! 달빛이라도 비치는 날엔 눈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나던 어둠속의 신비! 그리고 으스스 몸을 떨며 다시 따뜻한 이불속에서 곤히 단잠을 자다가 환한 눈빛이 초가집 창호지 문으로 비쳐들고 문풍지 사이로는 알싸하고 상큼한 눈 내린 아침의 공기가 스며들 즈음 소녀는 벌떡 일어났다. 엄마랑 할머니는 이 추운 아침에 꽁꽁 얼어붙은 부엌으로 나가 불을 때서 밥을 하는게 힘드셨을 것이다. 그래도 아궁이에 불이 붙고, 부엌이 열기로 따스해지면서 눈 쌓인 마당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하셨겠지. 소녀는 친구들과 눈 속에서 한바탕 놀 생각에 설레기만 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조금 들고 보니 어린 시절 가슴을 뛰게 하던 감동은 사라지고, 좀 무덤덤해지는 마음이 서글프다. 어제 둘째 아이 친구 두 명이 우리집에서 잤는데, 아침에 눈 온 걸 보더니 첫째, 둘째랑 함께 네 아이가 밖으로 뛰어 나간다. 아침잠이 많고 몸이 마른 막둥이는 이불을 끌어당기고 쿨쿨 잠을 자느라 정신이 없다. 눈 온 날에 마음이 설레어 서둘러 일어나던 나하고는 많이 다르다. 학교에서 문자가 왔다. 눈이 많이 와서 통학차 운행이 한시간 늦어진다고... 덕분에 아이들은 눈밭에서 신나게 놀다가 학교에 갔다. 어젯밤에 신랑은 트럭을 끌고 산에 가서 텐트를 치고 잤다. 아마 밤새 좀 추웠을 게다. 그래도 잠결에 싸락싸락 눈 내리는 소리와 바람에 이는 솔바람 소리와 혹은 나뭇가지에 거칠게 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생이 충만하지 않았을까? 무거운 집과 그 집에 있는 온갖 소유물과 가족관계로부터 벗어나 그냥 얇은 텐트 한 장과 침낭으로 생명을 지탱하고, 짧은 하룻밤이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천지와 하나가 되는 이 ‘홀로’라는 가벼움. 아침이 되어 신랑은 걸어서 집에 왔다.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러워서 트럭을 못 가지고 왔단다. 신랑을 직장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날이 정말 춥다. 집안에서 꼼짝을 않고 있다가 점심을 먹고, 눈 온 날의 풍경이 아까워 산책을 나갔다. 외투, 모자, 목도리, 장갑, 마스크까지 중무장을 하고 나섰는데도 바람이 몹시 차다. 그래도 이 알싸하고 상쾌한 겨울바람이 너무도 좋다. 겨울 바람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머릿속 온갖 잡다한 것을 단번에 끊어내고 나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케 하는 힘이 있다. 초록빛 밀이 자라고 있는 넓은 들판에는 눈이 나직하게 덮여 있고, 손대면 깨질 듯한 청아한 쪽빛 하늘에는 작고 가벼운 구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논두렁 가의 갈대들은 바람에 휘적휘적 춤을 추고, 저수지에는 살얼음이 얼고, 얼지 않은 곳에서는 윤슬이 반짝이고, 저수지에서 놀던 물오리떼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펼쳐진 산자락들은 눈 맞아 희디 흰 산맥을 드러내놓고 (섬진)강을 연모해 휘달이고 있다. 그 사이 빈 허공에서는 “웅~~웅~~웅~~”회오리 바람인 듯, 황소 바람인 듯 거친 숨소리를 내고, 나무들이 있는 산에서는 “쏴아아~~” 산속을 휘감아 도는 소리가 나고, 굵고 큰 대나무들이 있는 곳에서는 대나무들이 서로 부딪히며 “타닥타닥” 소리를 내고, 두께가 가늘고 작은 대나무밭에서는 큰 바람이 사그라들어 “스스스스~~”여리고 편안한 바람소리가 난다. 큰 바람이 이렇게 잔잔한 바람이 되니 마음을 평온하게 어루만져 준다. 고맙다. 길을 걷다가 나무들이 없는 곳에서는 바람에 등이 떠밀리다시피 몸이 움직이곤 했다. 그렇게 추운 날씨 속에 40여분 정도를 걸어 토지면에 도착했다. 내 또래의 지인이 하는 작은 카페에 가서 카푸치노 한 잔을 시켜놓고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녀를 만나기 위해, 누군가 내려주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잘 알진 못하지만 오늘은 웬지 그녀를 만나 얘기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발품을 팔아 그녀에게 간 것이 아닐까? 누군가 보고 싶고, 마음 깊은 곳의 얘기를 나누고 싶어 차로 “씽씽~”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세찬 바람 속에서도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서 간다는 것, 그를 만나기 위해 온 세월 기다리고, 혹은 삼천일, 삼천배의 절절한 몸짓 뒤에 만나러 가는 것, 어떻게 보면 그리움의 깊이를 더하는 일이요. 정성의 마음을 들이는 몸짓이겠지. 그리하다 보면 나만 그에게 걸어갔던 것이 아니라 그도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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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 책 사랑방 이야기.굽이굽이 감돌아드는 섬진강 어디메쯤 헌책방이 생겼다. 그것도 작고 아담한 책방이 아니다. 부산에서 40년 넘는 오랜 세월 동안 헌책방을 운영하셨던 부부가 구례구역 맞은편에 3층짜리 책방을 내셨다. 마치 대학 시절의 도서관에 다시 온 듯한 그런 향수마저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2층, 3층에 올라가면 섬진강과 건너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강 건넛마을도 볼 수 있다. 단아하게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다가 고개 들어 유유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온갖 시름 떨쳐내도 좋을 자리이다. 이 중년의 나이만큼 오래된, 혹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책 향기를 맡으며 그저 묵묵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살아있음이 새삼 고맙고 행복해지는 자리이다. 국화꽃도 사그라들 무렵의 11월 중순쯤의 어느 날, 구례 시민들이 모여 있는 카톡방에 헌책방을 연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구례에는 작은 서점조차도 없고, 또 인터넷으로 물건 사는 걸 즐기지 않는 나는 친정이 있는 대전에 갈 때 오랜만에 대형서점에 들른다. 넓게 펼쳐져 있는 책들을 보고, 또 신간 서적들의 다양한 내용 들을 접하노라면 마음이 즐겁고 편안해지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곳에 있게 된다. 대형서점이 생기기 전에는 대전에도 작고 아담한 서점들이 몇 곳이 있었고, 또 시내에는 오래된 헌책방 거리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작은 서점들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대형서점만 운영되고 있다. 시골에 내려와 살게 되면서 제일 아쉬운 게 또래 친구와 문화예술과 책방이었다. 구례에서 살게 된 지 7년쯤 될 때부터 또래 친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문화예술도 간혹 누릴 수 있게 되었는데, 책방만은 여전히 아쉬웠다. 간혹 순천에 나갈 일이 있을 때, 혹은 광주에 갈 일이 있을 때 터미널 서점에 갈 수 있는 게 전부였다. 이런 현실 속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헌책방 서점이 열린다는 것은 정말 기쁜 소식이었다. 그것도 부산에서 40년 넘게 서점을 운영하신 헌책방 대부가 차리신다는 소문에 열 일 제쳐두고 서점 문을 여는 날에 온 가족이 함께 가서 그 잔치를 누렸다. 원래는 올 9월 초 오픈할 예정이셨다고 한다. 여름 무더위와 씨름하며 30만 권의 책을 옮겨왔는데, 지난 8월 8일, 상상할 수도 없이 무섭게 범람했던 섬진강 물난리로 거의 모든 책이 급류에 떠내려가거나 젖어버렸고 임시 보관소로 하동 창고에 저장 중이던 15만 권의 책도 유실되어 버렸다. 목숨과도 같은, 추억과도 같은 책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으니 부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옥상에는 수많은 책이 누워 있는데, 흙탕물에 잠겼지만,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고서적과 희귀본을 옥상으로 옮겨 그늘에서 말리고 있다 하신다. 그분들에겐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누군가 나지막하게 이렇게 말한다.. “섬진강은 나중에 어떤 좋은 선물을 준비했기에 그들에게 이렇게도 큰 시련을 주신 것일까...?” 그들은 남겨진 10만 권의 책을 일반 문학, 기술 서적, 원서, 사전, 단행본, 대학교재, 잡지, 고서…. 등으로 정리해서 책꽂이에 꽂았고, 누가 책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면 당신들 머릿속에 책의 위치가 저장되어 있어서 동행해주는 간단하고 친절한 옛 방식으로 책을 찾아주신다. 그리고 겸손이 몸에 배어 손님들을 대해 주시니 자꾸만 더 이곳을 찾게 만든다. ‘섬진강 책 사랑방’이 우리 집에서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벌써 여러 번 다녀왔다. 가족들과 가기도 하고, 때론 혼자, 때론 친구들과도 가고, 또 곡성에서 같이 책모임 하는 분들에게도 소개하여 이곳에서 책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마치 오랜 친구 같은 헌책들이 좌우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에서 정다운 사람들과 책모임을 했던 시간.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풍경이다. 이곳에서 따스한 차나 커피 한 잔 시켜놓고 그러한 모임을 한다면 더더욱 따뜻한 추억으로 남으리. 구례를 찾는 분들에겐 이곳 섬진강로 46로 ‘섬진강 책 사랑방’을 꼭 추천하고 싶다. 옛날 시골 마을의 사랑방을 찾듯 편안하고 정겨운 마음으로 이곳을 찾으면 좋겠다. 비록 그 공간은 부부가 마련하셨지만, 앞으로는 구례 사람들의 자랑이 되는 사랑방으로 거듭나길 소망해본다. 오래된 책이 가득 꽂힌 창가에 앉아 흘러가는 강을 보는 여유로움, 눈을 돌리면 속삭이듯 말을 걸어오는 책의 숨소리…. 혹시 우리는 이곳에서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타르타’를 꺼내 들고 읽다가 그가 보았던 그가 깨달았던 그 강물을 보게 되지는 않을까? (본문은 ‘지난여름 물난리로 책 30만 권 잃은 헌책방 주인 이야기’를 쓰신 김창승 님의 글에서 일부 발췌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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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보름을 이틀 앞둔 밤하늘에는 아직 채워지지 아니한 동그란 달이 떠 있다. 그래도 달은 훤하게 밝아 하늘에는 검 푸르스름한 양떼구름이 층층이 노닐고 저녁별 몇 개가 반짝이는 모습은 현묘한 밤하늘을 충만하게 느끼게 해 준다. 밤 9시 즈음, 섬진강이 가까이 흐르는 유곡마을 지인 집에 갈 일이 있었다. 시간이 늦어 아이들은 놓고 가려고 했는데, 주인 언니가 삼둥이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유곡마을 초입은 넓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산골 같은 느낌이 들고, 또 산세가 둥그스름하면서도 웅장한 맛이 있어 좀 독특한 느낌이 드는 마을이다. 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산길로 이어지는데, 지금의 섬진강 도로가 생기기 이전에는 이 산길로 구례읍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구례 오일장도 이 길을 따라서 보러 다니셨다고 한다. 작년 가을 즈음, 도시락 싸 들고 세 명의 벗들과 이 길을 걸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옛적 그대로의 모습이 살아있고, 풍광도 좋아 걷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5~6시간 정도 걸으면서 웃기도 많이 하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참 많이 한 것 같다. 유곡마을은 감 농사를 많이 짓는다. 저녁이라 어두운데도 하늘의 달은 밝아 주황빛 대봉감들이 고혹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밤의 미인 같은 느낌으로…. 언덕배기에 있는 언니네 집에 도착하자, 오늘 ‘전기 없는 날’을 하고 있다고 네 분이 마당에 따스한 모닥불을 피워놓고 우리를 맞아 주었다. 언니와 언니 남편, 남편의 조카, 그리고 민박 손님. 남편의 조카는 시골에서 살기 위해 내려온 젊은 총각이었고, 민박 손님은 이쁜 아가씨였는데, 시골의 일을 도와주고 당분간 숙식을 받는 모양이었다. (우프; 유기 농가에서의 세계적인 기회란 뜻으로 농업 체험과 교류의 NGO이다.) 이 네 분과 나와 삼둥이, 8명은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하늘의 달도 보고, 별도 보고, 구름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깊어가는 가을밤을 가슴 속 깊이 느꼈다. 말 그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할 수 있는 밤이었다. 전기가 있는 세상에 살다 보니 우리는 이제 밤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둡고 어두운 밤, 그 밤이 실은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걸고 있고, 내 가슴 깊은 곳을 두드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잠자기 전까지 불을 켜놓고 잠들 때가 되어서야 불을 끄는데, 그마저도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이나 가로등 불빛 때문에 칠흑 같은 어둠을 느껴보기가 쉽지 않다. 큰아이가 두 살 때쯤이던가? 우리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전기 없는 날’을 했었다. 냉장고를 제외하고는 모든 전기를 쓰지 않는 것이었다. 낮에는 크게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밤이 문제였다.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이런 것들이 결코 쉽지가 않았다. 아이는 한참 아장아장 돌아다니던 때였고, 나는 그런 아이를 돌보느라 동분서주 바쁘던 때였다. 더구나 시골 살림이라 바깥에도 할 일이 많았다. 저녁에 전기를 켜지 않고 촛불을 켜면 아이는 너무 신기해하며 그 불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촛불 아래서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놀아주고,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그런데, 처음 몇 달은 그런대로 지냈지만, 많이 힘들어서 나중에 아이가 좀 더 크면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둘째 낳고, 셋째 낳으면서 ‘전기 없는 날’은 한정도 없이 미루어졌다. 언니 집에서 따스한 모닥불을 쬐며 밤하늘을 누리고 나자, 우리도 다시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니 집에 다녀온 이틀 뒤, 시어머니 생신을 맞아 시댁 식구들이 모였다. 저녁에 우리 집 마당에 모여 함께 저녁을 먹고 날이 추우니 모닥불도 피우고, 거기에 고기랑 고구마도 구워 먹었다. 8시 즈음 되었을까? 우리 집 바로 뒷동산에서 환한 빛이 발하더니 잠시 후 둥그런 보름달이 쑥 나타났다. 우리는 그런 달을 보며 이야기꽃을 피웠고, 달은 점점 더 높이 떠서 서쪽으로 이동을 해 갔다. 저 달도 우리를 내려다보며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고, 흐뭇하게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저녁에 커튼을 닫지 않고 자다가 새벽녘 문득, 누군가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눈을 번쩍 뜨게 될 때가 있다. ‘누구지?’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저 하늘에서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보름달!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집 집마다 자가용이 있고,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먹을 것과 가진 것은 넘쳐나고, 인터넷과 스마트폰 세상으로 정보와 지식도 넘쳐나고, 카톡이나 페이스북으로 지구 저편에 있는 사람과도 순식간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정말 행복한가? 한없이 걸으며 나를 만나고, 너와 대화하고, 어둡고 신비로운 밤하늘에 하늘의 달과 별을 만나며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던 깊은 곳의 나도 만나보고, 그러면서 한 편의 시를 길어오려 한 장의 엽서와 편지로 그립고 그리운 나의 마음을 발효시켜 너에게 보내보고…. 이제는 속도와 물질의 문제가 아닌 느긋함과 여유로운 마음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살필 때인 것 같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 진정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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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함께 걷는 피아골 산행.입추와 말복이 지난 지 여러 날, 구례에도 코로나 환자가 생기기 시작해서 지역민들이나 학교에서도 무척 긴장하는 상태였다. 당분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학습을 하기로 했다. 집에만 있다 보면 삼둥이들이 심심하고 게임, 스마트폰을 하겠다며 실랑이질만 할 것 같아서 매일 산책을 하기로 했다. 먼저 가까운 화엄사 숲길을 천천히 걸어보고, 천은사 뒤안길과 새로 만들어진 푸르른 저수지 길도 걸었다. 아이들 아빠가 쉬는 날이면 함께 걷기도 했다. 화엄사와 천은사 계곡 길을 걸을 땐 아이들이 계곡물에 뛰어들어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신나게 놀았다. 첨벙첨벙 물에 뛰어들고, 또 뛰어들었다. 세상에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기나긴 장마 끝에 내리쬐는 햇빛은 말복이 지났는데도 그동안 못다 내린 햇살을 퍼붓듯 따갑게 느껴지고, 더위에 열 받은 물은 차갑게 느껴지질 않았다. 그리고, 구름이 산 아래 낮게 깔린 날에는 오산 사성암에도 올라가 널따란 구례 들판과 굽이굽이 흘러가는 섬진강을 바라보고 왔다. 그런데, 세 아이를 데리고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피아골! 둘째는 올해 연달래 필 무렵에 고모 가족들과 피아골을 다녀왔는데, 큰아이와 막내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 피아골은 우리 집에서도 꽤 먼 느낌이 있어 일 년에 한두 번밖에 가보지 못하고, 그래서인지 아이들을 데리고 대피소까지 다녀오는 일은 엄두 내기가 어려웠다. 더군다나 키도 작고 몸집도 작은 막내가 작년까지는 걷는 걸 힘들어하고, 조금 걷다가도 업어달라고 했다. 그런데, 올해는 내가 가끔 산책하거나 할 때 데려가면 제법 잘 걸었다. 올 초에 아이 아빠가 노고단에 갈 일이 있었는데, 막내가 따라가겠다고 떼를 써서 업어달라거나, 떼쓰거나, 못 가겠다고 주저앉으면 안 된다는 약속을 굳게 하고 산에 올랐는데, 웬 걸! 좀 천천히 올라가긴 했지만 군말 없이 잘 올라갔다고 한다. 그리고, 작년에 막둥이랑 한 약속이 있었다. 작년 겨울, 눈이 하얗게 덮인 지리산 바래봉을 여러 가족과 올랐는데, 아이들도 같이 갔었다. 그런데, 우리 막둥이는 걷는 것도 힘들어하고, 체력도 딸려서 도저히 데려갈 수가 없었는데, 아이는 그게 무척이나 서운했나 보다. 그래서, 밥 잘 먹고 튼튼해지고, 엄마가 산책갈 때 열심히 따라다니면서 많이 걷다 보면 내년엔 겨울 산행을 갈 수 있을 거라고 약속을 했다. 세 아이를 데리고, 피아골로 출발하기 전에도 고민을 많이 했다. 요새 계속 걷기만 하고, 다른 재미있는 장소는 안 간다고 세 녀석의 불만이 쌓여 있는데, 꽤 먼 거리인 피아골 대피소까지 간다면 안 갈 게 뻔했다. 그래서, 거기 가서 김밥과 컵라면으로 점심을 먹자고 꼬드기니 세 녀석이 앗싸~~하며 모두 넘어온다. 주섬주섬 도시락을 챙기고, 굽이굽이 기나긴 피아골 도로를 올라 산 입구에 차를 받쳐놓고 걷기 시작했다. 그런데, 멀미 때문인지 산행 초입부터 아이들이 걷는 걸 마뜩잖아한다. 얼마 전까지도 비가 계속 내려 계곡은 물이 불어나 장쾌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아이들은 시큰둥하다. 피아골 계곡은 무척 깊숙하고 깊다. 그래서 구석구석 멋진 계곡의 경치를 보는 맛이 참 좋다. 땅에서 꽤 깊숙이 꺼져 아래로 흐르고 있어 아찔하기도 하고, 장엄한 느낌도 든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땅만 보고 걷는다. 한참을 걷다가 길에서 계곡이 가까운 곳에 이르자, 애들은 또 물 만난 물고기처럼 수영하고 싶다고 한다. 처진 기분을 달래줄 겸, 계곡물이 얕은 곳에서 잠시만 놀다 가자고 해서 아이들은 한바탕 신이 나게 놀았다. 물놀이를 마치고 나서는 기분도 상쾌해졌는지 잘도 걷는다. 막내도 생각보다 훨씬 잘 걸었다. 그래도 왕복 4~5시간 정도를 걸으면 아이들이 항의를 할 것 같아서 중간쯤 걷다가 점심을 먹고 내려가자고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오히려 아이들이 대피소까지 가서 밥을 먹자고 하여 내가 막둥이 챙겨 가느라 체력이 바닥날 지경이 되었다. 어찌 됐든 드디어 대피소에 도착했는데, 예년 같으면 등산객들로 한창 붐빌 시기인데, 사람 한 명 보이지 않고, 코로나로 인해 관리인들도 보이질 않는다. 다람쥐 몇 마리가 쪼르르 달려와 우리 옆을 왔다 갔다 할 뿐이었다. 그래도 우리 네 사람은 밥을 맛있게 먹고 그곳의 기운과 풍광에 젖어 있다가 하산을 하였다. 하산을 하는 세 아들 녀석의 뒷모습을 바라보는데 너무도 든든하고 고맙게 느껴졌다. 우리 아이들이 언제 저렇게 자라 이 엄마랑 피아골 산행을 같이할 정도가 되었나 세월이 참 빠르게도 느껴졌다. 마을 입구, 가게에 내려왔을 때 어떤 아저씨 한 분이 어디까지 갔다 오느냐고 물으신다. 대피소까지 갔다 왔다고 했더니 아까 내려오다가 우리를 봤다고 하시며 아이들을 불러 아이스크림을 사주고 싶다 하셨다. 그러면서, 이렇게 아이들이 산행하는 게 너무 보기 좋으시다며 칭찬을 해 주셨다. 아이들은 아이스크림도 선물 받고, 칭찬도 듬뿍 받아서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바이러스로 인해 부모가 아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면역력을 키워주는 일인 것 같다. 집단방역도 참 중요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나는 자연 속에서 신나게 놀고, 걸으면서 자연의 충만한 기운을 받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함께 자연 속에서 많이 걷고, 많이 누려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