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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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사람들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이민숙 (시인 샘뿔인문학 연구소 소장) [노인과 바다]와 생의 절정에 대하여; 사무엘 울만은 노래했다. 청춘이란 인생의 어떤 시절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이며 청춘이란 깊은 생의 신선함이라고. 희망! 희열! 용기!와 힘의 메시지를 갖는 한, 그대의 젊음은 오래도록 지속되리라고... ...청춘은 때때로 이십 세의 청년보다 칠십 세의 노인에게 아름답게 존재한다고. 헤밍웨이는 그의 역작 ‘노인과 바다’에서 노인의 지칠 줄 모르는 어떤 마음의 상태를 그렸다. 그가 노인인가 청춘인가는 그의 나이에 걸맞는 평가로서 주의를 끌 수 없다는 것, 바다로 나아가는 노인에게선 그 추레한 차림새의 겉모습을 보고는 짐작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있다. 책을 읽는 독자에게 바다란 무엇인가. 모든 것을 품고 있는 바다! 그러나 바라만 보아서는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는 바다! 살아있음의 문제란 그런 게 아닐까? 소설 첫 머리에서 노인은 그의 친구인 소년에게 말한다. “만일에 네가 내 친자식이라면 너를 데리고 어떤 모험이라도 해 볼 텐데... ....” 노인과는 반대되는 성격의 아버지를 둔 소년에게는 이 노인의 어떤 면이 좋았을까. 그는 말한다. ‘어부로는 할아버지가 최고’라고. ‘나보다 더 나은 어부들도 많아’라는 노인에게 소년은 버럭 소리 지른다. “쾌바(천만에)!” “고기 잘 잡는 어부는 많아요. 또 훌륭한 어부들도 있기는 하구요. 그러나 할아버지가 세계 제일이에요.” 작가는 대체 어떤 스토리를 구상해놓았기에 이런 이야기로 소설을 시작하는 걸까. 눈밝은 독자의 헤밍웨이적 인생관이란, 바다의 깊은 곳을 숨쉬는 노인이 보여주는 ‘청춘’의 삶을 맛 본 후에라야 눈치 챌, 그런 인문학적 시간이라고 해야 할까. 좋은 책은 그렇다! 읽고 음미하고 음미하면서 되새기는 시간이 필수적인. ‘노인과 바다’는 단순하다 그러나 명쾌하진 않다. 논리적인 계산력으로 잡히지 않는 게 노인의 행위이고 소년의 긍지인데, 그 둘의 교집합이 빚어내는 사랑 속에 들지 않고는 희미하고 가련하기까지 하다. ‘행운의 날이 바로 오늘이지. 매일 매일이 새로운 날인데 말이지. 운수가 좋다는 건 좋은 일이야. 그렇지만 그냥 앉아서 행운을 기다리는 것보다 낚싯줄을 제대로 드리워 놓는 게 내가 우선 할 일이지. 어느 순간 갑자기 행운이 다가올 때를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를 해두어야 그걸 놓치지 않을 테니까.’ 드디어 고기를 만난다! 하늘에는 어떤 낌새를 냄새 맡은 군함새가 날고 바다 속엔 해파리 떼가 부유하고, 그 곁으로 플랑크톤이 떼 지어 헤엄친다. 첫 번째 수확물 다랑어를 잡아 고물 아래쪽에 처박는다. 노인이 점지해놓은 항해 85일째, 행운의 날! 낚싯줄을 잡고 있는 노인의 손에 느껴지는 촉감! 미세한 느낌으로도 알 수 있는 그 거대한 무게! 그러나 그놈은 자취도 없이 끝없이 노인을 끌고 나아간다. 입에는 낚싯바늘을 문 채.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누구도 가지 못하는 그곳까지 저 녀석을 따라가서 찾아내는 거야.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가지 못하는 그곳까지 말이지... ...’ 있는 줄(線), 예비 사리를 모조리 하나로 연결한 다음 노인은 혼잣말로 말한다. “고기야.” 큰 소리로 부른다. “내가 죽을 때까지 너와 상대해 볼 테다.” 그 다음 말이 걸작이다. ‘아마 저놈도 나하고 같은 생각이겠지.’ 생명이란 어떤 것인가? 목숨 걸고 나아가야 할 저 먼 바닷길 아니던가? 헤밍웨이의 속삭임이 들려오는 순간!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기 한참 전이지만, 노인의 생은 그때부터가 절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휘파람새를 만나 몇 마디 나누다가 노인은 갑자기 고기가 요동치는 바람에 물속으로 빠져들 뻔 한다. 쥐가 나고 줄에 쓸려 피가 나는 손! 손을 위하여 평소엔 즐겨먹지 않았던 다랑어 조각을 먹는 노인! 쥐가 나며 아픈 손 가득 바다 위의 고독을 느끼는 노인! 그러나 고개를 쳐다보니 구름이 피어오르고 그 아래로는 물오리 떼가 나타났다가 흩어지고, 그런 것들을 보고 있으려니 바다에서는 누구도 외롭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 존재의 역설적 고독 속에서 드디어 고기의 실체를 확인하는데... ... 그놈은 노인의 배 길이보다 2피트는 더 길겠다는 걸 알아채는 노인! 며칠 동안이나 고기를 상대하느라 잠 잘 수 없는 노인의 한 생각을 엿본다. “저게 몇 사람분이나 될까? 과연 사람들이 저걸 먹을 만큼 가치가 있을까? 아니지, 절대로 아니야, 고기의 태도와 대단한 위엄으로 봐선 저걸 먹을 자격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지.” 고기, 노인, 바다, 피 말리는 경쟁의 줄, 그 위를 물구나무 서서 휘날리는 생명의 가치! 마침내 어느 순간 튀어 오르는 거대한 고기를 상대하느라 손은 심한 상처를 입고 고래고기 살점 속으로 내동댕이처진 노인은 그 실체를 보며 다시금 격정의 사투를 예감한다. 거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기진맥진한 채로 마지막 힘을 모아 고기의 심장에 작살을 꽂아 넣었다. 고기가 뒤집힌다. 그러나 그 고기를 싣기엔 턱없이 작은 배! 모든 기력이 빠져나간 채로 노인은 귀향을 서두르지만... ...고기를 배에 매달고 나서 확인한 그 사실이 노인에겐 꿈처럼 느껴졌고,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생의 커다란 행운일 것만 같았고... ...그러나 행운의 순간이야말로 진정한 한 순간이었을 뿐! 행운으로서의 삶이라면 그 의미가 무엇인가! 노인이 잡은 고기 18피트(5.49미터)인 물질적 의미인가? 사투를 치룬 결과물의 의미인가? 아무도 찾을 수 없던 바다의 한가운데를 홀로 점령했던 한 인간이 선언했던 그 의식의 심층부인가? 삶의 승리를 정의했던 그 많은 철학자들의 가치 용기 때문인가? 예술작품을 어느 한 편향적인 의미부여로 정리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소년’과 주고받은 서로의 존재적 선물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소년이 흘린 눈물, 소설의 마지막은 노인의 기진맥진과 허기와 손의 상처와 거대한 뼈다귀로 귀환한 그 고기의 형태를 배치시키며 대단원의 막이 내려진다. 소년은 ‘할아버지’를 위해 동분서주한다. 어떤 사랑도 그 풍경을 대신할 수 없으리라. 둘만의 가슴을 채우며 영혼을 쓰다듬는 사랑(노인의 행운의 날처럼) 말이다.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영위하다 사라지는 게 삶이라면, 그 둘은 바다를 향한 끝없는 ‘사고실험(思考實驗)’을 했지 않았을까......아인슈타인이 시간과 속도에 대하여 그 빛을 상상하며 끝없이 이어지는 생각의 생각을 끌고 나아갔듯이... ...그러나 소년은 사고실험을 넘어서 틀림없이 할아버지가 그 고기를 만났던 바다의 한가운데로 ‘실제로’ 나아갔을 것이다. 우주에 수많은 인공위성을 발사시킨 아인슈타인의 후예들처럼, 할아버지 없이 할아버지를 그리워하며, 아! 이때 할아버지가 계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 (그 애가 있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했던 노인의 말의 변용처럼) 이건 그들의 삶을 통한 꽃의 의미, ‘노인이 소년이며 소년이 노인이다’라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 수레바퀴의 주인공 인간 헤밍웨이가 내게 던져준 선물이다. 덥석 받아 안는다. 우리는 누군가가 그립다. 순간순간. ‘우리는 우리’가 될 때 삶의 의미를 획득한다. 너는 너이며 나이기 때문이 아니랴. 또한 소설 [노인과 바다]는 삶의 공간과 시간을 더없이 균등하게 뜨개질한 뜨거운 은유다. 바다와 구름과 생명과 햇살과 ‘고기와 인간’을 대등한 선상에 놓은 작가의식의 결정체다. 소년과 노인의 일상(시간의 축)⟹ 집에서 바다로 떠남⟹ 고기를 만남⟹ 끊임없이 소년을 생각함⟹ 고기를 만나 사투를 벌임(공간의 축)⟹ 독백과 고독한 생명으로서의 자기 확인⟹ 상어떼의 핏빛 갈취(이거야 말로 세상을 살아오며 확인하는 삶의 공허 아닐까)⟹ 뼈밖에 남지 않은 수확물, 대단히 복합적인 플롯(사자꿈의 현현인 ‘고기’를 잡고 그 고기를 뜯어먹는 상어떼와 ‘뼈라는 거대한’ 그러나 인간들은 먹을 게 없는 결과물)⟹ 돌아온 어부를 바라보는 놀라움⟹ 휴식과 깊은 잠. 그는 영원히 늙지 않는 노인이며 청춘인 것이다! 공간이라는 바다 바다라는 인생 사투의 고기잡이 목숨 건 투쟁 상처의 쓰라림 좌절 아닌 좌절... 스스로에게 던지는 바다 한가운데의 언어적 영감들(독자로서의)에 깊이 경도되는 체험들이 우리에게 주어진 절정체험이라고 감히 정리한다. 누구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닌 ‘고독한 체험’을 노인은 시종일관 독백체로 노래하였다. 헤밍웨이의 언어, 뜨거운 태양빛 거대한 고기뼈 푸른 바다빛의 홍,청,백 그릴 수 없는 것까지를 보여준 사고실험적 삶의 언어에 고개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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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사람들과 함께 하는 인문학 산책이민숙(시인 샘뿔인문학연구소장) 기어코 이렇게 묻고 말았을 것이다. 난 어른이니까…. 그 어떤 것도 마음으로 이해하려 들지 못 하는 어른, 설명하고자 해도 설명할 수 없는 어린왕자는 그 어른들을 이해하기 어려워한다. 여행을 떠나는 어린왕자, 아니 떠돌이 어린 왕자, 그가 간 곳마다 통하지 않는 말들, 왜 별들의 세계에는 어이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곳을 그렇게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던 걸까? 말은 통하는 말일 때 말이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없는 문자는 말이 아니다! 별이니까……. 아니 별난 별이니까……. 아무도 가 본 적 없는 그곳엔 우리가 흔히 보았던 사람들이 있지만, 어린왕자와는 도통 통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오직 확신에 찬 삶을 보여주려 하지만 그 확신이란 왠지 시시하고 시시한 것뿐이다 어린왕자에겐. 별은 밤이면 밤마다 이야기한다. 그리운 어떤 이의 얼굴을 생각하게 한다. 꿈꾸게 한다. 가장 어두운 하늘에서만 반짝이는 별빛, 우리의 가슴이 어둠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별빛은 그 가슴을 밝혀주려는 것 같다. 그랬던 것 같다. 아무에게도 할 수 없는 이야기가 있다고 치자. 홀로 간직하느라 벅찬 그 마음은 어느새 별빛으로 변하여 저 먼 곳에 존재할 것만 같은 사랑을 향해 날아간다. 그러나……. 그 사랑은 내 마음을 받아줄 수 있을까? 우주의 까마득한 어느 공간에나 있을법한 사랑, 사랑과 내 마음이 만나면 무슨 이야기를 할까? 빛나는 비밀이 내 마음이다. 그저 빛나는 비밀이 내 사랑이다. 왕도 허영심에 빠진 사람도 술꾼도, 가로등을 일 분에 한 번씩 켰다 껐다 해야 하는 사람도, 늙은 지리학자도, 아무런 비밀이란 없어야 하는 듯이 끝없이 축적된 에너지마저 한낱 스쳐 지나가는 바람 같은 것을 위하여 살아가는 사람들뿐인 그 소혹성, 어린왕자는 이상하고 이상한 질문만 솟구치는 걸 느꼈는데……. 그렇다면 우리의 소중한 별 지구는 어떠한가…….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복작거리는 수십억의 인간 군상들이 살고 있는 곳. 지구의 주인공 당신은 이곳에서 무슨 생각을 하며 살고 있는가. 오늘까지 당신이 해온 일 따위 말고, 당신이 만난 뱀은 어떤 뱀이었는가. 당신이 만난 꽃은 어떤 꽃이었는가. 당신은 어느 누군가를 길들여본 적이 있는가. 왜 우리는 길들여지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인가. 당신이 만난 여우에게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당신의 장미꽃에게, 그 길들였던 비밀을 여기에 털어놓을 수 있는가……. 이야기는 그리하여 아름답다. 마음 깊은 곳에서 터져 나오는 비밀스러운 고백만이 충만하다. 마음을 터놓고 할 수 있는 이야기에는 고귀함이 깃들어있다. 떠들썩 환호하지 않아도, 장롱에 감춰진 재산의 양을 자랑하지 않아도, 왕처럼 거들먹거리는 명령에 길들지 않았다면, 허영심이라는 것, 필요 없는 지적(知的) 백과사전을 풀어놓는 일 없다면, 우리의 만남은 은하수처럼 가없는 사랑으로 거듭날 것이다. 그렇게 서로를 길들일 일이다. 마음의 눈으로 보는, 마음의 눈빛을 나누라는 어린왕자의 맑은 충고를 잊지 말 일이다. 어린왕자의 작은 속삭임, 얼마나 아픈 슬픈 이야기인가. 사랑이란, ‘사막 속의 샘과 같은 웃음소리’라고 했다. 작가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를 ‘어느 누구도 갖지 못할 별들’이라고 한다. ‘웃을 줄 아는 별’ 그게 그 별이어서 일까? 하늘 깊은 곳 어느 곳에서 웃고 있을 어린왕자는 누구의 선물인가? 선물은 선물을 받아 껴안는 진실한 마음이 아닐까? 쏟아지는 별빛을 바라보며 그 웃음을 느낄 수 있는 사람, 사랑 가득 스스로 선물 받는 사람, 별이란 늘 반짝이고 있는 사랑이면서 허무를 극복시키는 우주다. 우주가 사라질 때까지 사라지지 않는 선물 보따리를 오늘 밤, 실컷 우러러본다면 그곳으로 돌아간 어린왕자를 만날 수 있으리라. 여행하라 저 우주의 선물 속으로! 여행이라는 둘도 없는, 대단히 권태로워진 일상 도리도리, 재구성의 순간들을 어린왕자 별빛처럼 거닐었던 어느 날을 회상해본다. 또한, 가차 없는 언어와 행위, 위버멘쉬의 창조자 니체가 말했던 걸 읽은 기억이 있어 옮겨본다. “사람들은 여행자를 다섯 등급으로 구분한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여행하면서 오히려 관찰당하는 사람들 --그들은 여행의 대상이 되는 사람들이며 동시에 눈먼 사람들이다; 다음 여행자는 실제로 스스로 세상을 관찰하는 사람들이다; 세 번째 여행자는 관찰한 결과에서 그 무엇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다; 그 다음 등급의 여행자는 체험한 것을 자신 속에 가지고 살며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니고 있다; 끝으로 최고의 능력을 가진 몇몇 사람도 있다. 그들은 자신이 관찰한 모든 것을 체험하고 동화하고 난 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곧 그것을 여러 가지 행위와 작업 속에서 기필코 다시 되살려나 가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여행자에 대한 이 다섯 부류에 따라 대체로 사람들은 삶의 모든 여정을 지나간다. 가장 낮은 등급의 여행자는 순전히 수동적인 사람들이고, 가장 높은 등급의 여행자는 남겨져 있는 내면적 과정들을 아낌없이 발휘해나가는 사람들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Ⅱ』‘여행자에 대하여’ 부분 /프리드리히 니체/책세상 어린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야말로 가장 높은 등급의 여행자였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모든 여행의 체험들을 훌륭한 문학으로 승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우리가 되돌려 읽으며 우리의 마음의 눈빛을 통해 혜안을 갖도록 조단조단 이야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물며 그는 저 가없는 사막이라는 우주 속으로 사라진 후 끝내 우리에게 되돌아오지 않았다. 그 사라짐의 예감을 어린왕자는 <어린왕자> 속에서 몹시 슬퍼하고 있다. 그러나 설렘이란 역설적인 것! 그런 여행의 날처럼, 니체와 생텍쥐페리의 언어 속에서 ‘웃음 가득한 별’의 사랑을 노래하는 날이다. 마냥 먼 먼 우리네 삶의 별빛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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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사람들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이민숙(시인, 샘뿔인문학연구소장) 모든 시에는 시인의 삶이 녹아있다. 그러나 시인의 삶이 깃든 언어가 모든 시어를 주재하지는 않는다. 삶의 언어가 상상력을 빌어 새로운 창조의 틀을 만들어 내듯이 ‘삶을 확장하는 의도로서의 상상력’이 더 큰 역할을 한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시인의 집은 ‘독자의 공감을 얻는 상상의 집’이 되고 시인의 학교는 ‘독자의 기억으로서의 아니 미래로서의 학교’가 된다. 시인이 날마다 응시하며 인생이란 무엇인가를 가늠하는 바다, 출렁이는 파도, 그 아래의 몽돌은 슬픔과 아픔과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으로서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달이 토해 놓은 모래들이 달빛 같은 사구砂丘가 되었다는 바닷가 언덕 위 몽암夢菴에 들어 밤낮으로 파도가 토해 놓은 말을 삼킨 빈방에 가부좌로 앉아 언덕 너머 먼 바다만 바라보았다 별들은 지상에 내려와 꽃으로 피고 꽃들은 하늘로 올라가 별이 되었다 달이라도 뜨는 날이면 만조의 바다는 가릉빈가*처럼 날개를 파닥이고 달빛이 새의 깃털처럼 창문으로 날아들었다 달이 토해 놓은 모래를 삼킨 언덕 위 외딴집에는 소음의 모래 같은 침묵이 쌓이고** 모래를 삼킨 빈방에 누워 나는 붉은 새로 환생하는 꿈을 꾸었다 *迦陵頻伽 : 불경과 인도 신화에 나오는 상상의 새 **프랑시스 퐁주의 시에서. --<모래를 삼킨 집>전문/김경윤/『무덤가에 술패랭이만 붉었네』/걷는사람 **빈집(夢菴), 빈방 ⟹바다 ⟹별 꽃 달 ⟹달빛인 가릉빈가 ⟹침묵 ⟹모래 ⟹붉은 새 ⟹환생 **시인인가 바다인가 별인가 달빛인가 가릉빈가인가 모래인 침묵인가. 붉은 새의 환생으로 이어지는 삶과 상상 속의 시인(화자)은 바다를 보면서 ‘달이 토해 놓은 모래’의 사구에서 파도가 토해놓은 말을 삼키고 오직 침묵을 통해 시적해탈詩的解脫의 경지에 이른다. 해탈이란 이렇듯 아무도 아무것도 남기지 않는 텅 빈 외딴집의 빈방으로부터 절대고독과 손잡으며 불현듯 다다르는, 아니 완벽히 껍질을 벗는 붉은 새인가? **우리가 걸으며 발바닥으로부터 얻어 듣는 모래의 길, 그 침묵이야말로 정신과는 반대편에서 심장에게 선물로 오는 물질적 존재의 현재성이던가? 모래는 무엇인가? 달빛과 모래는 새의 깃털로 날아가기 위해 빈방에서 영원으로 탈바꿈한다. 빈방에 깃든 아름다운 가릉빈가, 붉은 새, 빈 손, 빈 잔, 빈 마음...... 시인에게 묻는다. 비워버리셨습니까? 그 아픔은 떠나보내셨나요? 고통이란 이렇듯 빈방이 되었을 때 삶의 껍데기가 되어 물러나던가요? 바다가 흰 날갯짓을 하며 뭍으로 날아오고 있다 저 바다도 때로는 하늘로 날아오르고 싶은 날이 있어 저렇듯 하얀 날개를 퍼덕이며 우는 거라 낮에는 해를 품고 밤에는 달을 품고 바다가 흰 갈기를 휘날리며 뭍으로 달려오고 있다 저 바다도 어느 날엔 그리운 이에게 달려가고 싶은 때가 있어 저렇듯 흰 손을 흔들면서 누군가의 이름을 부르는 거라 제 설움에 겨워 시퍼렇게 시퍼렇게 가슴을 치며 심연 가득 쌓인 그리운 말들을 해변 모래알로 쏟아 놓고 -<바다의 비애> 전문/김경윤/『무덤가에 술패랭이만 붉었네』/ 걷는사람 **바다는 흰 날갯짓의 울음, 바다는 흰 갈기를 휘날리는 백마의 열혈 단말마, 저렇듯 흰 손을 흔들며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본 적 있는가 그대! 해와 달을 품고, 설움을 품고, 그리움을 품어 안고. 말과 말을 해변에 모래알로 쏟아놓은 그 심연의 시퍼런 아우성을 그대는 들었는가 바닷가에 앉아서. 단순한 흰 날갯짓이 아니라 바다의 가슴에 가 닿아야 받아 안을 수 있는 그 복잡성의 한 생이 파도를 타고 출렁이며 달려온다. **아무에게도 안겨보지 못한 희디흰 포말은 순간의 사랑일 테며 사라져버리는 물거품, 생이라는 바다인 것을... ...바다가 보여주는 비애인 것을, 그는 노래하고 있다. 노래는 시가 되어 또 하나의 새로운 언어를 확장시켜 주고 있다. 이제는 우리도 바다를 하늘을 파도를 구름을 노래하게 되었다. 모래인 모래가 아니라, 삶이 깃든 모래를 걸으며 긴 머리를 흩날리며. 이성과 철학 아닌 시적 영감의 하루를 풀어놓고 싶어졌다. 김경윤의 오랜 응시 <바다의 비애>를 연주하며. 바이올린 한 현의 반음밖에 못 올린다 해도. 어쩔 줄 몰랐던 우리들의 바다는 얼마나 많은 확장을 이룰 것인가. 이제부터 시란! 바다의 흰 포말을 듣고 그리워하며 날아가는 흰 날개의 일상으로부터일 것이다. 그 일상의 고독으로부터라면 더 말해 무엇! 고독은 시세계의 확장에 특효약임을... ...그녀의 말에 귀기울여본다. **“20세기 초반에 시인들은 독특한 의상과 말투, 괴상한 행동 등으로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을 즐겼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기행들은 실은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눈요깃거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시인에게 정말로 중요하고 의미 있는 시간은 따로 있었던 거죠. 혼자 자신의 방으로 돌아가 문을 걸어 잠그고, 거추장스러운 망토와 가면, 장신구들을 모두 벗어던진 채 고요한 침묵에 잠겨 아직 채 메워지지 않는 종이를 앞에 놓고, 조용히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그런 순간 말입니다. ” -비스와바 쉼보르스카 /1996년 12월 7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노벨상 수상 소감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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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사람들과 함께하는 인문학 산책이민숙 샘뿔 인문학 연구소 소장 비(悲), 함께 아픔을 꽃이 아름다운 것은 피면서 지기 때문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살아남았다는 것 삶의 매 순간이 절실하고 아릿한 것은 살아가는 것과 죽어가는 것이 함께하는 까닭이다 그러므로 모든 목숨붙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살고자, 살아남고자 하느니 불타고 무너지는 세상 죽임당하는 뭇 생명의 애절한 눈빛 앞에서 지금은 우리 저마다의 아픔으로 서로를 품어 안아야 할 때 우리 모두 한목숨으로 이어져 있으니 그렇게 함께 죽어가고 있으니 사랑이란 죽어가는 내가 죽어가는 너를 혼신으로 품어 안는 것 지금은 함께 아파야 할 때 지극한 아픔 너머에서 새 생명 환하게 태어나는 것이니 --여류(如流) 이병철, 2024 새해 새아침에 태어나고 있습니다. 새해의 새날 속에서 복수초가 매화가 안개가 바람이 눈꽃이 그리고 상처를 뚫고 새살이... ...죽음과 탄생이 다르지 않고 고통과 환희가 따로가 아니라고 합니다. 모든 것은 하나! 하수구 속에서 쏙 고개를 내미는 시궁쥐의 눈빛과 우리의 안방을 드나드는 강아지의 눈빛과 참나무 둥치를 오르락내리락하며 노는 다람쥐의 눈빛이 다르지 않습니다. 사는 곳은 전혀 달라도 그들의 생명놀음은 하나! 그 나날의 애씀이 산을 푸르게 하고 나무를 간지럼 태우듯이 우리가 따스한 방안에서 마시는 따듯한 차 한 잔도 ‘나와 너’의 아픔 속에서 서로를 감싸 안음으로써 가능하다 할 것입니다. 미역국 한 사발을 앞에 놓고 살짝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가난한 어느 시인의 오늘 저녁답에 탄생의 희열과 죽음 가까이에서 살아남았다는 절실함, 아릿함의 시어들이 선물로 도착합니다. 새해 아침에 받아든 여류 이병철 선생님의 편지에 세상을 얻은 듯, 외로움이 싹 가십니다. 부실해진 위(胃)로는 먹을 게 없고 먹어도 에너지로 바꾸기 어려워진 나는 가을 지난 홍시가 주식이다 짜지도 맵지도 거칠지도 않은 이 부드러운 선물 핍팔라나무 아래서의 그 분도 아니라면, 누가 내게 이토록 하릴없이 입맞춤하고 있는가 목숨을 한바탕 가위질 당하고도 버팅기도 있는 힘은 두려워지던 세상에 다시 한 번 친해질 생각을 하게 된 것은 부드러움 덕분이다 너무 황홀하게 입술에 닿아 순간 사라져가면서 나의 육체가 되는 그것, 위용도 빛남도 거셈도 아니다 살고 싶게 만드는 건 진정, --<홍시>전문/이민숙/『동그라미, 기어이 동그랗다』 ‘홍시’는 우리 민족의 신화 속 과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곶감이 되는 감, 예지의 과일, 앞마당 뒷마당 탱글거리며 익어가는 민중의 나라, 유난히 친숙한 풍경이 이젠 도시의 외곽 시장 한 모퉁이에서 미소 짓습니다. 그렇지만 집집마다 홍시는 겨울밤의 적막을 달래주는 달콤함이지요. 신화학자 ‘조셉 캠벨’은 말했습니다. “신화에는, 심연의 바닥에서 구원이 음성이 들려온다는 모티프가 있어요. 암흑의 순간이 진정한 변용의 메시지가 솟아나오는 순간이라는 거지요. 가장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 빛이 나온다는 겁니다.” 오래 전 목숨이 경각에 달렸을 때, 홍시는 내 주식이었지요. 지금까지 이 시 덕택에 홍시 선물을 받습니다. 얼마 전에 내게 온 홍시들... ...내 몸을 살려준 그 사랑을 누구에게 되돌려줄까... ...제게 ‘홍시’는 그런 신화적 구원의 메시지였습니다. 그런 새해가 시작되어 고맙습니다. 아프고 힘든 생명들의 지구, 이제 우리에게 내면에 감추어진 신화적 메시지를 받아 적는 의지의 하루하루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시의 시간들과 함께 독자 여러분께도 달콤한 홍시처럼 자신만의 신화를 밝혀 적는 바알간 새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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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의 계절, 김치아리랑이민숙 여수 샘뿔인문학 연구소 소장 새롭게 화려하게 변하는 삶의 지평도 우리네 핏줄 속 깊은 이야기는 함부로 고치거나 버릴 수 없다. 그것을 문화라고 할 것이다. 의, 식, 주, 정치 경제, 많이도 변해가는 21세기 대한민국. 하지만 우리들의 100년 전은 어땠을까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우리 부모님, 조부모님이 보여주고 들려주어 생생한 이야기들, 아니 심심하고 담백하게 무엇보다도 소박 진실하게 살았던 우리들의 어린시절 그 집, 입었던 옷, 먹었던 먹을거리들. 내 입을 내 몸을 감싸고도는 그 향기를 어찌 쉽게 잊을까, 마땅찮다고 버릴까. 그러므로 더 더욱 크게 위험한 후쿠시마 오염수가 전인류를 위협할수록 그 막대한 재해를 방지하여야 할 이유! 멸치젓 까나리액젓 어리굴젓, 갈치속젓, 새우젓의 그 현묘(玄妙) 기이(奇異) 상큼한 맛! 그 많은 각각의 전통 발효식품들을 어찌 모른 체 밥상에 앉을 수 있을까. 올해처럼 김치가 절실한 그리움일 때가 없었던 것 같다. 마지막? 설마! 고추장도 된장도, 그 모든 음식의 체질을 결정하는 우리만의 맛 그 재료들이 위협 받고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가마솥에 삶아 절구통에 찧어내는 그 고소한 된장 재료인 메주콩을 삶는 향기를 거부할 수 없으리라. 마트에 내놓는 그 상품들, 견줄 수 있을까? 아직도 친정엄마는 콩을 골라 사고, 몇 일씩 간장 담글 날을 헤아려보고, 가을엔 고추장을 담는다. 곱고 고운 고춧가루는 고추장용, 좀 더 보드라운 건 김장용, 그렇게 방앗간엘 들락거린다. 고추와 젓갈과 마늘과 생강과 파와... ...그 융복합적 음식의 총체, 세계가 감탄하는 김치의 효능이야 더욱 말해 무엇하랴! 세계를 휩쓴 전염병적 사태 속에서 치유의 묘를 발휘했던 대한민국의 저력이 김치가 아닐까 예측한 의료인들이 없지 않았으니. 오래 전 친정엄마는 이러쿵 저러쿵 온동네 최고의 맛인 그 오오랜 항아리의 비법을 건네주셨다. 햇살 풍부한 남향 아파트 9층에 사는 나는 베란다에 항아리를 놓고 그 비법대로 간장을 담아왔다. 그 맛깔스런 조선간장 조선된장을 어디에 가서 살 수 있으랴! ‘엄마표 레알 된장’이라고 아이들은 짐짓 엄지척 감탄한다. 그에 따라온 염려, 몇 번은 쓸 소금은 있으나... ...걱정이 아니 된다면 거짓말이다. 후쿠시마 오염수에 노출된 소금으로 어떻게 친정엄마의 비법인 조선간당을 담글 수 있을까? 오늘은 그 가슴의 정성으로 쓴 이민숙 시집 『지금 이 순간』 속에서 <김치아리랑> 시를 끄집어내어 본다. 김치와 첫사랑, 김치와 풋사랑, 김치를 담고 김치를 먹으며 김치를 나누어주며 자부심 가득했던 그런 시간들을 붙잡아 쓴 시들이다. 김치아리랑 연작시 14편이 실려 있다. 그 중 한 편, 춘향아 너 김치 담가 보았니? 춘향이는 김치 담그듯 사랑을 했을까? 엄마 월매는 김치를 잘 담갔을까? 엄마는 왜 내게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엉터리인 내게? 월매도 춘향에게 가르쳐주지 않았을까? 김치 담그는 법을? 춘향이는 이도령에게 깍두기에 막걸리 한 잔 하자고 했을까? 춘향이는 쑥대머리만 불렀을까? 춘향이에게서 익은 김치 냄새가 났다면 변사또는 뭐라고 했을까? 춘향이는 언제쯤 사.랑.사.랑.내.사.랑을 위해서 김치를 담갔을까? 춘향이가 생生처음 담근 김치로 첫 상床을 차렸을 때 이도령은 뭐라고 했을까? 오늘 밤 나 홀로 담근 김치처럼 얼큰 달콤 씁쓸했을까? 두리뭉실 허둥지둥 맛은 고사하고 맘도 형편없이 담갔을까? 춘향이는 몇 번이나 김치 때문에 한숨을 쉬었을까? 구름에서나 내려다보고 있는 저 ( ) 때문에 때죽꽃 눈물방울 떨치고 있는 나처럼? 춘향이는 옥獄에서도 김치 생각을 했을까? 비단실 뽑으며 시나 쓰고 있었을까? 김치 하나 함께 먹을 ( ) 없이 붉은 수숫대 바람 부는 아침처럼? --<춘향에게 -김치아리랑 8>/『지금 이 순간』/고요아침 김치는 우리가 우리의 미래세대에게 가장 자신있게 남겨줄 문화유산이다. 음식의 최우선 가치인 맛과 멋을 동시에 갖춘 과학적인 예술품이다. 현대인의 건강이 위협 받을수록 우리의 고유한 보물인 발효식품들은 아름답게 삶의 향기를 꽃피울 것이며 끝끝내 견딘 지향점의 한 꼭지가 될 것이다. 어떻게 온전히 지켜낼 것인가. 크나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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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란 무엇일까 -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유’에 대하여이민숙 샘뿔인문학 연구소 소장 시인 니코스 카잔차키스, 그의 묘비명은 ‘자유’를 타고 흐른다. 그가 생전에 추구했던 인간 삶에서 자유란 무엇일까를 생각하는 과정이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며 발견하게 된 우리들의 ‘자유’일 수도 있다. 그는 죽었다. 그의 영원한 성지 크레타에 ‘자유를 데리고’ 묻혔다. “나는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이므로 ... ...” 이 말은 그의 묘비명일 뿐 아니라 그가 할아버지의 생에서 받아 올린 생의 비극적 사태들(터키와 크레타 전쟁)을 안고 책임자로서의 용기를 실현하며 끝까지 지향했던 인생행로의 한 축이다. 그러나 결코 용기는 자유의 씨앗은 아니었다. 그의 분신인 ‘조르바’는 전쟁에 대한 지극한 향수(민족과 국가를 떠받드는 자, 즉 전쟁영웅)를 반납하며 자유를 얻는다. 아나키스트, 그의 자유는 그 지점에서 출발하며 완성된다. 우리가 지향하는 인생의 축은 무엇일까. 어떤 인간을 만나 어떤 대화를 주고받고 그 말과 그 말에 속한 한 인생을 긍정한다는 건 참 행복한 일임에 틀림이 없다. 카잔차키스에게 정신적 충격과 깨달음을 주었던 건 니체 괴테 그리고 부처였다. 나에게 있어 알베르 까뮈가 그러했고, 공자와 노자 백범과 전태일과 김남주와 고정희... ... 오월과 광주와 순천과 여수가 그러했다. 오월과 광주와 순천과 여수는 고향의 흙이면서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견인하는 내 영육(靈肉)의 한 축이다. 그러나 나에겐 그 흙의 또 다른 흙이 책이다. 그 안에는 언어인 시가 있고 혁명이 있고 행위가 있다. 삶의 안일함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고결함이 있다. 내 삶이 구체적인 병마와 싸웠으므로 포기할 수 없는 건 지금껏 내 육체를 살게 한 실시간의 황홀(밥 한 숟가락, 포도 한 송이, 고구마 한 알을 먹는... ...)과 나를 둘러싼 인연에의 연민과 사랑이다. ‘크레타’를 통해 ‘메토이소노’를 보여주려 했던 조르바의 정신처럼 카잔차키스의 지향점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메토이소노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상태 저 너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일컫는다. 포도가 포도즙이 되는 것은 물리적인 변화인데 포도즙이 마침내 포도주가 되는 것은 화학적인 변화다. 포도주가 사랑이 되고, 성체(聖體)가 되는 것 이것이 바로 메토이소노다. 조르바는 망해버린 사업을 하나의 춤으로 변화시킨 것에 대하여 메토이소노라 이름한다. 거룩하게 만들기! 춤! 우리가 벗어날 수 없는 육체, 즉 현실의 고통이 어떻게 성화되는지 조르바를 따라 가 보기로 한다. 끝끝내 던질 수 없었던 전쟁과 핏줄과 민족과 고향인 크레타. 그러나 닿고자 하면 닿을 수 있는 생의 궁극은 꿈처럼 다가와 그것을 놓아버리는 자유에 이를 수 있거늘... ...조르바는 그의 춤을 위하여 노래를 위하여 연주하며 사랑하는 ‘산투리(크레타인의 악기)’를 자유라 한다. 그건 인간과 한 몸인 짐승임을 인정해야 하는 것, 결국은 인간이라는 자유가 첫 번째다. 모든 사람의 생은 그러므로 ‘자유’를 씨앗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그러나 그건 가능한가? 부처는 자유롭다. 그에게는 착한 영혼이 있으며 오래 전부터 그의 영혼을 길들여왔기 때문에. 그렇다면 카잔차키스의 영혼은 자유롭다는 건가? 그는 분명 부처를 만났다. 소설 속엔 끝없이 이야기 아닌 진실의 고백처럼 부처를 깃발처럼 흔든다. 흔들리며 독자를 수평선 너머로 빠트린다. 그곳에 빠지는 날은 우리도 조르바처럼 자유를 가질 수 있을까? 소설 속의 화자인 그는 어느 날 로댕의 ‘하느님의 손’이라는 조각상 앞에서 그 손바닥을 보고야 말았다. 그 안에는 무아지경으로 껴안고 몸부림치는 남녀가 있었는데, 그는 말한다. ‘사랑이야말로 이 세상의 가장 값진 기쁨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청동 손을 보니까 도망쳐 버리고 싶다’ 그는 이미 자유를 택하고 말았던 것. 버렸던 여자는 어떻게 할 것인가? 버린다는 것이 자유라면 사랑도 욕망도 어찌할 것인가? 그 안에 다시 부처가 있다. 모든 걸 버린 후에 부처는 해방인 자유에 이르지 않았던가. 조르바는 그러나 여인이란 여인 모두를 사랑한다. 그의 곁에 존재했던 여인을 버릴 수는 없었다. 인간에게 육체가 있는 한 ‘먹는다는 것’과 ‘사랑한다는 것’은 한없는 삶의 에너지인 것을 우리가 어찌 모른다 하랴. 빵 한 조각과 양파와 올리브 한 웅큼과 붉은 포도주와....춤추는 조르바가 거기에 있다. 영혼과 육체를 완벽하게 일직선상에 놓으려는 카잔차키스! 그는 살아간다. 모든 것을 춤추며, <야망도 없이 세상의 야망은 다 품은 듯이, 사람들에게서 멀리 떠나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되 먹고 마신 다음 잠든 사랑에게서 홀로 떨어져 별은 머리에 이고 뭍을 왼쪽, 바다를 오른쪽에 끼고 해변을 걷는 것, 그러나 문득 기적이 일어나 이 모든 것이 하나로 동화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 ...> 그것이 행복임을 안다. 그러므로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죄악인가?’ 라고 쓴다. 서둘지 말고 안달을 부리지도 말고, 이 영원한 리듬에 충실하게 따라가며... ...조르바는 ‘자연’이다. 노자의 ‘스스로 그러함’ 그의 자유는 그러한 인생을 씨앗 뿌리는 것일 뿐, 그 삶의 꽃은 어디에 어떻게 피어날 것인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이미 존재에게 선택권은 없다는 듯이. 죄 지은 여자를 편드는 건 죄인가 자비인가 자유인가. <인간은 자유다>라고 시작한 소설 속에서 모든 생명은 자유다!라고 선언하는 카잔차키스의 결론은, 아무도 하느님을 불러 그 죄를 물을 수 없다. 인간이니까. 죄지은 인간이니까. 스스로 그 죄를 벗어던질 수 있을 때 인간은 자유다! 삶이란 계절의 어김없는 리듬이요, 무상한 생명의 윤회요, 태양 아래서 차례로 변하는 지구의 네 가지 얼굴, 생자필멸(生者必滅)이 모든 사실의 사실일 뿐이므로. 오직 사람에게 일회적인 것, 즐기려면 바로 이 세상에서 즐길 수밖에 없다는 것! 그는 말한다. 영혼과 바다와 구름과 향기 사이에 무슨 은밀한 관계가 있는 것인가? 영혼이 바다요 구름이요 향기 같은데... ... 그야말로 ‘자연인 사람’의 생이 아닐까 말이다. 영혼 따로 자연 따로 사람 따로가 아니란 말이다. 예수가 뭐라고 했나? 값진 보배를 얻으려면 가진 것을 모두 팔라고 했단다. 값진 보배가 무엇인가, 영혼의 구원이다! 가진 것을 모조리 팔아버린 후에 얻을 수 있는 것. 그러므로 삶이야말로 더는 처박힐 수 없이 아름다운, 그러나 팔아버리고 나서 나비가 되는 역설의 바다다. 크레타의 아름다운 태양 아래 그 민중은 전쟁을 겪으며 눈앞의 모든 것을 파괴하는 인간, 인간끼리 그 인간을 죽이며 온갖 핑계로 날카로운 칼을 만들어 휘젓는다. 그러하고도 지금까지 지구인들이 벌이는 ‘크레타의 살상’은 공간과 시간을 구분하지 않으며 휘돌아가는 광기를 등에 업고 붉은 피를 뿌린다. 지구에서 인간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 피는 끝없이 흩뿌려질 것이다. 국가와 민족과 핏줄의 안녕과 번영과 영광을 위하여 21세기 제국주의자들은 저 먼 나라의 전쟁을 부추길 것이다. 내가 아니면 행복하기라도 하듯이, 우리 민족이 아니면 우리 국가가 아니면, ‘나’ 아니면 지상의 모든 전쟁놀음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 것처럼. 그 이기(利己)의 절정 속에 생명은 이미 해방도 자유도 요원하다. 진정 언제까지? 자유여 엿이나 바꿔먹어라! 조르바가 지금 저 햇살 속에서 지구를 바라본다면 뭐라고 말할까. 조르바와 그의 두목(책 속의 화자인 소설가)이 성취하고자 했던 사업의 마지막 날, 그것은 그 어떤 예언처럼 그들을 팽개쳤는데, 그 때를 이렇게 표현한다. <나는 모든 것을 잃었다. 돈, 사람, 고가선, 수레를 모두 잃었다. 우리는 조그만 항구를 만들었지만 수출할 물건이 없었다. 깡그리 날아가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 내가 뜻밖의 해방감을 맛본 것은 정확하게 모든 것이 끝난 순간이었다. 엄청나게 복잡한 필연의 미궁에 들어 있다가 자유가 구석에서 놀고 있는 걸 발견한 것이었다. 나는 자유의 여신과 함께 놀았다. 얻고자 하면 잃는다, 잃고 나면 해방된다. 그 때, 자유를 노래하며 춤출 수 있다. 자유가 공허와 함께 온다? 해방은 스스로가 지향했던 그 축의 허물어짐 속으로 찾아온다? 인간에게 주어진 삶의 그 어떤 것을 우리는 붙잡고 살아왔는가? 그 물음 속으로 나의 새벽도 밝았다. <외부적으로는 참패했으면서도 속으로는 정복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 인간은 더할 나위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끼는 법이다. 외부적인 파멸은 지고(至高)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었다.> 전쟁이여 영원히 참패하라! 누가 전승가(戰勝歌)를 부를 수 있겠는가? 그 많은 전쟁의 역사 속에서 인간에게 행복과 존재의 가치를 안겨준 적이 있었던가! 그 안에 자유의 길이 있다고 썼다면 그 모든 행위는, 언어는 거짓이다. 세계는 거짓 속에 잠겨있다. 버리고 버릴 것은 거짓된 욕망일 뿐! <나는,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은 지식도, 미덕도, 선(善)도, 승리도 아닌,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것, 즉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것을 뼈져리게 느꼈다... ...> 인간은 엄청나게 큰 나무의 조그만 잎사귀에 붙은 작은 구더기라고 카잔차키스는 말한다. 이 조그만 잎이 지구다! 갉아 먹히는 지구의 그 이파리가 위기의 공기 속에 든 지 오래다. 몸도 마음도 공포로 떨고 있는데... ...그 순간에 시작되는 게 바로 시(詩)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한다. 조르바는 알아듣지 못할 지라도... ... 육체적 인간 조르바와 그의 친구인 두목이 가리킨 영혼의 깃발 시는 우리가 간절히 원한다면 합치될 수 있을까? 질문 속에 질문이 있고 자유가 있다. 자유는 자유라는 씨앗으로 발아되지 않지만, 늘 우리는 자유일 수 있다. 보다 ‘절망적인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역설 속에서. 늘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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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의 핵심은 무엇일까 (4)이민숙 여수샘뿔인문학 연구소 소장- 시인 일송정 푸른 솔은 홀로 늙어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A)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깊이 새겨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B)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선구자>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 원제:<용정의 노래> 일제의 폭압이 극에 달했던 1933년 이 노래가 만들어졌다 한다. 시인 윤동주가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한 다음 해. 필자가 줄그어 표시한 부분은 작사를 했던 윤해영의 노래 구절이 아니라 용정에 발 디뎌 본 적 없었던 작곡자 조두남이 임의로 개사를 했다고 한다. 원래의 표현은 ‘눈물 젖은 보따리’(A)와 ‘흘러 흘러온 신세’(B)라고 한다. 어쨌든 그 시절의 용정과 만주, 우리 민족의 산천은 일제의 침탈에 먹을 것 입을 것 다 빼앗겨 눈물 젖은 보따리의 신세였던 것이다.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에 이르기까지 역사는 그늘져있는데, 이 굴곡진 심리적 박탈감이 2023년 8월, 이 날 이 시각까지 이르렀다는 게 통탄할 뿐이다. 저 거친 꿈의 선구자들은 무덤에서조차 벌떡 일어나 구천을 헤맬 것만 같다. 가슴 깊이 사죄하는 아침이다. 여기에서, 시 읽기의 한 지혜는 역사의 사실과 원저의 상관관계를 확인하며 읽어나갈 것, 그리하여 창작의 진실성을 확보한 후의 시어 선택의 적절한 과정을 습작에도 적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시적 상상력이 완성의 과정에서 중요하다 하더라도 ‘역사적 진실’에 있어서의 상상은 좀 더 비판적인 시각을 담보해야 하며 그 비판에 쓰이는 언어선택의 적절성도 사실이 담보된 후에라야 적확한 표현의 미를 구사할 수 있을 터! 거 나를 부르는 것이 누구요. 가랑잎 이파리 푸르러 나오는 그늘인데, 나 아직 여기 호흡이 남아 있소. 한 번도 손들어 보지 못한 나를 손들어 표할 하늘도 없는 나를 어디에 내 한 몸 둘 하늘이 있어 나를 부르는 것이오. 일을 마치고 내 죽는 날 아침에는 서럽지도 않은 가랑잎이 떨어질 텐데... ... 나를 부르지 마오. -<무서운 시간>/윤동주/ 엄연한 시절, 청춘의 시절, 윤동주의 시는 어둠 속 별이다. 사위는 깜깜 밤이나 시어가 가리키는 절실함이야말로 시에서의 가장 빛나는 절절함이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그는 용기와 함께 언어를 뱉는 순간에도 무서웠고 부끄러웠다. 그것은 ‘ 몸 둘 하늘’이 없었던 탓이다. 그는 더럽혀진 조국의 하늘 아래 찢겨진 민족의 영혼 곁에서 늘 시를 썼으나, 한 마디 결연하고 빛나는 시어를 직조할 수 없는 것처럼 표현했다. 모든 시가 너무 쉽게 써져-쉽게 씌어진 시/윤동주- 부끄럽다 하였다. 그의 부끄러움은 시 ‘서시’에 더욱 명징하게 표현되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릴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쉽게 씌어진 시>/윤동주 윤동주의 마지막 시다.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온갖 생체실험의 혹독한 고통으로 시달리다가 29세 된 1945년 사망하고 말았던 윤동주, 역사의 오류요 인류 잔혹한 전쟁놀음의 오류로 희생된 윤동주, 그의 영혼이 빚은 시들은 그러나 맑고 아름답다 아니 처절하다. 또한 결연하며 치열하다. 우리의 시 정신이 탁류에 휩쓸릴 때, 헹궈야 할 때, 윤동주의 혼이 담긴 시야말로 읽고 또 사랑할 그런 시의 원류가 될 것이다. 시창작이란, 역사의 오류를 톺아가는 작업 아닐까 싶은 것이다. 우리에게 질펀한 그 오류의 시기, 지금도 시의 본령은 우리 민족이 살았던 땅과 저 먼 바다를 관통하고 있다. 역사와 역사의 인물을 통해 시 창작을 실현할 작금의 과제를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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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의 핵심은 무엇일까(3)이민숙 여수 샘뿔인문학연구소 소장 , 시인 "남원에서 섬진강 허리를 지나며 갈대밭에 엎드린 남서풍 너머로 번뜩이며 일어서는 빛을 보았습니다 그 빛 한 자락이 따라와 나의 갈비뼈 사이에 흐르는 축축한 외로움을 들추고 산목련 한 송이 터뜨려 놓습니다 온몸을 싸고도는 이 서늘한 향기, 뱀사골 산정에 푸르게 걸린 뒤 오월의 찬란한 햇빛이 슬픈 깃털을 일으켜 세우며 신록 사이로 길게 내려와 그대에게 가는 길을 열어줍니다 아득한 능선에 서 계시는 그대여 우르르우르르 우레 소리로 골짜기를 넘어가는 그대여 ... ... ... --<지리산의 봄 1>-뱀사골에서 쓴 편지, 부분/ 고정희/ 『지리산의 봄』/문학과지성사 **그녀에게 지리산은, 뱀사골은 얼마나 절실한 사랑의 공간이었던가! 시대의 아픔과 존재의 고독한 서사를 지리산만큼 받아줄 곳은 없었다. 그녀는 끝없이 그 공간을 밟았으며 젊고 야성적인 생의 시간을 노래했다. 참담했던 역사와 비릿한 운명에의 예감처럼 지리산을 춤췄고 질리도록 썼다. 지리산은 그녀의 청청한 펜이었으며 땀방울이었다. “앞서가는 그대 따라 협곡을 오르면/삼십 년 벗지 못한 끈끈한 어둠이/거대한 여울에 파랗게 씻겨 내리고/육천 매듭 풀려나간 모세혈관에서/ 철철 샘물이 흐르고/더웁게 달궈진 살과 뼈 사이/확 만개한 오랑캐꽃 웃음소리/아름다운 그대 되어 산을 넘어갑니다/구름처럼 바람처럼/승천합니다” --<지리산의 봄1> 부분 **우리의 지리산을 고정희는 그대의 지리산으로 그대의 지리산을 살아있는 영혼들의 웃음소리로 가버린 영혼들의 슬픈 노래소리로 후여후여 ‘우르르우르르 우레소리’처럼 승천시킨다. 아... ...그녀는 그곳에서 또한 신화적으로 살과 뼈마저 거두며 승천하였다.(그때 나이 43세) 1991년 6월 9일.『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뒤에 여백을 남긴다』는 유고 시집을 남기고, 그녀는 지리산 맑은 계곡의 흐름처럼 크나큰 여백을 남겼다. 웅혼한 그 여백, 고정희 정신이 되어 지리산의 물소리 바람소리로 불렀던 열사들처럼(‘지리산의 봄9’에서 포효한 그 이름들, 김주열 전태일... ...박종철 이한열) 우리 곁에 남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아름다와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강물 어지러워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고 발아래 산맥들을 굽어보노라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는가, ... ... 저 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고요하게 엎드린 죽음의 산맥들을 온몸으로 밟으며 넘어가야 한다 이 세상으로부터 칼을 품고, 그러나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으로 저 절망의 능선들을 넘어가야 한다 ... ... <지리산의 봄 4-세석고원을 넘으며> 부분/고정희/『지리산의 봄』 **80년대의 그 피묻은 꽃잎들이 세석고원에 파도친다.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이라... ... 그 절망의 시대를 넘어가야 한다는 절규가 지리산으로부터 뜨겁게 메아리친다. 고정희는 지리산에 갔다. 지리산을 울었다. 역사를 품고 칼을 품고 진저리치는 슬픔 속에서 빙산 갈라지는 쩍쩍 소리를 들으며 고향의 들판처럼 걸어걸어 당도해야 한다고 한다. 드디어 우리가 당도한 곳은 그 어디인가! 자운영꽃 아득한 고향의 들판인가? 끝내 잃어버린 그곳을 그대는 썼는가? 그토록 갈망한 시의 수평선은 아득하기만 하다. 시창작은 아득히 멀어져가는 공간의 맥락을 바느질해야 하는 수선쟁이(시인이야말로 시대의 바느질 장인)의 새벽인 것이다. 이렇듯 시인의 발걸음 하나하나 공간 한 처소 한 열망은 시가 되어 꽃 피어난 것이다. 그런 공간 그대는 가졌는가? “비 오는 날엔 금당댁 할머니 약 사러 온다 인기척에도 울컥 일어서는 가슴 편도부터 기관지까지 무성하게 뻗은 세균들 그보다 더 깊은 마음의 바이러스 집 나간 아들 걱정 “지침이 많이 나 머리도 톱질하는 것 맹키로 아프고 온삭신이 절구가 내리치는 것 같당께 잘 지줘 한 방에 낫게” 온전한 것이라곤 겹겹이 속옷 껴입은 마음뿐 그것마저 놓으면 가벼워질 텐데 밤마다 이불 덮어주고 싶은 아드님은 꼭 돌아올 거예요 색색의 알약 내려놓고 할머니의 거북손 잡아주었다“ --<겨울 처방>/김청미/『청미 처방전』/천년의시작 “오늘이라도 팍 죽어버렸으면 좋겠구만 목숨은 왜 이리 고래 심줄처럼 질긴지 산목숨 맘대로 끊어버릴 수도 없고 자다가 영영 눈 감으면 원이 없겄어 오래 살먼 살수록 자식들이 고생이랑께 근께 나헌테 더 약 먹으란 소리 말랑께 근께 약을 자셔야지요 갈 때 가더라도 건강하게 살다 가야지 산송장맹키로 자리에 누워 벽에 똥 바름서 자식들 힘들게 하먼 안 되니께 이것저것 약을 먹어서 건강하게 사는 것이 자식들 맘 편하게 하는 것이랑께요 --<우째야 쓰까?>/ 김청미/『청미 처방전』/천년의시작 **저곳은 화자(시인)의 직장인 약국이다. 약사와 환자 사이의 대화가 시의 중심결이다. 약국에서나 주고받을 수 있는 생로병사의 풍경 언어들, 무엇 하나 만만치가 않다. 죽고 싶다 약 먹기 싫다 집 나간 아들이 안 돌아온다, 거북손 할머니의 꺼칠한 마음이 가여워서 어쩌나... ...약사의 처방으로 받아드는 건 마음! 한 위로를 뒤로 하고 가는 할머니 그 공간을 서러움으로 채운다. ‘겨울 처방’ ‘우째야 쓰까?’ 얼어붙은 생의 상처들, 그 사유가 공간의 미학 아닐텐가! **꼭 어디라고 특정 지을 필요는 없다고 치자. 그러나 시적 체험은 정신만은 아닐 터, 글이란 어떤 경험이든 추상이든 일단 살아버린, 살고있는 이 공간을 벗어날 수는 없다. 그곳이 씨줄이라면 날줄이라는 시간은 필요충분조건! 아무리 텅 빈 삶의 지향점이라 해도 시적 체험은 향기롭고도 정결하거나, 피비린내 나는 목숨이 오고가거나, 어둠과 빛의 양면적인 체험을 달고 다닌다. “북위 45동 동경 160도. 바다에 부딪히는 바람의 피리소리 집어등 아래 부서진다. 하늘 향해 고개 들어도 마음은 자꾸 가라앉는다. 떠나온 날 만큼 남은 돌아갈 날. 아직 어창은 반도 차지 않았는데 외로움 벌써 가슴 채우고 남는다. 무선 침묵시간 3분, 송신 버튼 누르지 않고 하나하나 불러보는 이름. 해도 위 항로 짚어보면 눈은 손보다 먼저 고향땅에 닿는다. 망망대해 뜬 보름달은 고향집 창도 넘겨다 볼 것이다. 아내는 뒤척이다 그 달빛 덮고 잠들 것이다. 쿠릴 열도 따라 흘러오는 빙하 녹은 물결에 월광이 얼고, 선원 침실에는 잠들지 못하는 외로움들이 흔들리고 있다.” --<북태평양은 잠들지 못한다> 전문/이성배/『이어도 주막』/애지 **먼 먼 대양의 어느 지점, 그곳이 어디인지 우리는 가보지 못했다. 아니 지나쳐본 적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망망대해의 저 외로움이나 고향에 두고 온(제2의 공간) 달빛을 화자는 쿠릴 열도 어딘가의 바다, 빙하 녹는 물결 속에서 보고 있다. 공간의 시작은 북위 45도 동경 160도(제1의 공간), 그것만으로도 시는 성공이다. 상상의 거친 물결 속으로 금세 데려다준다. 역설적인 것은, 되돌아보며 돌아갈 손바닥만한 고향땅이 다시금 시(독자)를 적신다. 시는 곧바로 출렁! 흔들린다. 갈수록 태산이다. 공간의 궤적을 더 바랄 것도 없다. 시창작의 산실은 이렇듯 각자의 체험 속에서 뜨겁게 번뜩이고 있을 터! “늙거나 상처가 심해 떠오를 힘조차 없으면 고래는 숨 쉬지 못해 바다에서 죽는다 허파가 터지기 직전의 긴 들숨으로 고래 살아가듯 사랑은 서로의 호흡 가슴으로 마시는 것 고래가 숨 쉬지 못해 바다에서 죽듯 당신 가슴에 사는 내 사랑도 그 가슴에서 죽는다 삶은 들숨 날숨 고르게 쉬는 것 사랑은 마음에 피우는 한 송이꽃 바다를 사랑한 고래는 바다 깊어 빠져 나오지 못한다.” ... ... ... --<고래는 바다에서 죽는다> 부분/이성배/『이어도 주막』/애지 **그의 ‘바다’는 끝없는 시적 공간이며 서사의 난장이다. 공간을 헤엄치는 고래가 곧 시를 헤엄치는 바다를 숨 쉬는데...시를 들여다보는 독자는 꼼짝없이 빠지고 만다. 시(바다) 속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단 말인가! 죽는다 고래는 바다에서 그대는 사랑 속에서, 어느 날이라고 할 수 없는 게 시의 경지인가? 그 공간은 시간을 담보하고 있지 않을 것만 같다. 빠지면 죽고 마니까. 화자의 바다 바다 그리고 또 바다, 설레임 속에서 풍덩 빠져버린 공간의 함몰지경이 시의 새 탄생지점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시는 파도치듯 바다의 푸르른 공간을 날고있다 그러므로 받아쓰기하라 어느 곳(공간은 무한대!)에 가면 연필에 침 발라 곧바로! 지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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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의 핵심은 무엇일까(2) ‘역설의 시’이민숙 샘뿔 인문학 연구소 소장 (시인) “팔을 다쳐 깁스를 하고 오니 너나없이 반긴다 염려가 아니고 환대다 식당 여자는 껴안을 듯이 두 팔을 내밀고 데면데면하던 이웃도 나를 보더니 얼굴을 편다 좌회전하던 먼 이웃도 우회전하며 손을 내민다 혁대 풀고 거웃까지 보여가며 봐봐 나도 석달 고생했다고 한여름에 얼마나 개고생이냐고 운전은 되냐고 팔 아니라 대가리였으면 좆 됐을 거 아니냐고 말은 그렇지만 정작 재앙의 기억들을 떠올렸을 것 재앙이 가져다준 새잎 기억들을 탈 없기를 원하지만 말짱한 것은 뻔뻔한 콘크리트 망가진 뒤에야 간신히 새잎이 열리는걸 지난날의 우리가 부서지지 않았더라면 별들이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하지 않았더라면 당신이라는 거울 앞에 내가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가까운 죽음 나의 죽음이 기다리지 않는다면 미래가 말짱할 곳은 사막뿐 재앙이 준비돼 있지 않다면 우린 아름다움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을 것 행복은 수백갈래지만 재앙은 한곳을 향해 있어 우리 모두 한곳 재앙을 바라보면서 얻는 구원은 서로 손을 뻗어야 한다는 것 아름다움을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한다는 것 그리하여 경험하지 못한 대홍수의 기억이 사소한 일에도 우리 모두를 뒤흔들어놓기도 한다는 것” -<재앙의 환대>전문/ 백무산/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작과비평 #‘재앙’은 환대 받을만한 사건인가? 우리들의 일상이 흔들리고 안전하지 않고, 사랑이 깁스를 해야 할 만큼 탈이 났는데 ‘그것’이 누구의 얼굴을 펴게 하고 좌회전하던 그 등의 써늘함에서 우회전으로 돌아서서 나를 바라보고 손을 내민다. 바로 ‘재앙’의 진면목이라고 화자는 말한다. 그 사태를 통해 기억들은 그로부터 비롯된 ‘새잎 기억’들을 재상영해 낸다는 것이다. 말짱한 것들은 ‘콘크리트’라고, 그러나 기어이 부서져야만 간신히 ‘새잎의 길’이 열린다고 한다. #‘죽음’은 우리네 가여운 생의 깨우침에서 가장 거대한 칼로리원인가? 그것으로부터 ‘아름다움’을 깨우친다니? 수많은 행복의 갈래가 아니라, 한곳 재앙(죽음)을 바라보면서 구원에 이른다는 것. 사랑도 비참도 재앙도 어쩌면 그러한 ‘구원을 향한 대홍수’라는 것이라니... ... #시는 역설의 산물이다. 당연하다 그 이유, 삶이야말로 역설이니까. 예기치 않은 역설적 사태도 많지만 어쩌면 우리에게 이미 주어진 삶의 사태가 필연적 역설이다. 태어남과 죽음, 환희와 고통, 빛과 어둠, 더 말해 무엇하랴? 우연이라는 껍데기가 아차 그러한 필연의 형상들을 살짝 속이며 우리의 하루를 이끌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러한 착각이 한시라도 생의 진실을 외면하게 하면서 웃게도 하고 울게도 할 뿐. 그렇다고 운명만이 생의 모든 것인가? 필연이 운명이라면, 역설도 운명일 터, 무엇 하나 시적 창조의 언어를 비껴가지 않으리. “죽은 자에게 바칠 꽃을 들고 서 있는데 벌이 날아와 앉네 꽃은 이곳과 저 너머 사이에 피어 단절의 아픔에 위안을 주고 남은 자들은 인연의 안타까웁을 향기로 이어보려는데 꽃은 다만 자신의 생리를 다해 절정의 가쁜 빛깔을 토해내고 나는 앞에 선 여인의 진한 머릿결 향기에 발을 헛디디고 저 개새끼 때문에 내가 왜 우냐고 퍼질러 앉아 펑펑 우는 검은 상복의 여자 벌은 하루치의 삶에 몰두해 있고 죽은 자 앞에서 나는 벌겋게 삶에 취해 있고” -<조문>전문/ 백무산/ 『이렇게 한심한 시절의 아침에』/창작과비평 # ‘꽃과 향기와 절정의 빛깔과, 벌과 여인의 진한 머릿결의 향기와, 하루치의 삶’과... ...죽은 자를 기억하고자 하나 이미 단절된 필연이 한 공간에서 교차하고 있다. 그 시간의 풍경은 지나가면 사라질 ‘헛발질’인가? 꽃은 늘 피지만 그냥 피어있지 않다. 그 향기 ‘절정의 가쁜 빛깔’을 토해낸 뒤 지고 만다. 삶은 꽃인가? 죽음은 꽃인가? 꽃으로 표현되는 그 역설이 ‘조문의 날’을 꽃피우고 있다. 시는 조문의 날을 꽃 피우는 언어의 유희다. 그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니 그것을 형이상학이라고만은 단정 지을 수 없는 이유일 것도 같다. 늘 언어는 존재의 집을 짓고 살아간다. 꽃이라는 시를 피우고자 하며. 그러나 존재는 영원한가? 금세 시들어 버릴 꽃이 시다. 시인들은 ‘저 새끼 때문에 내가 왜 우냐고’하는 여인처럼 퍼질러 앉아 상복의 시를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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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에 서서이민숙 여수 샘뿔인문학 연구소 소장 (시인) 뒤뜰 언덕에 아카시아꽃 하얗게 필 때 홀연히 사라져버린 오빠 그리워 동생들과 꽃잎을 씹어가며 울던 그해 오월을 생각한다 유리구슬처럼 눈망울이 반짝이던 우리 오빠는 몇 달을 감옥에서 살다 나온 뒤로 초점을 잃게 뒤돌아서 잠만 자다 잠꼬대를 하는 소리에 놀라 등줄기가 서늘해지던 그해, 여름의 끝 해마다 언덕에 아카시아꽃 흐드러져도 울 오빠 빛나던 눈동자는 돌아오지 않았다 오빠하고 부르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 웅크리던 그렇게 그렇게 사십여 년 세월이 흘러왔는데 울렁울렁 아카시아꽃 피는 오월이면 오빠에게 묻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아직도 묻지 못한 말이 있는데 그해 감옥에서 구타와 고문에 잃어버린 구슬처럼 빛나던 눈동자는 어디에 두고 온 건지 제복 입은 장정들이 지나만 가도 흠칫 놀라는 모습을 보며 속으로만 외쳐보는 오빠, 아카시아 꽃 피는 오월이 오면 찾으러가자 -오미옥, <아직 묻지 못한 말> 전문/ 『2023, 오월문학제 시화작품집』 “그 음악이 울릴 때 우리는 밖에, 안개 속에 있는 동료들이 로봇처럼 행진을 시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영혼은 죽어 있었다. 음악은 바람이 낙엽을 날리듯 그들을 떠밀며 그들에게서 의지를 몰아낸다. 의지 같은 것은 이제 없다. 북소리 박자가 걸음이 되고, 반사작용으로 지친 근육을 잡아당긴다. 독일인들은 이 점에서 성공했다. 1만 명의 동료들은 단 하나의 회색기계들이다. 그들은 정확할 정도로 결연하다. 생각하지도 원하지도 않는다. 그저 걸을 뿐이다. 들고 나는 행진에 SS가 빠지는 일은 결코 없다. 저들이 창조한 이 안무, 죽은 인간들의 춤, 안개에서 나와 다시 안개로 나아가는 분대의 모습을 구경할 권리를 누가 저들에게서 빼앗을 수 있는가? 저들의(나치의 -인용자) 승리를 이보다 더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것이 어디 있겠는가? -프리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부분 인간에게 묻는 일, 인간답지 못 한 그런 일을 두고 던지는 물음, 그건 잊을 수 없어서 또한 그러할 것일 터, 오월 광주가 그러하며 사월 제주와 세월호가 그러하며 이태원 사태가 그러하다. 아니 그보다 얼마나 더 많은가! 셀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한 역사의 핏빛 시간들은 차마 잊을 수 없고 잊지 못해 참담하다. 올해 ‘오월문학제’는 오월항쟁 43주기의 전체를 일순 불러온 행사였다. 오월의 정의, 문학의 실천으로! 라는 한 마디를 내세웠다. 무엇이 정의이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오월은 왜 아직 어둠이며 신화적 올빼미의 시간을 그리워하고 있는가. 오월 광주는 아우슈비츠의 미메시스라도 된다는 말인가? 현재도 한국 사회에선 인간일 수 없는 권력자와 그의 하수인들이 오류의 잿빛 가로등을 켜고 있다. 모든 사건들은 조작되고 검찰들만이 정의의 칼날을 움켜쥐고 있는 냥 겁박하고 있는 나라. 거대한 쇠사슬이 한반도를 옥죄고 있다. 구슬처럼 빛나던 시인의 오빠의 눈동자는 어디로부터 찾을 수 있다는 건가? 사회적 건강성으로도 그 기억을 치유할 수 없을진대... ...잃어버렸다 또 잃어버려야 할 것 같다. 영영 찾아낼 수 없는 오월의 정의, 아니 사계절의 정의가 흙탕물에 젖어가고 있다. 오월항쟁기념탑 뒤 새로 조성된 묘역에서,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난다』의 리영희 선생님을 참배하고 왔다. 술 한 잔 따르고 왔다. 말의 정의와 글의 결기에 빛나던 바른 언론인 리영희의 묘소 앞에서 오늘날 대한민국의 언론을 생각했다. 누가 시대의 배반자들인 언론인들의 정신에 채찍질을 가할 수 있을까! 구 묘역에 안장된 시인 김남주는 시로 그 묘안을 일갈했다. "대지로부터 곡식을 거둬들이는 농부여 바다로부터 고기를 길러내는 어부여 화덕에서 빵을 구워내는 직공이여 광맥을 찾아 불을 캐내는 광부여 돌을 세워 마을에 수호신을 깎아내는 석공이여 무한한 가능성의 영원한 존재의 힘 민중이여 ( .... ....) 이제 빼앗는 자가 빼앗김을 당해야 한다 " -시 <민중> 부분/ [김남주 평전]/ 김형수 김남주 생애를 완벽에 가깝게 복원해 낸 김형수의 저서 [김남주 평전]이 올해 오월문학상을 수상했다. 이 책에서 김형수는 말한다. "고백하건대 '지금 이곳'의 내가 김남주를 기억하는 일은 날마다 닥쳐오고 있는 '허황한 미래'에 대한 저항의 서사를 놓치지 않으려는 한 수단이었다. 한때 그의 시는 정치적 태도 때문에 칭송되었으나 이제 삶의 위대한 여정을 이끈 정신적 유산으로 재평가되고 연구되어야 한다. 나는 세상의 모든 '촛불'같은 영혼들이 김남주 이야기를 꼭 간직했으면 좋겠다. 오월의 촛불이여 타오르려 하는가? 세상의 영혼들이여 이제 곧 위대한 여정으로서의 한 인간 김남주의 동지가 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누구에게나 밥 한 공기는 소중하다. 이팝꽃 피는 망월동에서 우러렀던 민중이라는 밥 한공기의 정의를 생각하는 오월이다.