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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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 교육칼럼김광호 여수 여양중학교 국어과 교사 국민은 왕이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기 때문이다. 혹 영화 타이타닉 남자 주인공 잭을 기억하는가? 그는 무명 화가였기에 가진 돈이 없었다. 그는 대서양을 건너갈 배표를 구하기 위해 도박을 한다. 이렇게 도박에서 딴 돈으로 표를 구해 배에 오른다. 그리고 그는 뱃머리에서 드넓은 바다를 향해 “나는 왕이다”라고 당당하게 외친다.우리의 눈으로 잭을 보면 그는 무능력자며 실패자이다. 그런 그가 자신을 왕이라고 외치는 것을 보며 우린 그가 참 많이도 부족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높은 지위나 많은 돈 앞에서도 절대 굴종하지 않고 자존감 높은 삶을 사는 인물이다.문득 광고의 대부 박웅현이 말했던 문턱증후군이 떠올랐다. 대한민국은 그 문턱만 넘으면 인생이 달라진다는 믿음에서 시작되는 잘못된 증상인 문턱증후군이 일상화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판사, 의사, 서울대, 삼성 등등 왜 어떤 직함, 대학, 회사 이름 앞에서 약해지는지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누구나 문턱만 넘으면 의심 없이 인정해 주는 것이 정말 좋은 사회일까? 저 대학, 직장, 직업에 있는 사람은 다 똑똑하고 그런 사람은 다 존경할 만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살아본 사람은 쉽게 답하지 못할 것이다. 삶은 그리 단순하게 도식화할 수 없기 때문이다.오래전부터 문턱증후군에서 비롯된 대학과 직업이 우리 사회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문턱을 넘지 않았다는 이유를 대며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의 숨통을 움켜쥐며 권위의 칼춤을 추고 있다. 오늘도 이러한 모습을 매스컴에서나 일상에서 보고 살아야만 할 운명이다.우리 솔직해지자. 검사, 의사들은 그 분야에서 최고의 기능인이다. 국가는 그들의 실력을 인정해 공익에 부합하라고 기능인이라는 자격을 주었다. 그 분야에서 최고의 전문지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은 당연히 존중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이 인간성이나 공동체 의식 등 모든 면에서 최고라고 말할 수는 없다.현실은 어떠한가? 문턱증후군이 사회 곳곳에서 막춤을 추고 있다. 이런 막춤을 오래전부터 비판 없이 묵인하다 보니 많은 사람이 문턱증후군을 추종하고 있다. 부모는 자신이 넘지 못한 문턱을 자식은 반드시 넘어야 한다고 억지 공부를 강요하고 있고 아이들도 그 문턱을 넘겠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권위와 존경은 대학이나 직업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어떤 일을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면서 얼마나 자존심을 갖고 진정성을 다했는가를 봐야 한다. 검사나 의사가 아닌 평범한 직업일지라도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의 삶에 권위를 부여하고 존경을 표해야 한다.이제부터라도 우리는 문턱증후군에서 나온 권위에 도전해야 한다. 절대 동의 되지 않은 권위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된다. 권위와 존경은 그 사람의 언행에서 나온다는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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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 교육칼럼김광호 여수 여양중학교 국어과 교사 과연 학교는 아이들에게 입체적 수업을 실행할 수 있을까? 새 학기가 곧 시작된다. 지금 학교는 본질적인 질문에 답해야 한다. 삶은 입체적이다. 똑같은 삶은 절대로 반복되지 않는다. 교육의 얼굴은 어떠한가? 교육은 평면적이다. 왜 학교는 아이들에게 입체적 수업을 멀리하고 평면적 지식만을 전수하는지, 그런 질문에 응답해야 한다. 초등학교와 중학교까지는 입체적 교육을 다양하게 실현하고 있다. 문제는 고등학교에서 이런 수업이 소리 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오직 대학 입시를 준비하기 위한 평면적 교육만이 춤을 추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세 번 태어난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나와 세상과 만남이 첫 번째 태어남이다. 학교에서 세상을 알아가는 것이 두 번째 태어남이며 자신이 삶을 직접 느끼고 해석하며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이 세 번째 태어남이다. 이렇게 아이들은 세 번 태어나지만, 우리 교육은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가지 못하고 두 번째 마당에 머물게 하는 폐쇄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아이들은 세 번째 태어남을 통해 자아를 찾을 수 있으며 삶 또한 풍요로울 수 있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세 번째 태어남의 기회를 주기 위하여 고민해야 한다. 지금의 수업은 아이들이 진정 알아야 할 것을 가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학교는 아이들에게 ‘동학, 비발디, 도스토예프스키, 미적분’ 등을 가르쳐 주었기에 그들이 잘 알고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이들이 정말 잘 알고 있을까? 생각해보라. 겉만 알 뿐 본질은 알지 못한다. 그 본질을 알기 위해선 아이들이 주체적으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학교는 아이들이 그 본질을 알 수 있도록 수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게 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도 세상에 호기심을 갖고 질문을 할 수 있다. 그것을 가르치고 안내하는 것이 교육이요 학교의 역할이다. 지금처럼 시험을 보기 위해 겉만 가르쳐 주고 그것을 암기하게 하는 수업은 당장 멈추어야 한다. 학교여! 아이들이 ‘동학, 비발디, 미적분, 서울의 봄’ 등을 학교에서 다 배워서 안다고 말하지 말라. 그런 지식은 인터넷에서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아이들이 지식을 익히기 전에 관심을 갖게 해야 한다. 그리고 온몸으로 느끼게 해야 한다. 아이들이 지식을 온몸으로 느끼고 받아들일 때 그들은 지식을 따뜻하게 품을 수 있다. 또한, 호기심에 불타 관심을 나타내며 끊임없이 질문을 할 것이다. 그러다 보면 삶의 문이 천천히 열릴 것이요, 배움의 가치는 혈액과 영혼을 타고 계속해서 흐를 것이다. 학교여! 이런 교육을 이상적이고 실현 불가능하다고 말하지 말라. 그것이 실행되었을 때 아이들의 삶은 풍화되기보다는 시간의 엄호를 받으며 더 단단해질 것이다. 어떤 방법이 더 본질적인 교육인지 냉정하게 생각해보라. 오늘, 한 달, 일 년 후에 잊혀질 지식보다 시간과 싸워가며 본질을 느끼고 질문하며 알아가는 지식이 절실히 필요하지 않을까? 새 학기부터는 요약하고 암기하는 교육은 사라져야 한다. 그것은 캔 속에 들어있는 맛없는 지식이다. 그 지식을 아이들에게 언제까지 억지로 먹일 것인가? 아이들이 그걸 먹으며 맛있다고 감동하겠는가. 맛도 없겠지만 흥미까지 잃어버리게 할 것이다. 결국, 그 지루하고 따분한 지식은 아이들의 자아와 삶을 병들게 할 뿐이다. 학교여! 이번 새 학기에 효율을 포기하고 좋은 스피커를 가져다 놓고 아이들에게 비발디의 사계를 들려주자. 학교여! 이번 새 학년에는 능률을 생각하지 말고 창 넓은 도서관에서 아이들에게 '죄와 벌'을 읽게 하자. 분명히 많은 아이는 감동하고 사계와 죄와 벌에 관심을 가질 것이다. 그것이면 된다. 그 이후로는 아이들이 스스로 길을 찾아갈 것이다. 많이 가르치는 것이 좋은 수업이라는 생각은 이젠 버려야 한다. 많은 지식을 전달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수업이여! 통찰하라. 아이들은 권장도서 100권을 꼭 외우고 읽지 않아도 인생을 얼마든지 풍요롭게 살 수 있다. 과연 학교는 아이들에게 그런 수업을 실행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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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 교육칼럼김광호 여수 여양중학교 국어과 교사 어디 약자의 마음을 훔쳐 가지 않을 사람 없는가. 박완서 작가는 서민의 마음을 1975년에 소설 '도둑 맞은 가난'에서 그려놓았다. 어떻게 가난까지 훔칠 수 있을까? 줄거리는 대충 이러하다. 가난한 여주인공과 가난을 경험하러 온 부잣집 청년의 이야기다. 주인공의 부모는 지독하게 가난한 삶을 비관해 자살했고, 주인공은 공장에 다니며 노동자이자 빈민의 삶을 살아간다. 주인공은 자취비용을 아끼려고 남자와 동거를 하는데, 그 남자는 알고 보니 부잣집 도련님이었고, 아버지의 명령으로 가난을 체험하러 왔다.좀 더 소설로 들어가 보자. "여 봐, 이러지 말고 이제부터 내가 하는 소리를 정신 차리고 똑똑히 들어. 나는 부잣집 도련님이고 보시는 바와 같이 대학생이야. 아버지가 좀 별난 분이실 뿐이야. 방학 동안에 어디 가서 고생 좀 실컷 하고, 돈 귀한 줄도 좀 알고 오라고 무일푼으로 나를 내쫓으셨던 거야. 알아듣겠어."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부자들이 제 돈 갖고 어떻게 살아가든 그들의 자유겠지만 가난을 희롱하는 것만은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아니 가난을 희롱하는 건 용서할 수 있을지라도 가난한 사람을 모욕하는 건 절대 용서할 수 없다. 서민의 가난이 어떤 가난이라고 함부로 말장난하고 몸짓을 한단 말인가.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것이다.가난의 비극을 엿보자. "여주인공은 청년에게 돈을 받아 그의 얼굴에 내동댕이치고 그를 내쫓았다. 그를 쫓아 보내고 자신이 얼마나 떳떳하고 용감하게 가난을 지켰나를 뽐내며 방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그 방은 좀 전까지의 방이 아니었다. 그녀의 가난을 구성했던 살림살이들이 무의미하고 더러운 잡동사니가 되어 내동댕이쳐져 있었기 때문이다."안타깝게도 그녀의 방에는 이미 가난조차 없었던 것이다. 다름 아닌 남자 주인공 상훈이가 가난을 훔쳐갔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자들이 빛나는 학력, 경력만 갖고는 성이 차지 않아 가난까지 훔쳐다가 그들의 삶을 한층 다채롭게 할 가십거리로 삼고 싶어 한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요즘 매스컴에 여당 위원장의 연탄 나르기 장면이 화제이다. 서민의 잠자리를 어루만지기 위한 노동을 하면서 얼굴에 검정 칠을 하고 웃을 수 있는 저 모습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혹 그는 박완서의 소설 남주인공의 삶처럼 연탄을 실은 리어카를 끌면서 서민의 마음을 도둑질한 것은 아닐까.공당의 위원장이 연탄을 나르면서 웃음을 지으며 여유를 부리는 사진은 서민들의 삶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훔치는 행위이다. 그는 연탄 나르기가 끝나고 나면 곧바로 마천루같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에 가짜 가난을 공유하고 있을 뿐이다.그는 이런 가난 경험을 보여주며 엘리트로 살아가는 자신이 큰 인물임을 드러내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 평생을 산동네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얼마나 깊은 모멸감과 수치심을 느꼈을까. 특히 그들은 자신들의 삶이 사진 찍히는 대상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자괴감마저 들었을 것이다.국민을 속이고 소외시키며 그들의 마음을 훔치겠다는 그의 진중하지 못한 언행은 두고두고 기록에 남을 것이다. 더 이상 국민의 마음을 도둑질하는 정치인들이 나오지 않길 바라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까?박완서의 소설 '도둑맞은 가난'은 결국 이제 부자들이 서민들로부터 뺏을게 없어서 가난마저 뺏어간다며 절망하는 여자 주인공의 넋두리로 마무리 된다. 어디 서민의 마음을 훔쳐가지 않을사람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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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스형! 소크라테스 한국에 오다김광호 여수 여양중 국어과 교사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아테네의 현자, 소크라테스가 죽은 지 2000년이 넘었다. 그가 부활하여 홀연 서울 한복판을 배회하였다. 그리고 그는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무거운 질문을 던졌다. 여러분은 어리석인 사람(愚衆)입니까, 아니면 현명한 사람(賢衆)입니까?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진리와 정의를 사랑하십니까, 아니면 돈과 명예에 더 집착하십니까? 제가 살았던 아테네 시민들은 명예와 힘을 자랑하기 위하여 돈(Money)에 빠졌습니다. 이름이나 명예에만 관심을 두었지 진리와 바른 삶에는 마음을 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잠시 서울을 돌아보니 여러분 또한 진리나 바른 삶보다 돈과 지위에 집착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학교나 공부가 바른 삶을 안내하기보다 경쟁에서 이기는 방법만을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여러분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리석은 시민이 되어버렸습니다. 늘 삶의 본질에 대하여 생각을 하지 않으니 질문 또한 사라졌습니다. 혹 여러분은 어리석은 대중입니까, 깨어있는 대중입니까? 삶을 대하는 아테네 시민과 여러분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삶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잃어버린 사람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돈과 힘을 얻을 수만 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지향하고 있습니까?‘ 소크라테스는 기원전 399년 봄, 아테네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고 생을 마감했다. 그것도 그가 가장 사랑했던 아테네 시민들에게 목숨을 빼앗겼다. 그는 약 30년 동안 아테네 시민의 정신혁명을 위하여 자신의 생애를 바쳤던 철학자였다. 그는 부패하고 타락한 아테네 시민들의 마음을 바로잡기 위하여 헌신하였으며,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바른 삶을 안내하기 위하여 대화를 멈추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 돌아온 것은 법정 심판이었다. 기득권을 지키려는 정치인과 어리석은 시민이 하나 되어 소크라테스를 법정에 세우며 소장(訴狀)에는 다음과 같이 썼다. ‘소크라테스는 국가가 정한 신들을 믿지 않았고, 새로운 신(神)을 끌어들였으며 청년을 타락의 길로 이끌었다. 그 죄는 마땅히 죽음에 해당한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신앙을 어지럽히고 청년을 유혹했다”는 죄명으로 고소되었다. 아테네 시민 5백명으로 구성된 법정에서 그는 사형선고를 받고 저승으로 향할 수밖에 없었다. 누가 소크라테스를 죽였을까? 아테네의 어리석은 시민이었다. 아니다. 그 시민을 깨어나지 못하게 했던 정치인들이었다. 그들은 말로는 시민들을 사랑하고 돌볼 것처럼 했지만 행동으로 보여주지 않았다. 결국 아테네 시민의 무지와 오판이 소크라테스를 죽였다. 그를 죽인 것은 진리와 정의를 죽인 것이다. 기억해야 한다. 진리와 정의를 죽인 나라는 머지않아 쇠망한다는 사실을. 아테네의 역사를 보라. 아테네는 소크라테스가 죽은 지 61년이 되던 해, 마케도니아에 패망하고 말았다. 소크라테스는 자기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아테네5백명의 배심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자, 떠날 때가 왔다. 우리는 길을 가는 것이다. 나는 죽으러 가고 여러분은 살러 간다. 누가 더 행복할 것이냐, 오직 신(神)만이 안다.’ 또한 그는 감옥에서 독배를 마시기 전에 제자 플라톤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생존에 앞서 “어떻게 사느냐”를 거듭 강조하며 바른 삶과 진리와 친하게 지낼 것을 말했다. 소크라테스는 연설을 계속해서 이어갔다. 여러분도 바른 삶을 원할 것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 삶일까요? 여러분 중에서 거짓된 삶, 추악한 삶, 무의미한 삶을 원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바로(바르게, 정의롭게)”라는 말을 생활화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생각, 말, 행동, 생활까지 “바로” 해야 합니다. 특히 정치, 교육, 경제가 “바로” 서야 합니다. 잘 산다는 것은 다름 아닌 “바로”가 선행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지금처럼 돈을 맹목적으로 추종하고 힘을 얻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삶에는 빨간불이 켜질 것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정수리에 침을 놓는 듯한 연설을 마침내 마쳤다. 그는 광장 주변을 둘러보고 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울을 떠났다. 광장에 모였던 시민들은 쉬이 그곳을 떠나지 못했다. 그때 광장에 설치된 스크린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쓰였다. ‘사람은 사리사욕에 빠지면 어리석은 대중으로 전락한다. 아무리 똑똑한 시민도 군중심리에 사로잡혀 이기적인 삶을 살게 된다. 다만 바른 생각과 질문을 언제든지 할 수 있다면 깨어있는 대중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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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 당신은 누군가의 꿈을 갉아먹는 어른입니까?T군은 돈을 택하지 않고 꿈을 이어갔다. 6년 전까지 강원도 춘천에 인문학카페 36.5⁰가 있었다. 이색적인 것은 이 카페의 출입문 입구에 주인장의 인생관을 담은 듯한 출입금지라는 단어가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것도 아이들을 훈계하듯이 빨간색으로 출입 금지를 크게 써 놓았기 때문이다. “돈을 중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은 정교한 건물이나 예술작품을 보아도 값어치만을 생각한다. 무심히 지나치는 건물과 작품에 깃들어진 누군가의 땀과 인생은 생각할 수 없다. 당신은 무엇을 바라보는가.? 누군가의 꿈을 듣고 밥 벌어먹겠냐는 말이 먼저 나오는 사람은 출입금지다.” 카페 주인은 기성세대에게 하고픈 말을 출입문에 붙어놓고 직업과 꿈 그리고 삶에 대하여 생각해보게 한 것은 아닐까. 혹 당신은 누군가의 꿈을 갉아먹는 어른입니까, 아니면 누군가의 꿈을 응원하는 사람입니까? 어른들은 T군이 대학 및 학과를 선택했을 때 "그 대학에 가면 취업이 안 되니 가지 말라. 그 학과에 들어가면 빌어 먹는다“고 노골적이고 직설적으로 말했다. 꿈을 꾸는 T군에겐 맑은 하늘에 날 벼락같은 소리였다. T군은 철학을 공부하고 싶어 했다. 그는 호기심이 많았기에 질문을 자주 했다. 그러나 어른 백이면 백 모두 "철학과는 가난하고 실업자를 키우는 학과이니 그런 과에 들어가면 인생 망친다"고 충고했다. 그렇게 말하는 어른들은 과연 철학과를 나왔을까.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을 쉽게 할까.? 우리 사회가 만들어 놓은 사람과 직업을 바라보는 잘못된 시선 때문이다. 철학과를 나오면 꼭 철학에 관련된 일을 해야 할까? 혹 다른 직업을 선택하면 안 되는 걸까? 우리 사회는 정말 이상하다. 답을 정해 놓고 꿈을 꾸게 하는 참으로 천박한 자본인이 넘쳐난다. 결국 T군은 자신이 배우고 싶은 철학과에 입학했고 다양한 책을 읽으며 질문에 질문을 거듭하며 희열을 느꼈다. T군은 가정형편이 넉넉지 않아 짬 시간을 내서 아르바이트를 병행했다. 하루는 일용직 사무실을 통해 노동일을 했다. 모래, 자갈, 시멘트를 혼합하여 길을 포장하는 작업이었다. T군의 손놀림과 몸동작이 얼마나 빨랐던 지 옆에 있던 감독자가 깜짝 놀랐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T군, 대학생 맞아? 어떻게 그렇게 일을 잘해. 그 대학 졸업하면 취업 안 되는 줄 알지? 취업도 안 될 것인데 왜 다니고 있는지 모르겠네. 내 밑으로 와서 일하면 금방 돈을 벌 수 있어. 어떤가. 당장 말하기 곤란하면 생각해보고 전화해.” 분명 감독자는 T군을 생각해서 말했을 것이다. T군이 얼마나 성실한지 성적은 얼마나 좋은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을 것이다. T군은 철학과에서 배움에 대한 만족도가 매우 높았다. T군은 노동일을 해서 돈을 많이 벌고 싶은 유혹에 빠질 수도 있었지만, 끝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배움을 이어가겠다며 용기 있게 세상과 맞섰다. 그는 돈을 택하지 않고 꿈을 이어갔던 것이다. 춘천에 있었다는 '인문학카페 36.5⁰'로 다시 가보자. 그 카페 운영자는 젊은 사장이었다고 한다. 그는 춘천에 서점들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자신이 좋아했던 책을 판매하는 서점을 열었다. 서점들이 다 술집이나 옷 가게로 바뀔 때 그는 왜 그런 돈이 안 되는 직업을 택했을까? 도시는 온통 책을 읽지 않았고 도시는 생각하지 않은 사람이 늘어나고 있을 때 그는 그 서점을 운영하는 것이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대학가에 서점이 없다. 영어나 자격 공부 외에도 우리는 배울 게 너무나 많다. 사랑, 삶, 관계, 사회, 역사, 예술, 그리고 나 자신. 한 달 뒷면 한 살 더 먹는다. 늦기 전에 공부하자. 이곳이 바로 서점이고 친구고 멘토이자 대학이다.” 이 글 또한 그 젊은 사장이 카페를 열면서 썼던 그만의 꿈에 대한 생각이다. 누가 그 사장님의 삶에 돌멩이를 던질 수 있을까? 누가 그의 삶을 어리석고 멍청하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당신은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알게 모르게 학생들의 꿈을 앗아가고 있다. 어른들의 삶 또한 녹록하지 않다. 어른들도 몇 번이나 넘어지고 일어나길 반복하며 삶을 이어온 지금 과연 학생들에게 수학 공식처럼 삶을 안내하는 것은 만용이라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다. 며칠 전 T군을 만났다. 그는 지금 평범한 회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왜 철학에 관련된 일을 하지 않느냐고 물었더니, 회사에서 인문학 분야의 연구직에 있다고 했다. 결국 지금의 직업이 그가 꿈꾸었던 철학에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인문학카페 36.5⁰'를 운영했던 그 사장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단언할 수 없지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행복 나눔을 이어가고 있을 것이다. 멀리서나마 주인장의 삶을 응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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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검정고시가 이상하다.왜 학생들은 검정고시로 발길을 돌릴까? 국·영·수를 잘 가르치면 교육의 정상화가 이뤄질까? 요즘 학생들은 왜 학교에서 벗어나 검정고시로 발길을 돌릴까? 검정고시는 자존심에 상처를 입고서 “난 입시제도의 사생아가 아니다”라고 슬프게 말한다. 혹 검정고시에 대하여 들어 보았을 것이다. 검정고시는 정부가 정한 정규 교육과정(초, 중, 고등학교)을 이수하지 않거나 중간에 그만두었던 사람들이 정규 교육과정을 이수한 사람들과 동등한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도록 평가하는 시험 제도이다. 국가는 초, 중, 고에서 개인상의 사유로 졸업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몇몇 과목의 시험을 보게 한 후에 졸업과 비슷한 자격을 주는 것이다. 우리 공교육의 목적은 입시교육이 아니다. 그렇기에 학벌에 따른 서열주의를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공교육의 목적이 대학입시와 학벌주의의 양 날개를 달고 엄연히 날고 있다. 공교육은 학생 개개인이 각자가 꿈을 향해 달려갈 수 있도록 다양한 환경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학생들을 막다른 골목에 집어 놓고 그 좁은 길을 빨리 빠져나가야 한다고 강요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국민은 공교육의 방향에 대하여 의심의 눈을 거두지 않고 있다. 검정고시는 공교육을 우회하는 방식으로 입시교육을 회피하며 악용되고 있다. 검정고시를 통해 학위를 취득했을 경우 법적으로는 학력 차별을 받지 않지만, 현실에서는 어려운 점이 많다. 최근 3년 동안 고등학교 자퇴생의 숫자를 알면 깜짝 놀랄 것이다. 문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학교를 그만두는 학생이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 이면에는 대입 정시와 내신 절대평가 확대가 학생들의 자퇴를 부추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강득구 국회의원실에서 공개한 최근 4년간 고등학교 자퇴생(학업중단) 현황에 따르면, 지난해 2만3,440명의 학생이 학교를 그만뒀다. 코로나19로 2020년에는 1만 5,163명으로 급감했지만, 2021년 1만 9,467명으로 계속 늘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최근 4년간 고교 자퇴생의 절반 이상이 1학년이라는 점이다. 22년도 고교 학업중단 학생은 1학년이 1만 2,078명(51.5%), 2학년 9,271명(39.6%), 3학년 2,091명(8.9%) 순으로 1학년 학생이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렇게 자퇴한 학생은 대부분 검정고시를 통해 대학입시를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치밀한 계산 끝에 이뤄지는 자퇴, 검정고시 한편 종로학원 '대학알리미' 자료에 의하면 서울대·연세대·고려대의 검정고시 출신 입학생 비율이 점점 높아질 뿐만 아니라 전국 4년제 대학 검정고시 출신 입학생 숫자 또한 계속 증가하고 있다. 2019년 4,521명에서 2023년 7,690명으로 무려 70.1% 증가했다. 이처럼 자퇴생의 숫자가 늘어나는 이유는 무얼까? 다름 아닌 수능 위주 정시의 중요도가 높아진 대입제도의 변화 때문이다. 획일화된 문제 풀이 방식 또한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더 나가 코로나19를 겪으며 비대면 수업을 진행했던 학생들이 학교 수업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거나 대면 수업에 적응하기 어려운 부분도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검정고시를 보면 어떤 좋은 점이 있을까? 검정고시에 응시하려면 학교 자퇴 후 6개월이 지나야 가능하다. 학교 내신이 안 좋으면 고등학교 1학년 2학기 때 자퇴하고 이듬해 4월에 검정고시에 응할 수 있다. 이 또한 치밀한 계산에 의하여 자퇴를 하는 것이다. 만약 검정고시에 합격하고 수능을 치러 성적이 좋으면 곧바로 대학에 진학하고 그렇지 않으면 다음 해에 한 번 더 응시할 수 있는 특권까지 주어진다. 그렇다면 이런 자퇴생이 늘어나는 현상을 공교육 정상화로 막을 수 있을까?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21세기 흐름에 맞는 혁명적인 교육제도를 도입하지 않는 한 공교육 정상화는 꿀 바른 말장난에 불과하다. 우리 국민은 언제까지 대학 입학률이 75% 이상이라고 자랑만 할 것인가? 유럽의 많은 나라는 40% 전후의 대학 입학률을 보이고 있지만, 우리나라보다 훨씬 질 높은 교육을 하고 있으며 교육제도에 대한 국민의 만족도 또한 높은 편이다. 정부나 정치인은 공교육 정상화를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그냥 말로만 공교육 정상화를 주장하지 말고 알맹이 있는 교육프로그램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이야기하기 바란다. 그들은 공교육 정상화를 말할 때 학생마다 꿈이 다름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그들은 보편적으로 수능시험 점수 높이기와 인지도 있는 대학 보내기로 교육 정상화를 말하고 있으니, 마치 나무에서 물고기를 찾는 격이다. 정말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국, 영, 수를 잘 가르치면 교육의 정상화가 될까? 흔히 말하는 서울에 있는 명문 대학에 학생들을 많이 보내면 공교육 정상화가 이루어질까? 모든 것을 수능시험 점수 높이기와 인지도 있는 대학 보내기로 교육을 이야기하는 현실이 참담하기만 하다. 이렇게 정부나 정치인은 교육의 개념을 좁게 정의해놓고 툭하면 교육의 정상화를 말한다는 것은 아재 개그에 가깝다. 평수 넓은 집과 고급 차량 그리고 높은 지위까지 세 박자를 갖출 수 있는 학생을 키우는 것을 공교육 정상화라고 주장한다면 치졸하고 옹색한 교육을 계속하겠다는 말밖에 해석할 방법이 없다. 29년 전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표한“교실 이데아”의 가사를 읽어보길 권한다. 그들의 노래 가사에서 공교육이 지향해야 할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추신 : 서태지와 아이들이 발표한 '교실 이데아'의 가사이다. “됐어(됐어). 이제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족해) 이젠 족해(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놓을래. 매일 아침 7시 30분까지 우릴 조그만 교실로 몰아넣고 전국 9백만의 아이들의 머릿속에 모두 똑같은 것만 집어넣고 있어. 막힌 꽉 막힌 사방이 막힌 널 그리곤 덥썩 모두를 먹어 삼킨, 이젠 지겨운 교실에서 내 젊음을 보내기는 너무 아까워.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니 옆에 앉아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 왜 바꾸진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해멜까? 바꾸진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됐어(됐어). 이제 됐어(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그걸로 족해(족해) 족해(족해). 내 사투로 내가 늘어놓을래. 국민학교에서 중학교로 들어가면 고등학교를 지나 우릴 포장센터로 넘겨 넌 보기 좋은 널 만들기 위해 우릴 대학이란 포장지로 멋지게 싸 버리지. 이젠 생각해봐 대학 겉모습은 가린 채 근엄한 척한 시대가 지나버린 너 좀 더 솔직 해봐. 넌 할 수 있어.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니 옆에 앉아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비싼 네가 될 수가 있어. 왜 바꾸진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해멜까? 바꾸진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왜 바꾸진 않고 마음을 조이며 젊은 날을 해멜까? 바꾸진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됐어, 됐어, 됐어, 됐어. 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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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바라는 자아는 아이들의 진짜 자아가 아니다,마침내 어린 아이가 걷는다. 넘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몸으로 익힌 결과이다. 초등학생이 되면서 자전거를 탄다. 좌충우돌하며 넘어지더라도 오뚝이처럼 우뚝 일어난 결과이다. 중학생이 된 지금 수영까지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물이 정말 무서웠다. 물길을 가르며 앞으로 간다는 것은 두려움 그 자체였다. 물 먹기를 거듭하면서 손과 발의 움직임을 느끼며 마침내 물과 하나 됨을 깨달았다.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아이들이 성인이 되기 위해서는 "산에 오르기" 즉 "꿈을 요청하는 외침"이라는 통과의례를 거치게 한다. 그들은 성인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를 비전 퀘스트(Vision Quest)라고 부른다. 때가 되면 아이는 몸을 정화한 뒤 홀로 산 정상에 오른다. 그곳에서 며칠 동안 금식을 하며 그들이 믿는 절대자와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 처음으로 인생의 주인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아이는 그 고난을 극복함으로써 자신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게 되고 마침내 산을 내려온다. 크리크 족 인디언 어른인 베어 하트(곰의 가슴)는 이것을 자아 발견의 시간이요 정신적인 거듭남이라고 말하며 "비천 퀘스트 의식에서 우리는 첫 번째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어떤 일에 성공하려면 자신이 누구인가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외적 수단으로는 그 답을 얻을 수 없다. 해답은 자기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자만심과 부족한 인내심은 자기 안의 위대한 신비를 보내는 메시지를 가로막는다."라고 덧 붙인다. 산다는 것은 낯섦과 끊임없는 대화이다. 이것은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스스로가 감당해야할 삶의 무게이다. 어른이 된다고 해서 삶이 쉬운 것은 아니다. 다만 어른이 되면 삶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다. 다양한 경험이 쌓이다보니 삶을 해석할 수 있는 면역력이 생긴 것이다. 잘못 산 삶은 없다. 그러니 우린 스스로에게 비전 퀘스트의 시간을 종종 허락해야 한다. 특히 아이들에게 비전 퀘스트는 매우 중요하다. 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옛날처럼 단순한 지식을 습득하고 기능을 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은 하루하루가 급변하기 때문에 새로운 지식을 끊임없이 배워야 하며 늘 열린 마음으로 세상과 대화해야 한다. 기성세대 중에는 좁은 시야로 세상을 해석하는 사람이 많다. 아직도 아이들에게 단순 지식을 외우게 하고 시험을 통해 서열을 정해주면 그들의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다고 믿는다. 학교에서 지식을 익히고 이름 있는 대학에서 공부해야만 슈퍼맨 같은 인물, 성공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린 슈퍼맨이 아니다. 슈퍼맨이 될 필요도 없다. 어찌 사람이 삶을 지배할 수 있겠는가?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비록 오늘 가장 높은 위치에서 삶을 마음껏 부릴 줄 모르겠지만, 아직 내일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 줄은 그 누구도 모른다. 내일이 있기에 겸손해야 하며 죽는 날까지 자신을 사랑해야 할 이유이다. '아이들에게 안전한 삶이 정답이다.'라고 강요하지 말자. 그들에겐 비전 퀘스트의 시간이 많이 필요하다. 삶은 안전지대를 벗어나는 순간 시작된다. 새로운 문제를 접하고 갈등을 해결하며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야 한다. 아이들이 비전 탐구 여행을 통해 진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부모나 어른이 바라는 자아는 아이들의 진짜 자아가 아니다. 그 자아는 부모와 어른이 바라는 껍데기 자아요, 허수아비 자아일 뿐이다. 미국 시인 메리 올리버는 '여름날'에서 독자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다. "결국엔 모든 것이 죽지 않은가? 그것도 너무 일찍 내게 말해 보라, 당신의 계획이 무엇인지. 당신은 하나밖에 없는 이 거칠고 소중한 삶을 걸고 당신이 하려는 것이 무엇인지." 지금의 나와 이별할 수 있을까? 과연 아이들은 부모나 사회가 강요하는 자아를 버릴 수 있을까? 어렵겠지만 이별해야 하고 버려야 한다. 그래야만 참 자아를 찾을 수 있다. 우리 아이들에게 안전지대를 떠날 수 있도록 허락하자. 그리고 더 크고 더 행복한 꿈을 꿀 수 있는 시간을 주자. 그게 바로 비전 퀘스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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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와 벽돌공이 비슷한 대우를 받는 이 나라는 美친 교육을 꿈꾸다. 덴마크 교육현장 - 세 번째 이야기부모의 욕망이 아이들의 꿈을 낳는다. 요즘 수도권에서는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의과대학 진학반을 모집하여 수학 수업을 한다고 한다. 이러한 분위기가 차츰 지방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하니 입이 다물어 지지 않는다. 왜 의대를 가려면 수학을 잘 해야 할까? 수학을 조금 못하면 의사가 될 수 없다는 현실이 많은 사람을 슬프게 한다. 평소에 인간애가 넘치고 봉사 정신이 투철한 학생이 의대에 가면 문제가 생기는가? 그런 학생이 의대에 입학하면 훌륭한 의사가 될 수 없고, 수학이나 영어를 잘 해야만 좋은 의사가 될 수 있는가? 아직도 우리 국민은 전근대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도 오랫동안 불평등지수와 차별지수를 온몸으로 느끼면서 더욱더 차별과 불평등을 조장하고 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덴마크에서는 아이를 낳을 때 “당신의 아이는 당신의 아이가 아닙니다.” 라는 팸플릿을 받는다고 한다. 이것은 당신이 낳은 아이가 당신 개인의 아이일 뿐 아니라 바로 덴마크의 소중한 국민이기도 하다는 의미이다. 더불어 국가에서 출산비, 출산휴가, 육아보조금, 교육비, 의료비까지 아이의 인생 전반을 책임지겠다는 약속이다. 그야말로 우리 가족만이 아닌 온 사회가 아이를 함께 키우는 사회구조이다. 출산이 즐거운 덴마크 엄마들에 대하여 알아보자 덴마크는 아이를 낳아도 엄마들이 걱정 없다. 아이는 부모만이 키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출산율이 떨어질 이유가 없다. 덴마크의 산모는 산전 6주부터 직장에서 휴가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산후 1년간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다. 부모가 각각 1년씩 출산휴가를 신청할 수 있어서 2년 동안 부모가 아이를 집에서 직접 돌볼 수 있다. 유급휴가 때는 평소 월급의 80% 정도를 급여로 받을 수 있는데 이것은 정부에서 지원해 준다. 회사는 산모를 대신해서 일하는 임시 직원에게 월급을 주면 된다. 1년 후 직장에 다시 나갈 때는 아이의 돌봄 비용을 국가에서 지원을 받아 유아원이나 동네의‘개인보모’에게 맡기면 된다. 대체로 퇴근 시간이 오후 4시 반 정도이니 식당, 카페, 쇼핑 센터 어디에도 쉽게 외출할 수 있다. 혹 저녁에 외출할 일이 있으면 부부가 아이를 돌아가면서 돌봐주거나 동네에 있는 아기클럽에 맡겨 서로 보살펴 준다. 그렇다면 부모와 정부는 어떻게 유아를 함께 관리할까? 덴마크에서는 출산 후 부모가 2년 동안 집에서 아이를 돌볼 수 있다. 양쪽 부모가 각각 1년씩 출산휴가를 신청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이후에는 부모가 아이를 유아원에 맡기고 시청이나 군청에 신청하면 집에서 가까운 유아원에 배정해 준다. 유아원에 내는 비용은 부모의 소득에 따라 차등으로 내는데 절반 정도를 시나 군에서 보조해준다. 혹 아이가 아프면 부모는 1년에 12주, 양 부모 합치면 24주의 유급휴가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때문에 덴마크 여성들은 출산과 육아에 큰 부담이 없으며 육아문제로 직장을 포기하는 일도 거의 없다. 덴마크는 정부가 아이를 낳는 일도, 키우는 일도 이처럼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주기 때문이다. 덴마크의 육아 제도를 보면 "역시 아이들은 미래의 자산이다”라는 말을 공감할 수 있다. 부모가 아이를 낳고 기르지만 국가가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줌으로써 아이를 사회 전체가 기르는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도 아이들이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생후 2년간은 부모가 아이를 기를 수 있도록 제도적인 장치가 있어야 하며, 아이를 마음 놓고 맡길 수 있는 시설 또한 확충해서 부담 없이 맡길 수 있도록 정부의 정책적 지원이 필요하다. 대학 입학은 어떻게 할까? 대학은 꼭 필요한 사람만 가기 때문에 우리나라처럼 자식의 대학 입학을 위하여 온 가족이 가슴을 태우는 일은 없다. 덴마크에서는 초등학교에서 8학년까지는 시험이 없으나, 8학년에서 예비시험이 한 번 있고 9학년이 되면 본시험이 있다. 그 시험 결과를 바탕으로 인문고등학교, 기술학교, 상업학교로 진학을 결정한다. 60%가량이 인문고등학교에 진학하고 나머지는 기술이나 상업학교에 입학한다. 덴마크 청소년은 9학년 정도의 나이(15세)가 되면 매우 독립적이다. 부모는 아이의 진로에 대해서 간섭을 하지 않는다. 학교에서 치른 시험 결과를 가지고 부모, 학생, 교사가 면담을 해서 진로를 결정하는데 부모들은 대부분 교사의 진학 안내를 받아들인다. 특히 인문고등학교, 직업학교 어느 쪽으로 진학하든 그것이 아이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적성과 능력에 따른 것이라고 보편적으로 생각하기에 가능하다. 혹 직업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사회에 나갔더라도 나중에 대학에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정부는 대학 정원의 5% 정도는 늦게 공부하는 사람을 받을 수 있도록 제도화하였다. 그렇지만 직업학교만 나와도 생활이 보장되고 취미생활을 충분히 할 수 있기에 부모가 아이를 죽도록 공부시킬 이유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는다. 의사와 벽돌공이 비슷한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지만 덴마크는 가능하다. 좋은 직장이나 직업이 따로 없기 때문이다. 덴마크 사람들은 “교육수준이 높은 의사에 못지않게 벽돌을 잘 쌓는 전문가를 존경한다. 불행한 의사보다 행복한 청소부가 낫다.”라는 인식을 갖고 있다. 당연히 벽돌공과 의사의 보수는 다르다. 그렇지만 소득의 많고 적음에 따라 누진과세를 적용하기에 보수가 많건 적건 결국 실수입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우리 국민은 왜 그렇게 좋은 대학에 가려고 몸부림을 치는가? 좋은 대학이 바로 더 좋은 직장이나 직업으로 이어지고, 더 좋은 보수와 더 우월한 사회적 지위로 연결되어 직업에 귀천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덴마크처럼 벽돌공이나 의사나 생활수준이 비슷하고, 페인트공이나 법률가나 실수입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면 우리 국민도 대학에 목을 매지 않을 것이다. 소득의49–60%가 세금이지만 혜택이 모두 돌아와 저항 없어 덴마크의 소득세는 49–60퍼센트다. 조세저항이 생길 법도 한데, 그 혜택이 모두 돌아오니까 충분히 세금을 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덴마크도 직업에 따른 사회적 신분 차이가 없을 수 없지만 두드러지지 않는다. 사회에서는 직장에서건 어디서건 거의 누구나 직함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이름으로 부른다. 동네 사람들이 자주 만나는 여가클럽에서는 누구나 동등하게 어울린다. 벽돌공이나 사장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렇기에 대학을 나와서 특별히 학식이 많다면 존경을 받는 경우도 있겠지만, 직업에 따른 차별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처럼 덴마크는 출산, 양육, 대학입시, 직업차별의 걱정이 거의 없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다음에 뭐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는 하지 않으며, 아이의 장래 직업을 강요할 필요도 없다. 다만 부모는 아이가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도록 교육을 받아 그 분야로 나가 직장 생활을 하길 바랄 뿐이다. 명문 학교, 더 좋은 직장, 더 좋은 보수, 더 안락한 삶으로 이어지는 등식이 존재하지 않으니 사람 사이에도 서열이 없으며 직업에 따른 생활수준이나 사회적 신분의 차이가 거의 없다. 이런 사회를 꿈꾸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가? 교육은 사람 사이의 우열을 가리는 과정이 아니다. 교육은 아이들이 행복하게 인생을 살 수 있도록 능력을 키워주고, 다른 사람과 팀이 되어서 일할 수 있는 마음을 수양하는 것이다. 우리 국민도 삶에 대한 생각을 바꿀 때가 되었다. ※ 위 글은 '대한민국 엄마들이 꿈꾸는 덴마크식 교육법'(김영희 지음, 명진출판사)의 자료를 활용하여 요약하고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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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관이 자전거로 출근하는 나라, 덴마크김광호 여수 여양중 국어과 교사 우린 오래 전부터 그래 왔고 오랜 후에도 사교육과 씨름을 할 것이다. 이것은 교육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뿌리에는 서열구조와 불평등 그리고 차별이라는 삼형제가 확고히 자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처럼 서열이나 경쟁을 요구하지 않고도 잘 사는 나라는 없을까? 다행히 경쟁이 아니라 협동을 가르치고, 획일화된 교육이 아니라 자율성을 키워주는 교육을 실행하는 나라도 적지 않다. 덴마크의 교육에서 우리 교육 개혁의 단초를 찾아보고 싶다. 우선 덴마크 교육은 일등이나 꼴등이라는 등수가 없다는 점이다. 아이들 모두의 개성을 충분히 살릴 수 있도록 경쟁보다 협동을 우선하기 때문이다. 덴마크에서는 두 살 반 혹은 세 살부터 여섯 살까지 유치원에 다니고, 그 이후 초등학교에 입학해서 9년을 더 다닌다. 이 과정을 마친 후에 학생의 진로를 결정한다. 진로는 어떻게 결정할까? 덴마크의 교육방식은 등수를 정하는 것이 아닌, 학생들의 행동을 관찰하여 아이의 장단점을 기록하고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것이다. 이렇게 초등학교에서 8학년까지 시험도 없고 석차를 매기지 않지만, 담임 교사는 과목별 학습 능력이나 사회성의 발달 과정을 꼼꼼하게 기록한다. 이게 아이들의 성적표이며 진로를 결정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르는 학교수업 이렇다 보니 상위권이 따로 없는 교실을 운영한다. 그들은 공부를 잘하는 것은 여러 가지 능력 중 한 가지라고 생각할 뿐, 운동을 잘하는 아이, 만들기를 잘하는 아이, 노래를 잘하는 아이, 그림을 잘 그리는 아이 등 개인마다 타고난 소질과 능력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공부를 잘한다고 특별히 칭찬하거나 시상도 하지 않으며 공부를 못한다고 해서 열등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모두가 개성 만점으로 당당하게 생활한다. 수업은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기를 수 있도록 진행한다. 매일 쏟아지는 지식을 가르칠 수 없기에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어떻게 배워야 하는지 그 방법을 함께 찾아가는 것이다. 교육부장관은 ‘학교교육 목표가 학생들에게 어떤 지식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스스로 생각할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이다. 다음으로 덴마크는 혁명을 통해 서열 의식을 깼다는 점이다. 덴마크도 우리나라처럼 1950년대까지는 서열 의식이 있었다. 덴마크의 평등혁명은 프랑스에서 시작된 1968년 학생 시위의 영향을 받아 학생혁명이 있었다. 이것을 분기점으로 덴마크에 평등의식이 급격히 확산되었고 1970년대부터는 불과 한 세대 만에 사회 전체가 서열의식을 깨게 되었다. 이렇듯 불평등과 서열 의식을 없애는데 사회구성원의 의식변화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사용하는 ‘좋다’와 ‘명문’이라는 단어에는 서열 의식이 숨어 있다. ‘좋은 학교, 명문 대학, 좋은 직업’에는 학교라는 서열, 직장이라는 서열, 신분과 보수의 서열이 있기에 높을수록 혜택을 많고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믿음을 준다. 덴마크의 부모는 아이들과의 관계가 상당히 대등하다. 즉 아이들도 의견을 말할 수 있는 인격체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가정에서부터 평등 정신을 생활화하고 있으며, 학교나 사회에서도 차별 없는 평등정신을 실현하고 있다. 이렇게 사회 분위기가 개개인의 우열을 나누기보다는 능력과 소질의 다름을 인정한다는 점이다. 학교 간 서열은 거의 없을 뿐만 아니라 직업에 따른 사회적 신분과 보수의 차이도 많지 않다. 이런 평등한 사회이다 보니 부모나 아이들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덴마크는 ‘왜’라는 질문에 익숙한 사회라는 점이다. 아이들이 무엇을 할 때 왜 하는지 꼭 질문하게 한다. 이렇게 아이들이‘왜’라는 질문을 통해 스스로 생각하며 성장하기 때문에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할 수 있어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갖는다. 더불어 다른 사람을 쉽게 부러워하거나 남이 하는 대로 쉽게 따라 하지 않는다. 우리 국민도 ‘왜’라는 질문이 아이의 사고를 넓히는데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사회적 분위기가 결과를 중요시하기 때문에 ‘왜’라는 질문을 이어가는 것은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성적 올리기에 급급한데 ‘왜’라고 질문하고 있으면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고 꾸중하는 것이 다반사이다. 한편 열아홉 살이 되면 부모는 아이들을 거의 간섭하지 않는다. 그들의 문화가 수평적인 인식과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다 보니 스스로 언행에 책임을 지게 한다. 어릴 때부터 자신의 일은 스스로 결정하도록 장려하기에 아이들이 누구에게 의지하거나 기대지를 않는다. 간단한 간식 만들기, 세탁기로 빨래하기, 옷 입기와 벗기 등등 무엇이든 독립적으로 할 수 있도록 권장하기에 빨리 성숙할 수밖에 없다.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드는 교육혁명 꿈꿔 우리 사회는 어릴 때부터 부모님, 선생님 말을 잘 들어야 한다. 특히 무슨 일이든 물어보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 중고등학교, 대학교에서도 오직 취업을 위한 공부만 하다 보니 스무 살이 넘어도 밥하고 반찬 만들고 빨래 같은 일을 할 줄 모르는 학생이 많다. 특히 이색적인 것은 덴마크 학생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 아니라, 1년에서 3년여 정도 여행이나 취업 등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자신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점이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덴마크는 일등과 꼴등이라는 등수가 없는 나라, 서열의식이나 불평등, 차별이 없는 나라,‘왜’라는 질문이 허용되는 나라 등 우리 교육이 통찰해볼 부분이 많다. 국민과 정부는 말로만 교육이 백년지대계라고 강조하지 말고 온 국민이 행복할 수 있는 교육을 실현할 수 있도록숙고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작은 물방울은 바위를 뚫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작은 물방울도 쉬지 않고 떨어지다 보면 바위를 뚫을 수 있다. 도끼를 갈아서 바늘을 만든다는 마부위침(磨斧爲針)의 한자성어가 있다. 모든 국민이 교육의 큰 물줄기를 바꾸기 위해서 도끼로 바늘을 만드는 교육혁명에 함께하길 바라며 '美친 교육'을 꿈꾼다. ※ 위 글은'대한민국 엄마들이 꿈꾸는 덴마크식 교육법'(김영희 지음, 명진출판사)의 자료를 활용하여 요약하고 정리하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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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행복을 부추기는 사회김광호 여수 여양중 국어과 교사 국민의 행복 지수를 높이는 처방전을 써보고 싶다 행복이 뭘까. 심리학자 네틀의 말에서 행복의 실마리를 찾아보고 싶다. “내가 어떤 것을 선택함으로써 얻은 행복감은 다른 모든 사람이 선택한 것에 좌우된다. 다른 모든 사람이 나와 같은 조그만 차를 가지고 있는 한, 나는 조그만 차나 심지어는 자전거에도 만족할 수 있다.” 이처럼 개인의 행복은 타인의 행복, 집단의 행복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K씨 : 잘 지내시죠? 더불어 행복하시지요? Y씨 : 죄송하게도 행복하지 않아요. 매스컴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오보 비상경계령,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사회복지 및 의료 민영화 등등) 때문에 행복할 수 없어요. 차라리 뉴스가 없는 사회에 살았으면 좋겠어요. 우린 왜 대다수가 K씨와 Y씨처럼 행복하지 않을까? 우리 사회가 집단이나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빼버린 채 개인적 행복만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주위를 돌아보라. 사회가 온통 주관적인 행복만을 강조하며 모든 문제를 개인 탓으로 돌리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 사회는 개인에게 쉽게 말하곤 한다.“행복하지 않다고? 그건 네 탓이야?” 아직도 그것을 모르겠냐는 말투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지 않은 것은 그들이 무능하거나 게을러서라고 말할 뿐, 잘못된 사회제도에 대해서는 전혀 말을 하지 않는다. 한 사람의 행복은 정말 개인의 노력으로 가능할까? 높은 행복 지수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도 중요하지만, 사회적 제도가 반드시 뒤 따라야 한다. 개인이 경제적 어려움, 사회적 불평등, 정신적 건강 등 행복에 미치는 요소들을 자신의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북유럽 나라를 살펴보자. 북유럽 국가들은 행복지수가 대체로 높다. 이는 국가가 국민에게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를 제공하여 보호하기 때문이다. 개인은 국가의 지원을 받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기에 다수의 국민이 경제 및 사회 활동을 만족스러워한다. 반면에 미국식 사회제도는 어떠한가? 사회적 보호는 제한하고 경쟁만을 말하기에 국민의 행복 지수가 전반적으로 낮다. 국가는 사회의 기본제도를 강화하지 않고 개인의 능력과 경쟁만을 부추기기에 국민은 자신이 좋아하는 직업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 보니 사회나 권력이 요구하는 직업을 택할 수밖에 없으며 경제 및 사회 활동 또한 만족도가 낮다. 북유럽 국가들은 사회복지 지출비와 행복지수 간에 상관관계가 아주 높다. 이는 북유럽식 사회제도가 개인의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보호를 해줌으로써 행복감을 높여준다는 의미이다. 많은 전문가도 북유럽식 사회제도의 장점을 강조하며, 미국식 사회제도는 개인의 경쟁만을 조장하여 사회적 불평등지수를 높이는데 악영향을 준다고 지적하고 있다. 삶에서 개인의 책임과 노력은 정말 중요하다. 하지만 그 외의 요소인 사회적 안정감과 보호망을 갖춤으로써 국민 모두가 행복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개인과 국가가 상보적 관계를 유지했을 때 개개인의 경제적 불평등 지수를 줄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자율성도 높일 수 있다. 우리나라는 개인의 노력과 능력만을 중요시하는 사회 문화를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개인 중심적인 사회제도는 개인의 책임만을 강조하고, 사회적 보호를 제한하여 사회적 불평등을 증가시킨다. 이로 인하여 국민의 행복 지수는 낮고 개인의 삶에 대한 만족도 또한 높지 않지 않다.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고 있는 개인주의적 행복론을 알고 있는가? 나이키의 ‘Just do it’과 맥도날드의 ‘enjoy more’라는 슬로건을 보라. 더 많은 행복을 위해서 과감하게 도전하라고 한다. 그러면 곧 행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이기주의적 행복 경쟁만을 호도할 뿐이다. 요즘 사회과학자들은 개인의 능력을 넘어 행복의 집단 간 차이에 주목하며 사회적인 맥락에서 행복을 연구한다고 한다. 특히 자본주의 제도와 행복 사이의 관계를 조명하는 연구를 계속해서 발표하고 있다. 이런 연구의 공통점은 사회 개혁 없이는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결코 행복을 없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이젠 국민의 행복 지수를 높이는 처방전을 써보고 싶다. 정부는 국민에게 개인 테두리 안의 행복을 추구할 것을 강요하지 마라. 더불어 행복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다는 가짜 행복론을 가르쳐서도 안 된다. 정부는 공동체의 행복지수를 높이기 위해 사회 복지제도를 강화하고 안전망을 갖추는 정책을 펼쳐야 한다. 아직 늦지 않았다. 대한민국 정부와 기득권층은 국민에게 진짜 행복을 안내하라. 정부와 기득권층은 국민 개개인이 노력하며 능력을 발휘할 것을 말해야 하겠지만, 그에 앞서 기본적인 사회보장제도를 완성하며 개개인의 보호망을 촘촘히 갖추겠다고 선언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