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5 (수)
1월 초, 아침에 일어나니 눈이 한가득 쌓여있다. 어릴적엔 밤새 눈내려 새하얗게 된 세상을 보노라면 가슴이 뛰고, 그 은빛 세상에 매혹되어 너무도 황홀했는데...
눈이 내리던 새벽, 간혹 잠자다 깨어나 마루에 있는 요강에서 볼일을 볼 때 그 차갑고도 맑고도 적막한 느낌 속에 펑펑 내리던 눈! 달빛이라도 비치는 날엔 눈이 반사되어 반짝반짝 빛이 나던 어둠속의 신비!
그리고 으스스 몸을 떨며 다시 따뜻한 이불속에서 곤히 단잠을 자다가 환한 눈빛이 초가집 창호지 문으로 비쳐들고 문풍지 사이로는 알싸하고 상큼한 눈 내린 아침의 공기가 스며들 즈음 소녀는 벌떡 일어났다.
엄마랑 할머니는 이 추운 아침에 꽁꽁 얼어붙은 부엌으로 나가 불을 때서 밥을 하는게 힘드셨을 것이다.
그래도 아궁이에 불이 붙고, 부엌이 열기로 따스해지면서 눈 쌓인 마당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도 하셨겠지. 소녀는 친구들과 눈 속에서 한바탕 놀 생각에 설레기만 했었다.
그런데, 나이가 조금 들고 보니 어린 시절 가슴을 뛰게 하던 감동은 사라지고, 좀 무덤덤해지는 마음이 서글프다.
어제 둘째 아이 친구 두 명이 우리집에서 잤는데, 아침에 눈 온 걸 보더니 첫째, 둘째랑 함께 네 아이가 밖으로 뛰어 나간다.
아침잠이 많고 몸이 마른 막둥이는 이불을 끌어당기고 쿨쿨 잠을 자느라 정신이 없다.
눈 온 날에 마음이 설레어 서둘러 일어나던 나하고는 많이 다르다.
학교에서 문자가 왔다. 눈이 많이 와서 통학차 운행이 한시간 늦어진다고... 덕분에 아이들은 눈밭에서 신나게 놀다가 학교에 갔다.
어젯밤에 신랑은 트럭을 끌고 산에 가서 텐트를 치고 잤다. 아마 밤새 좀 추웠을 게다.
그래도 잠결에 싸락싸락 눈 내리는 소리와 바람에 이는 솔바람 소리와 혹은 나뭇가지에 거칠게 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생이 충만하지 않았을까?
무거운 집과 그 집에 있는 온갖 소유물과 가족관계로부터 벗어나 그냥 얇은 텐트 한 장과 침낭으로 생명을 지탱하고, 짧은 하룻밤이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천지와 하나가 되는 이 ‘홀로’라는 가벼움. 아침이 되어 신랑은 걸어서 집에 왔다.
눈이 내려 길이 미끄러워서 트럭을 못 가지고 왔단다. 신랑을 직장에 데려다 주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날이 정말 춥다.
집안에서 꼼짝을 않고 있다가 점심을 먹고, 눈 온 날의 풍경이 아까워 산책을 나갔다. 외투, 모자, 목도리, 장갑, 마스크까지 중무장을 하고 나섰는데도 바람이 몹시 차다.
그래도 이 알싸하고 상쾌한 겨울바람이 너무도 좋다. 겨울 바람은 정신을 번쩍 들게 하고, 머릿속 온갖 잡다한 것을 단번에 끊어내고 나의 내면으로 깊이 침잠케 하는 힘이 있다.
초록빛 밀이 자라고 있는 넓은 들판에는 눈이 나직하게 덮여 있고, 손대면 깨질 듯한 청아한 쪽빛 하늘에는 작고 가벼운 구름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논두렁 가의 갈대들은 바람에 휘적휘적 춤을 추고, 저수지에는 살얼음이 얼고, 얼지 않은 곳에서는 윤슬이 반짝이고, 저수지에서 놀던 물오리떼들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저 멀리 펼쳐진 산자락들은 눈 맞아 희디 흰 산맥을 드러내놓고 (섬진)강을 연모해 휘달이고 있다.
그 사이 빈 허공에서는 “웅~~웅~~웅~~”회오리 바람인 듯, 황소 바람인 듯 거친 숨소리를 내고, 나무들이 있는 산에서는 “쏴아아~~” 산속을 휘감아 도는 소리가 나고, 굵고 큰 대나무들이 있는 곳에서는 대나무들이 서로 부딪히며 “타닥타닥” 소리를 내고, 두께가 가늘고 작은 대나무밭에서는 큰 바람이 사그라들어 “스스스스~~”여리고 편안한 바람소리가 난다.
큰 바람이 이렇게 잔잔한 바람이 되니 마음을 평온하게 어루만져 준다. 고맙다.
길을 걷다가 나무들이 없는 곳에서는 바람에 등이 떠밀리다시피 몸이 움직이곤 했다.
그렇게 추운 날씨 속에 40여분 정도를 걸어 토지면에 도착했다. 내 또래의 지인이 하는 작은 카페에 가서 카푸치노 한 잔을 시켜놓고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나는 처음부터 그녀를 만나기 위해, 누군가 내려주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기 위해 길을 나선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잘 알진 못하지만 오늘은 웬지 그녀를 만나 얘기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차가운 겨울바람 속에서도 발품을 팔아 그녀에게 간 것이 아닐까?
누군가 보고 싶고, 마음 깊은 곳의 얘기를 나누고 싶어 차로 “씽씽~”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세찬 바람 속에서도 한 걸음 뚜벅뚜벅 걸어서 간다는 것, 그를 만나기 위해 온 세월 기다리고, 혹은 삼천일, 삼천배의 절절한 몸짓 뒤에 만나러 가는 것, 어떻게 보면 그리움의 깊이를 더하는 일이요. 정성의 마음을 들이는 몸짓이겠지. 그리하다 보면 나만 그에게 걸어갔던 것이 아니라 그도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