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4 (화)
바라보는 것, 혼자 또 함께
걷는 것, 구불구불 그렇게 느리게
사는 것, 어둑어둑 또 빛나게
사막이라도
동굴이라도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소금길이라도
그대만의 길이 슬프냐?
한 뼘만큼의 허공을 소유하고
딱 반 쪼가리의 도자기를 굽기 위해
삼천 도 불가마에 온생을 거는
마침내 닿은 천 길 낭떠러지
한 발자국 더 와락 솟아 날아갈 날개가 있다구?
여기, 그 하나의 길!
백 개의 길이 화려하다한들
천 개의 길로 바벨탑을 쌓았다한들
그대의 뻘밭길, 그 오지의 하루보다 더 좋으랴?
길은 길일 뿐
적막허랑낭창 걸어가는 것일 뿐, 그냥!
--졸시 : <행복의 숲, 7 -길>
인문학은 어떤 것을 끊임없이 추구하는 길이다. 어떤 한 가지의 정의에 가까운 인문학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 세상의 삶을 채색하는 색깔 모두가 인문학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아마 계절적으로 본다면 지금처럼 온갖 꽃이 피고 세상이 만화방창할 때가 가장 인문학적인 모습의 자연이라고 말 할 수 있으리라.
인문학은 사랑이다. 사랑의 의미는 너무도 광범위해서 아리송하다.
인문학은 그 아리송함을 밝혀주는 촛불이다. 스스로를 태워서 스스로가 밝아지는 과정이 인문학이다.
촛불의 첫 발화시간을 점화시켜주는 매개체가 책이다. 모든 인문학적 시간들은 첫 시간이요, 첫 날이며 첫 경험이다.
그 새로움 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매번 책과 놀면서 살아간다.
인문학은 사랑이면서 가장 어두운 곳을 바라보는 사랑이다. 오늘 저 춥고 배고픈 사람들은 어찌 살아갈까를 생각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을 한다고 하면서, 그 어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건 가짜다. 책을 즐겨 읽고 책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밝고 거대한 것, 누구나가 숭배하는 것,
세상의 오지를 바라볼 줄 모르고 화려한 그럴 듯한 것을 좋아한다면, 그건 가짜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소외된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그 ‘생명’에 주시하는 인간이 인문학적인 인간이다. 인문학은 나를 쇄신하는 과정이다. 이기적이며 온갖 헛된 것에 집착하며 살아온 나를 넘어서는 방법론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끊임없는 창조다!
인문학은 문제의식이다. ‘왜?’라고 묻는 일이다.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에게 묻는다. 그 물음이 한 편의 시며 소설이며 철학서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고통은 무엇으로부터인가? 저 고통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행복한가? 그 행복은 무엇으로부터인가?
세계는? 자연은? 인류의 역사는? 우리가 누리는 문명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우주는? 최초의 항해사는?
아프리카는? 그 물음들의 역학적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그 그물망 속을 종횡무진 누렸던 위대한 저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시간이 인문학적인 삶의 씨줄이며 날줄이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명저 『사피엔스』에서 행복은 일반적으로 ‘주관적 안녕’이라는 정의로 받아들여진다고 해석한다.
그 주관적 기대를 좀 더 합리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꽤나 까다롭게 여겨진다.
그곳에 놓일 저울은 그야말로 각 개인이 주인공인 ‘가치체계’의 추다. 어떤 가치관을 갖고 살아가느냐가 얼마나 행복할 수 있는가의 잣대라면 누구든 행복할 수 있고 누구든 행복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럼,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그러므로 인문학은 답 없는 객관식 문제의 주관적 해답이다.
그러므로 그 해답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정답은 아니다. 인문학은 카오스이다.
우주의 질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무질서에 동참시키는 것이 인문학이다. 무질서를 체험하지 않고는 그 어떤 질서도 참되게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참된 질서는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그건, 무질서의 고민과 무질서의 헛됨과 무질서의 좌충우돌과 무질서의 미움까지도 포용한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역정을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예술적 흐름의 강물이 인문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