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4 (화)
굽이굽이 감돌아드는 섬진강 어디메쯤 헌책방이 생겼다. 그것도 작고 아담한 책방이 아니다.
부산에서 40년 넘는 오랜 세월 동안 헌책방을 운영하셨던 부부가 구례구역 맞은편에 3층짜리 책방을 내셨다. 마치 대학 시절의 도서관에 다시 온 듯한 그런 향수마저 불러일으킨다.
게다가 2층, 3층에 올라가면 섬진강과 건너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강 건넛마을도 볼 수 있다.
단아하게 마련되어 있는 테이블에 앉아 책을 보다가 고개 들어 유유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온갖 시름 떨쳐내도 좋을 자리이다.
이 중년의 나이만큼 오래된, 혹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을 책 향기를 맡으며 그저 묵묵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며 살아있음이 새삼 고맙고 행복해지는 자리이다.
국화꽃도 사그라들 무렵의 11월 중순쯤의 어느 날, 구례 시민들이 모여 있는 카톡방에 헌책방을 연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구례에는 작은 서점조차도 없고, 또 인터넷으로 물건 사는 걸 즐기지 않는 나는 친정이 있는 대전에 갈 때 오랜만에 대형서점에 들른다.
넓게 펼쳐져 있는 책들을 보고, 또 신간 서적들의 다양한 내용 들을 접하노라면 마음이 즐겁고 편안해지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그곳에 있게 된다.
대형서점이 생기기 전에는 대전에도 작고 아담한 서점들이 몇 곳이 있었고, 또 시내에는 오래된 헌책방 거리도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 작은 서점들이 하나둘 문을 닫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대형서점만 운영되고 있다.
시골에 내려와 살게 되면서 제일 아쉬운 게 또래 친구와 문화예술과 책방이었다. 구례에서 살게 된 지 7년쯤 될 때부터 또래 친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문화예술도 간혹 누릴 수 있게 되었는데, 책방만은 여전히 아쉬웠다.
간혹 순천에 나갈 일이 있을 때, 혹은 광주에 갈 일이 있을 때 터미널 서점에 갈 수 있는 게 전부였다.
이런 현실 속에서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헌책방 서점이 열린다는 것은 정말 기쁜 소식이었다. 그것도 부산에서 40년 넘게 서점을 운영하신 헌책방 대부가 차리신다는 소문에 열 일 제쳐두고 서점 문을 여는 날에 온 가족이 함께 가서 그 잔치를 누렸다.
원래는 올 9월 초 오픈할 예정이셨다고 한다. 여름 무더위와 씨름하며 30만 권의 책을 옮겨왔는데, 지난 8월 8일, 상상할 수도 없이 무섭게 범람했던 섬진강 물난리로 거의 모든 책이 급류에 떠내려가거나 젖어버렸고 임시 보관소로 하동 창고에 저장 중이던 15만 권의 책도 유실되어 버렸다.
목숨과도 같은, 추억과도 같은 책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렸으니 부부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감히 상상이 가지 않는다. 더군다나 옥상에는 수많은 책이 누워 있는데, 흙탕물에 잠겼지만, 도저히 버릴 수 없는 고서적과 희귀본을 옥상으로 옮겨 그늘에서 말리고 있다 하신다. 그분들에겐 어떤 말로도 위로가 되진 않겠지만 누군가 나지막하게 이렇게 말한다..
“섬진강은 나중에 어떤 좋은 선물을 준비했기에 그들에게 이렇게도 큰 시련을 주신 것일까...?”
그들은 남겨진 10만 권의 책을 일반 문학, 기술 서적, 원서, 사전, 단행본, 대학교재, 잡지, 고서…. 등으로 정리해서 책꽂이에 꽂았고, 누가 책이 어디에 있는지 물어보면 당신들 머릿속에 책의 위치가 저장되어 있어서 동행해주는 간단하고 친절한 옛 방식으로 책을 찾아주신다. 그리고 겸손이 몸에 배어 손님들을 대해 주시니 자꾸만 더 이곳을 찾게 만든다.
‘섬진강 책 사랑방’이 우리 집에서 가까운 거리는 아니지만 벌써 여러 번 다녀왔다. 가족들과 가기도 하고, 때론 혼자, 때론 친구들과도 가고, 또 곡성에서 같이 책모임 하는 분들에게도 소개하여 이곳에서 책모임을 갖기도 하였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손때가 묻은, 마치 오랜 친구 같은 헌책들이 좌우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는 곳에서 정다운 사람들과 책모임을 했던 시간.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풍경이다. 이곳에서 따스한 차나 커피 한 잔 시켜놓고 그러한 모임을 한다면 더더욱 따뜻한 추억으로 남으리.
구례를 찾는 분들에겐 이곳 섬진강로 46로 ‘섬진강 책 사랑방’을 꼭 추천하고 싶다. 옛날 시골 마을의 사랑방을 찾듯 편안하고 정겨운 마음으로 이곳을 찾으면 좋겠다.
비록 그 공간은 부부가 마련하셨지만, 앞으로는 구례 사람들의 자랑이 되는 사랑방으로 거듭나길 소망해본다. 오래된 책이 가득 꽂힌 창가에 앉아 흘러가는 강을 보는 여유로움, 눈을 돌리면 속삭이듯 말을 걸어오는 책의 숨소리…. 혹시 우리는 이곳에서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타르타’를 꺼내 들고 읽다가 그가 보았던 그가 깨달았던 그 강물을 보게 되지는 않을까?
(본문은 ‘지난여름 물난리로 책 30만 권 잃은 헌책방 주인 이야기’를 쓰신 김창승 님의 글에서 일부 발췌했음을 알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