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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열리는 여수 불꽃 축제 과연 역사 의식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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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준호 기자 

 

 

1948 불타는 여수 시가지.jpg

 

19481027일 진압군에 의해 불태워지는 여수시 가지

당시 호남신문사(현 광주일보의 전신)의 사진부장으로 활동한 이경모 선생 취재 사진

 

 

 

여수 불꽃 축제.jpg

 

 

 

 

 

여수시가 282023 여수 밤바다 불꽃 축제를 연다고 법석을 떨고 있다.

 

시는 이번 축제를 위해 약 4억 5천만원 을 들여 섬, 바다, 그리고 불꽃이라는 주제로 약 35분 간의 불꽃 쇼와 함께 공연행사를 마련 했다.

 

기자는 여기에 여수시와 축제 준비 관계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들은 역사의식이 있는지 말이다.

 

흔히 우리는 역사를 두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가 과거에 던지는 질문과 대화의 연속이라는 말로 정의한다.

 

자 그렇다면 75년 전 여수의 역사속으로 들어가보자.

 

19481019일 신월동에 주둔하고 있었던 국군 14연대 소속 일부 군인들은 제주 민중들을 학살하라는 당시의 명령을 거부하고 우리는 우리들의 사명이 국토를 방위하고 인민의 권리와 복리를 위해서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잘 안다면서 우리는 제주도 애국인민을 무차별 학살하기 위하여 우리들을 출동시키려는 작전에 조선 사람의 아들로서 조선 동포를 학살하는 것을 거부하고 조선 인민의 복지를 위하여 총궐기한 이후 이들과 함께 동조 하고 나선 여수 민중들의 항쟁으로 이어졌다.

 

즉 군인들의 봉기 민중 항쟁으로 이어졌고, 당시 이승만 정부가 이들을 진압하고자 여수를 함락시키면서 일어난 학살만행 그리고 빨치산 투쟁으로 이어지는 것이 여·순 항쟁 진행과정으로 번진다.

 

진압군의 공격으로 발생한 시민들의 피해는 이에 비할 수 없이 막대했다. 길가의 집들과 주요 건물들에는 전투과정에서 생긴 총탄 자국으로 벌집 뚫어지듯 상처가 나 있었다. 그러나 정작 가장 큰 피해는 직접적인 전투과정에서 생긴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진압군이 시내를 장악한 다음 피해가 발생했던 것이다.

 

여수에 진압군이 들어왔던 1026일 목조건물이 많았던 여수 서시장과 27일 충무동 시민극장 주변에서 일어난 화재는 여수 시내의 중심가를 완전히 잿더미로 만들었다. 이 화재로 서교동, 중앙동, 교동, 수장동이 전소됐고 석천동, 덕대동, 철산동은 일부가 불탔다. 이 지역이 시내 중심가였던 만큼 은행, 금융조합, 경찰서, 우편국, 토지행정처, 여수일보사, 금강·여수호텔, 여수극장, 각 병원 공장 등 각종의 근대적 건물들이 완전히 불에 타 여수의 가옥소실은 2천여 호에 이르렀고 피해액만도 100억 원에 이르렀다.

 

이 화재의 원인에 대해서는 진압군의 포격 때문이라거나, 봉기군이 최후 발악으로 석유를 뿌리고 달아나면서 방화했다거나 진압군이 학생들을 좇는 과정에서 의도적으로 불을 놓았다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그러나 봉기 잔여 세력은 이틀에 걸쳐 방화할 수 있는 전투력이나 여력을 전혀 갖고 있지 못했다. 더욱이 1027일은 시내에서 저항이 거의 사그라진 뒤였다. 또한 불이 난 시각은 어두워서 진압군이 박격포를 쏘지 않을 때였고 박격 포격으로는 그렇게 큰불을 낼 수도 없었다.

 

1026일에 불이 일어난 서시장은 서국민학교에서 250미터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는데, 당시 서국민학교는 진압군이 주둔하고 있던 곳이었다.

 

그럼에도 저녁 8시에 붙은 불은 진화작업을 하지 않아 서교동 일대로 번져 밤새도록 타다가 다음날 아침 10시경에야 넓은 도로를 넘지 못하여 꺼졌다.

 

1027일의 화재도 밤 8시경에 발생했다. 이 불은 교동을 태우고 해안으로 번져 휘발유통을 연달아 터뜨리면서 중심가를 완전히 태웠다.

 

불길이 시내를 전소시키는 상황에서 주민들은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불을 끄러 나갈 수 없었고 여수 주민들은 두 눈 뜬 채 집과 재산이 불타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불이 났을 때 소방서장이 불을 끄려고 사람들을 모으자 5연대장 김종원이 총대로 서장을 구타하여 쫓아냈다는 증언은 이틀 동안 여수 중심가를 전소시킨 이 불이 진압군의 의도적인 방화였다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일반 시민들을 봉기군과 동일시하고 그들의 인명과 재산을 빼앗는 이같은 초토화 작전은 정부수립이라는 국가권력 탄생 시기에 제주, 거창 등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대량학살과 유사했다.

 

제주와 여수에서 진압군은 주로 비전투원인 민간인을 대상으로 작전을 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일본군이 중국침략 때 사용한 죽여 없애고, 태워 없애고, 약탈해 없애는 삼광삼진(三光三盡)과 비슷했다. 일본군에 복무했던 전력이 있는 진압군 장교들에게 이런 방식의 작전은 낯선 것이 아니었다.

 

다시로 돌아 가보자 온 동네가 쑥대밭이 되고 화염에 휩싸인 이 아픔의 역사를 기억하고 애도하고 추모를 해도 모자랄 판에 다시 허공에 4억 5천만원 을 들여서 불 잔치를 한다는 것이 말이 되는지 묻고 싶다.

 

여수시 관계자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말만 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순 기념관을 건립한다는 둥 밑그림조차 없이 무작정 지르고 보는 안일한 행정만 있을 뿐이다.

 

역사는 기억의 연속성에서 진행된다. 어제를 기억하고 오늘의 현실을 직시하고 미래 세대에게 남겨 주는 것이 역사의 정의를 내릴 수 있다.

 

이제라도 이를 바로 알았음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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