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4 (화)
올해는 계속 내리는 비로 여름 계곡의 싱그럽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많이 볼 수 있네요.
아이 셋 낳고, 10여 년 동안 집안과 텃밭에서만 뱅뱅 맴돌다 보니 언젠가부터 여름이 되면 후덥지근한 날씨 때문에 몸이 너무 지치고 숨쉬기도 힘들 정도여서 아이들 데리고 무작정 화엄사, 피아골, 쌍계사, 참새미골 계곡에 가서 놀다가 해 질 녘 돌아왔지요.
아이들은 물개마냥 세상 행복하게 놀다가 해가 어둑어둑해져도 물에서 나올 줄을 몰라 저랑 매번 실랑이질했답니다. 때론 버너, 냄비 준비해서 계곡 옆 정자에서 아빠가 끓여주는 라면으로 저녁도 맛나게 먹고 돌아오고요.
큰 장맛비 오시고 며칠 지나 계곡을 거슬러 오르면 물은 맑은 옥빛으로 빛나고, 흰 구슬 물방울들은 바위에 부딪혀 개구쟁이처럼 여기저기 신나게 튕겨 오르고, 물소리는 쾌활하기 그지없습니다.
마치 재잘재잘 수다스러운 명랑한 소녀들처럼요. 몸에 닿는 물의 느낌은 참 부드럽습니다. 무릎 아래가 온통 잠기도록 물속을 거닐기도 하고, 연거푸 세수하기도 합니다.
싱그러운 물 냄새와 신록의 달콤함을 담은 공기는 그야말로 ‘여름 향기’입니다.
폐를 지나 장 깊숙이 들이켜 내 몸 구석구석을 새롭게 하고, 또 내 안의 묵은 숨, 고여있는 숨마저 뱉어내게 합니다. 그래서인지 계곡에서 숨을 쉬면 깊은숨이 쉬어지고, 잡념이 없어지면서 머리는 맑아지고, 절로 충만해집니다.
먹고 싶은 것도, 갖고 싶은 것도, 뭔가 더 노력해야 할 필요도 없이 ‘아~~참 좋다!’라는 느낌이 들면서 나란 존재가 마구마구 좋아집니다.
그리고 내 안에 숨 쉬는 이 자연의 모든 기운이 참 조화롭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러면서, 내 코에 들어온 이 향기는 저를 머나먼 시절로 쑤욱~~데려갑니다. 나의 후각에 들어온 이 향기를 언젠가 맡아본 것 같은데, 언제지? 하고 예민하게 촉수를 내밀어 더듬더듬 더듬어 봅니다.
‘아! 기억이 나네요.’
우리가 수렵, 채취하던 시절의 향기가 어렴풋이 느껴지네요. 맑고, 순수했던 공기! 자연의 생기로 충만했던 그 머언 옛날.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었지만 부끄러운 줄 모르던 시절의 그 공기의 향기네요.(뻥치네.^^ 누군가는 그러겠죠? 그런데, 저는 청각이 좋지 않다 보니 후각이 무척 예민해서 후각으로 들어오는 냄새와 향으로 많은 감정과 느낌들이 일어나기도 해요.)
지금 현대문명을 사는 우리들, 특히나 도시에 살면서 오염된 공기와 각박한 경쟁 사회 속에서 숨 가쁘게 사는 우리는 정말 생기 가득하고, 절로 충만해지며 맛있는 공기의 맛을 모릅니다.
기후위기 시대가 오도록 아무 경각심도 못 느낀 채 그저 물질문명만을 위해 달려왔는데,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오고 과잉생산된 산물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 싸우고, 투쟁하고, 담을 쌓고, 너와 나를 분리하며 살아오다 보니 우리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생기 가득하고, 존재에 대한 충만함으로 가득했던 시절의 공기 맛을 잃어버렸습니다.
초대받지 않은 손님, 코로나와 기나긴 장마가 부디 우리들의 삶을 되돌아보고 성찰하게 해서 태초의 공기를 되찾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너무 거창한가요?)
처음 장맛비가 왔을 때는 계곡의 가라앉은 온갖 침전물들을 흙탕물로 쓸어가더니만 이젠 다시 비가 와도 물은 옥빛으로 거침없이 흘러갑니다. 제 마음, 우리의 마음에도 큰비가 와서 가라앉은 모든 것들이 한 번 쓸려가고 맑은 빛으로 흘러 흘러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