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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사람들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

기사입력 2024.02.28 16: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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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민숙(시인, 샘뿔인문학연구소장)

     

    모든 시에는 시인의 삶이 녹아있다. 그러나 시인의 삶이 깃든 언어가 모든 시어를 주재하지는 않는다. 삶의 언어가 상상력을 빌어 새로운 창조의 틀을 만들어 내듯이 삶을 확장하는 의도로서의 상상력이 더 큰 역할을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집은 독자의 공감을 얻는 상상의 집이 되고 시인의 학교는 독자의 기억으로서의 아니 미래로서의 학교가 된다. 시인이 날마다 응시하며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가늠하는 바다, 출렁이는 파도, 그 아래의 몽돌은 슬픔과 아픔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으로서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달이 토해 놓은 모래들이

    달빛 같은 사구砂丘가 되었다는

    바닷가 언덕 위 몽암夢菴에 들어

     

     

    밤낮으로

    파도가 토해 놓은 말을 삼킨

    빈방에 가부좌로 앉아

    언덕 너머 먼 바다만 바라보았다

     

     

    별들은 지상에 내려와 꽃으로 피고

    꽃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달이라도 뜨는 날이면

    만조의 바다는 가릉빈가*처럼 날개를 파닥이고

    달빛이 새의 깃털처럼 창문으로 날아들었다

     

     

    달이 토해 놓은 모래를 삼킨

    언덕 위 외딴집에는

    소음의 모래 같은 침묵이 쌓이고**

     

     

    모래를 삼킨 빈방에 누워

    나는 붉은 새로 환생하는 꿈을 꾸었다

     

     

     

    *迦陵頻伽 : 불경과 인도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새

    **프랑시스 퐁주의 시에서.

     

     

    --<모래를 삼킨 집>전문/김경윤/무덤가에 술패랭이만 붉었네/걷는사람

     

     

    **빈집(夢菴), 빈방 바다 별 꽃 달 달빛인 가릉빈가 침묵 모래 붉은 새 환생

     

    **시인인가 바다인가 별인가 달빛인가 가릉빈가인가 모래인 침묵인가. 붉은 새의 환생으로 이어지는 삶과 상상 속의 시인(화자)은 바다를 보면서 달이 토해 놓은 모래의 사구에서 파도가 토해놓은 말을 삼키고 오직 침묵을 통해 시적해탈詩的解脫의 경지에 이른다. 해탈이란 이렇듯 아무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텅 빈 외딴집의 빈방으로부터 절대고독과 손잡으며 불현듯 다다르는, 아니 완벽히 껍질을 벗는 붉은 새인가?

     

     

    **우리가 걸으며 발바닥으로부터 얻어 듣는 모래의 길, 그 침묵이야말로 정신과는 반대편에서 심장에게 선물로 오는 물질적 존재의 현재성이던가? 모래는 무엇인가? 달빛과 모래는 새의 깃털로 날아가기 위해 빈방에서 영원으로 탈바꿈한다. 빈방에 깃든 아름다운 가릉빈가, 붉은 새, 빈 손, 빈 잔, 빈 마음...... 시인에게 묻는다. 비워버리셨습니까? 그 아픔은 떠나보내셨나요? 고통이란 이렇듯 빈방이 되었을 때 삶의 껍데기가 되어 물러나던가요?

     

     

     

    바다가 흰 날갯짓을 하며 뭍으로 날아오고 있다

     

     

    저 바다도 때로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은 날이 있어

    저렇듯 하얀 날개를 퍼덕이며 우는 거라

     

     

    낮에는 해를 품고

    밤에는 달을 품고

     

     

    바다가 흰 갈기를 휘날리며 뭍으로 달려오고 있다

     

    저 바다도 어느 날엔 그리운 이에게 달려가고 싶은 때가 있어

    저렇듯 흰 손을 흔들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거라

     

     

    제 설움에 겨워 시퍼렇게 시퍼렇게 가슴을 치며

    심연 가득 쌓인 그리운 말들을 해변 모래알로 쏟아 놓고

     

     

    -<바다의 비애> 전문/김경윤/무덤가에 술패랭이만 붉었네/ 걷는사람

     

     

    **바다는 흰 날갯짓의 울음, 바다는 흰 갈기를 휘날리는 백마의 열혈 단말마, 저렇듯 흰 손을 흔들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본 적 있는가 그대! 해와 달을 품고, 설움을 품고, 그리움을 품어 안고. 말과 말을 해변에 모래알로 쏟아놓은 그 심연의 시퍼런 아우성을 그대는 들었는가 바닷가에 앉아서. 단순한 흰 날갯짓이 아니라 바다의 가슴에 가 닿아야 받아 안을 수 있는 그 복잡성의 한 생이 파도를 타고 출렁이며 달려온다.

     

     

    **아무에게도 안겨보지 못한 희디흰 포말은 순간의 사랑일 테며 사라져버리는 물거품, 생이라는 바다인 것을... ...바다가 보여주는 비애인 것을, 그는 노래하고 있다. 노래는 시가 되어 또 하나의 새로운 언어를 확장시켜 주고 있다. 이제는 우리도 바다를 하늘을 파도를 구름을 노래하게 되었다. 모래인 모래가 아니라, 삶이 깃든 모래를 걸으며 긴 머리를 흩날리며. 이성과 철학 아닌 시적 영감의 하루를 풀어놓고 싶어졌다. 김경윤의 오랜 응시 <바다의 비애>를 연주하며. 바이올린 한 현의 반음밖에 못 올린다 해도. 어쩔 줄 몰랐던 우리들의 바다는 얼마나 많은 확장을 이룰 것인가. 이제부터 시란! 바다의 흰 포말을 듣고 그리워하며 날아가는 흰 날개의 일상으로부터일 것이다. 그 일상의 고독으로부터라면 더 말해 무엇! 고독은 시세계의 확장에 특효약임을... ...그녀의 말에 귀기울여본다.

     

     

    **“20세기 초반에 시인들은 독특한 의상과 말투, 괴상한 행동 등으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기행들은 실은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눈요깃거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시인에게 정말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간은 따로 있었던 거죠. 혼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거추장스러운 망토와 가면, 장신구들을 모두 벗어던진 채 고요한 침묵에 잠겨 아직 채 메워지지 않는 종이를 앞에 놓고, 조용히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그런 순간 말입니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1996127,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상 수상 소감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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