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5 (수)
햇살은 뜨겁지만 산들바람은 너무도 싱그러운 4월! 강가에 평상 하나 내어놓고 하루종일이라도 흐르는 강물을 보고 싶은 날들이다.
신록은 우거지고, 강의 물비늘은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새 한 마리 유유히 강을 날고, 선선한 봄바람 불어오는 오늘같은 날. 강가 평상에 앉아서 바라보는 강의 풍경들이 너무도 곱고 아름다워서 눈물나는 날. 나의 내면풍경도 저토록 조화롭고 고우면 참 좋겠다! 싶은, 강의 풍경이 미치도록 부럽고 서러운 날...
그리고, 섬진강이 바라다 보이는 이런 곳에 작고 예쁜 집 한 채 짓고 매일같이 흐르는 강을 보면서 살고 싶은 소망이 드는 날...
나는 어릴 적 깡촌에서 살아서 강을 잘 모른다. 고작해야 졸졸거리는 시냇물과 그 시냇물에서 잡았던 다슬기와 작은 송사리, 그 다슬기와 송사리를 담아오던 검정 고무신 그리고 가끔씩 물 위로 폴짝폴짝 뛰어오르던 물고기들과 이른 아침 물안개에 대해서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겨울이면 기기묘묘한 형상으로 얼어붙은 냇물, 그 얼음장 밑으로 흐르던 냇물의 소리, 겨울이 가고 봄이 오면 얼음이 점점 녹고, 또랑또랑 맑게 흐르던 시냇물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청미래 덩굴(맹감 나무) 이파리로 떠먹던 산속 옹달샘에 대해 말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결혼하고 나서 이 곳 구례에서 살게 된 지 벌써 13년이 되었건만 나는 아직도 섬진강에 대하여 말하기가 어렵다. 강과 어울려 논 유년시절의 추억이 없기 때문일까?
신랑은 어린시절, 친구들과 동네 형, 동생들과 강에서 멱을 감으며 놀았다고 한다. 신랑에겐 어쩌면 강은 친구같은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치만 이제 강도 조금씩 조금씩 나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 같다. 이전에는 주로 차를 타고 강 주변을 지나치는 편이었다면 요새는 걸으면서 강을 바라보고, 만나고 있다.
강 주변 노오란 갓꽃과 대나무 숲이 우거진 길을 따라 걷다가 강가에 선 미루나무도 만나고, 고개들어 올려다본 새파란 하늘에는 조각구름들이 걸려 있다.
“미류나무 꼭대기에 조각구름이 걸려 있네. 솔바람이 불어와서 살짝 던져 놓고 갔지요.”
노래가 저절로 흥얼거려진다. 햇살과 바람에 반짝반짝 빛나고, 잎새를 뒤척이는 미루나무를 보면 나는 한편의 아련한 장면이 떠오른다. 이 강 길 어디메 쯤에선가 자전거를 탄 6~70년대의 연인이 나타날 것 같은... 남학생은 흰 와이셔츠에 검정바지, 그리고 검은 모자를 쓰고, 여학생은 흰 블라우스 교복에 검정치마, 그리고 양갈래로 머리를 땋은 곱고 수줍은 얼굴로 뒤에 탄 모습...
봄날의 강과
반짝이는 미류나무와
자전거와
신록처럼 싱그럽고 파릇파릇한 앳된 연인들...
이 강길을 수십번, 수백번 오고가며 우정을 쌓고 사랑을 싹틔울 연인...
난 미류나무를 보면 그런 생각이 한편의 영화처럼 막 떠오른다.
그리고, 문척쪽의 섬진강 길을 걷다 보면 이쪽에서 일하셨던 큰시누이가 떠오른다. 올봄 매화꽃이 한창 이쁠 적에 하늘나라로 가신, 아직은 살날이 참 많았던 큰 누이. 그녀가 생각난다.
고등학교 들어갈 무렵, 부산 신발공장에 공순이로 들어가 살림살이 팍팍한 시골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보냈던 누이. 한 달에 이틀 정도만 쉴 수 있고, 명절때나 되어야 선물이라도 좀 사 들고 가족들 얼굴을 볼 수 있었던 누이. 그렇게 시작한 부산 생활은 결혼으로 이어지면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는데, 한 5년 전에 큰 누이는 부산 생활을 접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 때 그녀는 이렇게 얘기했다.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었는데, 여기 고향에 돌아오니 오래 살고 싶어졌네.”
아침마다 섬진강 길을 따라 자전거로 출근하면서 강물도 보고, 새도 보고, 산들바람이 불어오면 바람도 느끼고, 가을이 되면 그토록 좋아하던 코스모스도 보면서 늦깎이로 삶의 여유로움과 행복을 누렸던 큰 시누이.
그런데, 갑자기 불치병이 발견되면서 그녀는 얼마 전 이 세상을 떠나셨다. 그녀가 머물렀던 공간과 그곳에서의 추억들을 되새기자니 마음에 그리움과 슬픔이 차오른다. 그러면서 ‘산다는 게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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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섬진강은 나에게 작은 추억들과 아련한 슬픔들을 남겨 놓고 흘러가고 있다. 이 강은 흘러흘러 바다로 가겠지. 나의 마음도 흘러흘러 大海로 가고 싶다. 그리움도, 슬픔도, 아픔도, 기쁨도 모두 한줄기가 되는 大海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