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4 (화)
보름을 이틀 앞둔 밤하늘에는 아직 채워지지 아니한 동그란 달이 떠 있다.
그래도 달은 훤하게 밝아 하늘에는 검 푸르스름한 양떼구름이 층층이 노닐고 저녁별 몇 개가 반짝이는 모습은 현묘한 밤하늘을 충만하게 느끼게 해 준다.
밤 9시 즈음, 섬진강이 가까이 흐르는 유곡마을 지인 집에 갈 일이 있었다.
시간이 늦어 아이들은 놓고 가려고 했는데, 주인 언니가 삼둥이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유곡마을 초입은 넓은 평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안으로 조금만 들어가도 산골 같은 느낌이 들고, 또 산세가 둥그스름하면서도 웅장한 맛이 있어 좀 독특한 느낌이 드는 마을이다.
길을 따라 마을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산길로 이어지는데, 지금의 섬진강 도로가 생기기 이전에는 이 산길로 구례읍을 드나들었다고 한다.
마을 어르신들은 구례 오일장도 이 길을 따라서 보러 다니셨다고 한다.
작년 가을 즈음, 도시락 싸 들고 세 명의 벗들과 이 길을 걸은 적이 있는데 이제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아 옛적 그대로의 모습이 살아있고, 풍광도 좋아 걷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5~6시간 정도 걸으면서 웃기도 많이 하고, 이런저런 얘기들을 참 많이 한 것 같다.
유곡마을은 감 농사를 많이 짓는다. 저녁이라 어두운데도 하늘의 달은 밝아 주황빛 대봉감들이 고혹적인 빛을 발하고 있었다.
마치 밤의 미인 같은 느낌으로…. 언덕배기에 있는 언니네 집에 도착하자, 오늘 ‘전기 없는 날’을 하고 있다고 네 분이 마당에 따스한 모닥불을 피워놓고 우리를 맞아 주었다.
언니와 언니 남편, 남편의 조카, 그리고 민박 손님. 남편의 조카는 시골에서 살기 위해 내려온 젊은 총각이었고, 민박 손님은 이쁜 아가씨였는데, 시골의 일을 도와주고 당분간 숙식을 받는 모양이었다. (우프; 유기 농가에서의 세계적인 기회란 뜻으로 농업 체험과 교류의 NGO이다.)
이 네 분과 나와 삼둥이, 8명은 모닥불 가에 둘러앉아 하늘의 달도 보고, 별도 보고, 구름도 보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깊어가는 가을밤을 가슴 속 깊이 느꼈다. 말 그대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노래할 수 있는 밤이었다.
전기가 있는 세상에 살다 보니 우리는 이제 밤을 잃어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둡고 어두운 밤, 그 밤이 실은 우리에게 많은 말을 걸고 있고, 내 가슴 깊은 곳을 두드리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는 잠자기 전까지 불을 켜놓고 잠들 때가 되어서야 불을 끄는데, 그마저도 도시의 휘황찬란한 불빛이나 가로등 불빛 때문에 칠흑 같은 어둠을 느껴보기가 쉽지 않다.
큰아이가 두 살 때쯤이던가? 우리 부부는 한 달에 한 번 ‘전기 없는 날’을 했었다. 냉장고를 제외하고는 모든 전기를 쓰지 않는 것이었다.
낮에는 크게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밤이 문제였다. 저녁을 준비하고, 아이 기저귀를 갈고, 씻기고…. 이런 것들이 결코 쉽지가 않았다.
아이는 한참 아장아장 돌아다니던 때였고, 나는 그런 아이를 돌보느라 동분서주 바쁘던 때였다.
더구나 시골 살림이라 바깥에도 할 일이 많았다. 저녁에 전기를 켜지 않고 촛불을 켜면 아이는 너무 신기해하며 그 불을 황홀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촛불 아래서 우리 부부는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놀아주고,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그런데, 처음 몇 달은 그런대로 지냈지만, 많이 힘들어서 나중에 아이가 좀 더 크면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둘째 낳고, 셋째 낳으면서 ‘전기 없는 날’은 한정도 없이 미루어졌다.
언니 집에서 따스한 모닥불을 쬐며 밤하늘을 누리고 나자, 우리도 다시 한번 시도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니 집에 다녀온 이틀 뒤, 시어머니 생신을 맞아 시댁 식구들이 모였다. 저녁에 우리 집 마당에 모여 함께 저녁을 먹고 날이 추우니 모닥불도 피우고, 거기에 고기랑 고구마도 구워 먹었다. 8시 즈음 되었을까?
우리 집 바로 뒷동산에서 환한 빛이 발하더니 잠시 후 둥그런 보름달이 쑥 나타났다. 우리는 그런 달을 보며 이야기꽃을 피웠고, 달은 점점 더 높이 떠서 서쪽으로 이동을 해 갔다.
저 달도 우리를 내려다보며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있고, 흐뭇하게 웃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끔 그럴 때가 있다. 저녁에 커튼을 닫지 않고 자다가 새벽녘 문득, 누군가가 나를 계속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눈을 번쩍 뜨게 될 때가 있다. ‘누구지?’하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면 저 하늘에서 환하게 빛을 발하고 있는 보름달!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집 집마다 자가용이 있고, 밤에도 대낮처럼 환하게 불을 밝히고, 먹을 것과 가진 것은 넘쳐나고, 인터넷과 스마트폰 세상으로 정보와 지식도 넘쳐나고, 카톡이나 페이스북으로 지구 저편에 있는 사람과도 순식간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세상이지만, 우리는 정말 행복한가?
한없이 걸으며 나를 만나고, 너와 대화하고, 어둡고 신비로운 밤하늘에 하늘의 달과 별을 만나며 누구도 만나주지 않았던 깊은 곳의 나도 만나보고, 그러면서 한 편의 시를 길어오려 한 장의 엽서와 편지로 그립고 그리운 나의 마음을 발효시켜 너에게 보내보고….
이제는 속도와 물질의 문제가 아닌 느긋함과 여유로운 마음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살필 때인 것 같다. 다시 한번 살펴보자. 진정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